Part 3. 심리학으로 바라보는 직장생활 #4
사람은 불안해서 안쓰러운 존재다.
한시도 불안하지 않은 적이 없다. 살아가는 존재로서 생존과 연루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에 그렇다. 앞서 우리는 '공포'라는 최초의 감정이 생존을 위한 과정에서 왔고, 이것이 바탕이 되어 '불안'이 발생했다는 것을 살펴봤다. 즉, 불안은 생존을 위한 기제다.
잠깐 말장난을 좀 해보자. 우리는 직장에 왜 다니는가? 입사 동기 좀 묻지 말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먹고살기 위해 돈 벌려고 온 것이 뻔한데 뭘 묻느냐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먹고사니즘'은 결국 '생존'과 관계되어 있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다. 직장인들의 불안이 둘째 가라면 서러운 이유다. 더 안타까운 건, 직장인에게 있어 '생존'은 한 가지만의 의미가 아니다. 돈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생물학적 '생존'과 승진을 거듭하며 회사에서 버텨내야 하는 사회적 '생존'이 그것이다. 그러니 불안은 중첩되고 가중된다.
다시, 직장인은 (더) 불안해서 (더) 안쓰러운 존재다.
아무리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불안은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영혼을 잠식할 정도로 무섭고,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으로 내몰 정도로 섬뜩하다. 그러니 사람은 불안에 대한 '불안'이 있다. 그리고 그 (불안에 대한)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해, 즉 영혼이 좀먹거나 당장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그중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접하고 있는 '억압과 억제'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명이 발생하고 사회가 조성되면서 사람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억압과 억제'를 사용한다. 이는 매우 '자동적'이다. 사회적 규범이나 문화, 그리고 금기시되는 것에 대해 사람의 욕구는 마음껏 발산되지 못한다. '억압'을 넘어서 이제는 사람들이 알아서 '억제'하는 모양새다. 직장에서라면 이 '억압과 억제'의 밀도는 더해진다. 이미 사회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가득한데, 직장에서는 그 제약이 더 심하기 때문이다. 상하좌우 모든 관계가 걸리적거린다. 이로 인해 불안은 조성되고,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불안한 '자아'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결국 방어기제를 꺼내 드는 것이다.
우선, 대략 감이 잡혔겠지만 '억압'과 '억제'의 사전적 뜻을 알아보고 가자.
1. 억압
기를 펴지 못하도록 인간의 행동이나 자유 등을 강제로 억누름
어떤 감정이나 욕망 따위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억눌러 의식에 떠오르지 않게 하는 일
2. 억제
어떤 행위나 현상 따위가 성하지 않도록 억지로 내리누름
감정이나 욕구, 충동 따위를 억누름
- 어학사전 -
심리학에서 말하는 '억압과 억제'도 이 사전적 의미와 크게 다름이 없다. '억압'은 좀 더 일차적 자아 방어기제다. 프로이트는 '억압'을 정교한 방어기제의 수단이자 불안을 가장 직접적으로 회피할 수 있는 요소로 봤다. 의식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충격적이어서 무의식적으로 억누른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그 충격이 크지 않아도, 학습된 규범에 무기력화된 욕구불만/불안이 나도 모르게 억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반해 '억제'는 좀 더 의식적인 영역이다. 의식적으로 생각과 느낌을 눌러버린다. 욕구불만에 의한 긴장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을 억제하여 의식의 범주에서 말살하려거나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억제'가 자동화되거나 극단적인 경우 이는'억압'이 되기도 한다.
'억압'은 죄책감이나 수치심 또는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경험일수록 강해진다. 이에 대해 바로 반응하지 않도록 위협적인 충동, 환상, 기억, 소원 등이 의식화되는 것을 막는다. 본능적 충동이나 반사회적 행위가 곧바로 표현되지 않도록 포기시킴으로써 윤리와 관습을 유지하고 그 제도에 적응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억압된 욕구나 불안, 충동은 계속 의식화되려는 경향이 있다.
회사에서 만난 한 여자 부장님의 예를 보자.
이 분은 일 잘하기로 소문이 났다. 차세대 임원 감으로 거론되는 분이다. 그분의 업무 스타일은 꼼꼼하고, 진취적이며 집요하고 독하다. 그 누구, 어느 부서와 싸워도 이겨낸다. 원하는 자료나 성과는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다 보니 주위 사람들과 부서에서는 요주의 인물로 꼽힌다. 인정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자신의 성과와 목적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고 종내에는 그것이 남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오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그분은 본인이 매우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조용하고 평온한 성격이며,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매우 싫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회사에서 여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허투루 보이기 싫었고, 그래서 죽자 사자 업무에 몰입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우선적으로 챙기고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성과와 목표 달성에 보다 집착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 부장님은 굉장한 양의 '억압과 억제'를 무의식적/ 의식적으로 가동했을 것이다. 직장 내에서의 지위, 여자라서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와 불안, 본인의 내성적 성격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사람에 대한 압박과 싸움, 갈등 등.
이렇게 '억압과 억제'에 의해 꾹꾹 눌러 담긴 욕구불만과 불안이 터져버린 것은 담당 내 워크숍 때였다. 1일 차 행사가 끝나고 마련된 술자리. 캠프파이어를 위해 피워놓은 모닥불을 누군가 위험하게 발로 차고 있었다. 한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고, 알 수 없는 고성을 외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들 놀라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 자체도 이상했지만, 그러고 있는 사람이 바로 차세대 임원 감으로 거론되고 이는 그 여자 부장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부장님은 바로 자신과 갈등이 있었던 사람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있는 직속 상사인 상무님께도 같은 행동을 하고 소리까지 질렀다. 평소 모습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철두철미하고 논리적이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 실수나 부족한 모습으로 책잡히는 것을 소스라치게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꾹꾹 눌러 넣은 쓰레기봉투가 갑자기 터지듯이 그분의 욕구불만과 불안은 결국 '의식화'가 된 것이다. 물론, 이는 술에 의해 '자아'가 잠시 제 기능을 잃음으로써 '이드'에 지배된 경우라 볼 수 있다. '초자아'에 의해 참고 눌러왔던 감정, 그리고 자신의 성격에는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며 갈등을 겪었던 좋지 않은 기억들이 터지고 만 것이다. 다음날 그 부장님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직장 내에서는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나 또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이성을 잃고 직장 상사에게 대든 적이 있다. 난 그때의 내 '감정'을 정확하고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평소부터 나는 그 상사로부터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하지만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이라는 관계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즉, '억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억압'은 순간순간 튀어 올라 마음을 욱하게 했지만 이내 '억제'를 통해 의식적으로 다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 상사는 내가 어떤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 의미 없는 일을 왜 하나?"라는 말을 했고, 나는 그동안 '억압과 억제'로 눌러놨던 울분을 그대로 토해냈다. "아니, 그러면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일은 모두 무의미한 것입니까?"라며 면전에서 소리를 질렀고, 이 모습을 모든 팀원들이 본 것이다. 솔직히, 그 말을 해버리고는 나도 놀랐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하고싶은 말을 토해놓고, '상상'이었다며 회상하는 장면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미 그 외침은 내 입을 나온 뒤였다. 그 상사도 많이 놀랐고, 나중에는 둘만의 시간을 가지며 서로 간의 오해를 풀긴 했지만 그 여운은 길었던 기억이 난다.
'억압'이 무서운 것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는데 있다. 그리고 이는 자꾸 '의식화'되려 한다는 것이다. '억제' 또한 쉬이 볼 것이 아니다. 의식적으로 제어가 가능하다고는 하나, 임계치가 있다. 즉, 참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봐야 한다. 오늘 하루 직장 생활을 돌아봤을 때, 기분 나쁜 일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에 대한 '기분'과 '감정'을 곱씹어야 한다. 대게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회피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을 직시해야 한다. 나의 기분과 감정, 행동을 미루어봤을 때 무엇을 '억압'하고 있을지, 실제로 어떠한 노력을 들여 '억제'를 했는지. 그러면 보이지 않던 무의식적 영역의 것들이 조금씩 의식화된다. 터지기 전에 먼저 만난 욕구불만이나 불안, 우리는 그것을 조금은 줄일 수 있다. 또는 우리가 얼마나 참아와서 임계치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느낄 수도 있다. 때로는 폭발시켜서 해소해야 하는 것도 좋겠지만, 어디 우리 직장생활이 그런가. 생존을 위해 처절히 살아야 하는 직장인에게 그것은 최상의 방법이 아니다. 아니, 그저 최악의 것임을 잊지 말자.
나는 직장인으로서 '생존'이란 말을 떠올릴 때, '사회적 생존'이나 '생물학적 생존' 보다는 '존재적 생존'을 더 강조하고 싶다. 승진이나 고액 연봉, 먹고살아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나 자신'이 바로 세워져야 한다. 내가 없으면 사회적, 생물학적 생존이 의미가 없다. 내가 내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억압과 억제에 짓눌린 우리의 욕구나 불안을 무시하면 '나'는 더욱더 힘들어진다. 직장인의 삶이 공허하고 무기력한 건, 짓눌러대기만 한 우리의 마음이 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 아픔을 직시하고 마주하는 것을 싫어한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억압과 억제'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우리가 그렇다. 내가 왜 그러는지, 저 사람이 왜 갑자기 저러는지. 우리는 관찰하고 또 관찰해야 한다. 지금 당장, 나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자. 내가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나도 모르게 짓누르던 불안은 무엇이고 애써 참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내가 나의 마음을 봐주지 않으면 누가 봐준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