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Dec 01. 2018

확실한 미래

가장 확실한 건,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미래 앞에서 초라하다.

불확실성 때문이다. 당장 1초 뒤의 상황도 알 수가 없으니 어찌 무기력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볼 안에 수 십 개의 도토리를 머금은 다람쥐처럼, 우리네에게 미래를 위한 오늘 하루는 그래서 악착같다.


물론, 누군가에게 미래는 기회다.

잘 나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지만, 아무런 희망도 없던 사람이 대단한 내일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개인의 노력 외에 어느 정도의 '운'은 따라줘야 가능한 일이다. '운칠기삼'이 아닌 '운칠복삼'의 생태계에선 더 그렇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때론 '확실한 미래'가 사람들의 숨을 조여 오기도 한다. 미래가 정해져, 내가 무엇이 될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 왜? 직장인에게 있어 '확실한 미래'는 뻔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원은 대리, 대리는 과장, 과장은 차장, 차장은 부장이 되어가는 과정. 이처럼 확실한 미래가 있을까? 5년 후, 10년 후의 내 모습이 도처에 널려있다. 무언가 새로운 걸 기대하지만, 나의 기대를 충족하는 모습은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 '확실한 미래'의 궤도를 뛰쳐나간다.

이미 자신의 미래인 어느 직급에 올라선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다. 팀장을 바라볼 때, 고위 임원을 바라볼 때. 과연 나는 저 자리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저 자리에서 그들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감성적이면서도 합리적인 고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가 오만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뭐라고 그들의 '행복'을 운운할까. 정해져 있는 직급에 다다른 그들의 고민과 보람, 열정과 성취감을 알고나 하는 생각일까? 나의 꿈을 남에게서 꾸면 안 되는 것처럼, 남의 꿈을 알지 못하는 내가 그들의 삶을 속단해선 안된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 내가 아는 어떤 직급에 오르겠지만, 아직 그것은 나의 미래가 아니다. 누군가 이미 정복한 산봉우리라 할 지라도, 그것을 내가 오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올라가는 과정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역경. 그리고 말로만 듣던 정상에서의 성취감은 오롯이 내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삶은 '불확실'이라는 큰 범주에 속해있다.

그 안에서의 '확실한 미래'도, 결국 '불확실' 속에 속한 장난이다. 확실하다고 생각한 것들도, 불확실한 운명이 그것의 몸을 잠깐 흔들면 모든 것이 요동한다. 사원이 대리가 안/못될 수도 있고, 과장이 갑자기 부장이 될 수도 있으며 직장을 벗어나 아예 진로가 바뀌기도 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확실한 것 따윈 없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건,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결국 다시 오늘을 바라본다.

지금의 감정. 과거로부터 오는 후회. 미래를 향한 걱정과 고민. 한 달에 한 번 급여를 받는 존재의 숙명이자, 지금 숨 쉬는 모든 존재들의 운명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겐 '확실한 미래'인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호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