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오는 길에 몇 사람들이 나를 보고 손가락질하거나 수군거렸다. 아마도 옷 군데군데 묻어 있는 피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제 갈길을 가거나 내가 보이지 않는 듯 행동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집 근처에 다 와서야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혹시 촬영 가시는 길인 가요?"
"예?"
예상치 못한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개인방송 이벤트 촬영 이런 것 하시는 것 아니에요?"
남자는 안경 너머로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이 크고 동그란 안경이 남자의 인상을 한층 더 장난스럽게 보이게 했다.
"아뇨 그런 것 아닌데요."
"아 좀! 그냥 가자니까!"
남자 옆에 있던 여자가 남자의 팔을 끌며 말했다.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에 한쪽 팔에 숫자가 적힌 과잠바를 입은 것을 보아 대학생인 듯했다.
"아니 잠깐만, 궁금하잖아. 개인방송 촬영하는 것 직관하고 싶었단 말이야."
"아니라고 하시잖아 창피하게 굴지 말고 좀!"
"에이 맞다니까. 누가 대낮에 피를 뒤집어쓴 분장하고 이렇게 거리를 다녀. 안 그래요?"
남자가 동의를 구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옆을 보니 여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미안한 듯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나는 이 상황이 불편했다. 옷에 묻은 피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냄새가 나를 더욱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다시 아니라고 말하며 걸음을 옮기려 하자 남자는 내 소매를 잡으며 개인 방송이면 꼭 한 번 참여해보고 싶다며 부탁했다. 순간 주머니 속의 칼끝이 허벅지를 살짝 찔렀다. 나는 주머니 속에 아직 피가 덜 닦인 과도를 꺼내 남자의 목젖에 갖다 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가 이 칼을 꺼내면 남자는 그때도 개인방송 같은 헛소리를 지껄여 댈까?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고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집 쪽으로 달려갔다. 얼마 안가 집 근처에 도착한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당장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몸에서 올라오는 피 냄새 때문에 집 안으로 바로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집 뒤편에 있는 놀이터로 발걸음을 옮긴 나는 벤치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말간 하늘에 조각조각 떠있는 구름이 한적하게 흐르고 있었다. 놀이터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들 서넛과 여자아이 하나가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오빠 나도 할래!'라며 따라다니는 것을 보아 남자아이들 중 누군가의 동생인 듯싶었다. 나는 아무리 그렇게 애원해도 저 나이 때 남자애들은 절대로 껴주지 않을 걸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이들은 내가 쳐다보든 말든 공놀이에 집중했다. 개중에 키가 좀 더 큰 남자아이가 힘껏 걷어찬 공이 그네를 넘어 저 멀리까지 날아갔다. 아이들은 난처한 듯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둥글게 모여 가위바위보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여자아이도 함께였다.
그 사이 데굴데굴 굴러간 공은 언덕을 내려가기 직전에 있었다. 아이들은 그것도 모른 채 가위바위보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달려가서 공을 가져다줄까 소리쳐 알려줄까 고민하다가 이내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내가 공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때 '뻥'하고 공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 녀석들 볼은 운동장 가서 차랬지!' 하는 걸걸한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카키색 점퍼를 걸친 사내가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들은 남자가 걷어찬 공을 가지고 '경찰 아저씨다 도망가!'라며 까르르 웃음과 함께 아파트 단지 안쪽으로 달려갔다. 남자는 '녀석들 참'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다 벤치에 앉아 있는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때와는 다르게 차가운 표정으로 내 몸을 훑은 사내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며 '사고 치지 맙시다'하는 들릴 듯 말듯한 혼잣말과 함께 아파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나는 괜히 오른쪽 주머니를 더듬으며 과도가 튀어나오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멀어지는 카키색 점퍼의 남자를 보며 나는 엄마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옆 동에 그 사람 있지? 아니 왜,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댕기는 남자 말이야. 다 낡아빠진 국방색 옷! 그 사람이 글쎄 형사랜다 형사.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휴.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마나 눈이 매서운지 나는 처음에 깡패인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내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경비아저씨한테 슬쩍 물어봤더니 강력 범죄만 담당하는 형사라는 거야 글쎄. 어쩐지 눈빛이..."
엄마는 그냥 경찰도 아니고 '형사'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만으로도 모든 범죄에서 안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말했다. 그 당시에는 엄마에게 제발 다른 사람에게 관심 좀 갖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뭐에 홀린 듯이 이거다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남자가 들어간 현관으로 따라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는 7층에서 멈춰 있었다. 버튼을 눌러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탄 나는 7층을 눌렀다.
'띵-'
청아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남자가 어느 쪽 집에 사는지는 몰랐지만 50%의 꽤 큰 확률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남자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중학교 동창이던 여자애의 집에 있었어요. 근데 걔가 죽어있었어요! 그것도 속옷만 입은 채로요! 아마 칼에 찔려 죽은 것 같은데 이 칼 같아요! 아 제가 그런 것은 아니고요, 저는 단지 그 집에서 정신을 잃었을 뿐이에요!'
그럼 형사인 그 남자는 '아 그러십니까? 우선 이쪽으로 앉으시죠. 차를 좀 드시겠습니까? 커피? 녹차? 아, 일단 그 위험한 칼은 이리 주시 지요. 다치실까 봐 걱정이네요. 자, 그래서 선생님 존함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다가는 당장 수갑이 채워져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로 시작하는 미란다 원칙을 듣기 딱 좋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내려갈 수는 없었다. 아니,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이대로 집으로 가자니 더 방법이 없을 것 같고 경찰서로 출두하자니 아까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림이 펼쳐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형사의 집이나 알아볼 요량으로 701호라고 적혀 있는 문 앞으로 다가가 가만히 귀를 갖다 댔다. 차가운 금속이 귀에 닿자 한기가 척추 안까지 타고 들어왔다. 의사가 청진기를 갖다 대는 것처럼 귀를 최대한 눌러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반대편 문으로 걸어가 똑같이 귀를 갖다 댔다.
‘@#$@!!’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려 더욱 귀를 밀착시켰다. 얼마간 귀를 대고 있었지만 말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기가 형사의 집이라고 확신했다. 아까 들은 말소리가 남자의 목소리기도 했고, 문고리에서 남자의 냄새가 났다. 수컷 본연이 가지고 있는 퀴퀴한 체취가 문 너머로 느껴졌다. 자신의 영역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냄새가 벨을 누르기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나는 몇 초간 망설이다 힘겹게 702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초인종은 ‘찰칵’ 소리만 날 뿐 손님이 왔다는 신호는 전혀 보내지 않았다. 의아한 생각에 연달아 벨을 눌렀지만 ‘찰칵, 찰칵’하는 힘없이 눌리는 버튼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벨을 누르기 전 긴장했던 것에 비하면 맥 빠지는 결과였다. 그냥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애써 여기까지 올라온 용기가 아쉬워서 문이라도 두드려야 하는 참이었다.
“누구세요.”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경계심이라기보다는 귀찮아 죽겠다는 식의 감정이었다. 나는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하다 ‘1503호인데요’라고 대답했다.
“누구요?”
남자가 이번에는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반 존대의 질문이었지만 거의 욕이나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남자의 목소리에 담긴 짜증에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대답했다.
“여기 옆에 동에 1503호 주민인데요, 뭐 좀 여쭤보려고 찾아왔어요.”
말을 뱉어 놓고 나는 아차 싶었다. 생각보다 큰 목소리가 아파트 공동을 돌며 메아리치는 듯했다. 남자는 나의 대답에 잠시간 이렇다 저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몇 초의 시간이 나를 무겁게 누르는 기분이었다.
“물어볼게 뭔데요?”
남자가 말했다. 그 전의 침묵이 무색할 만큼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뜻밖의 반응에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아 그.. 그게.. 제가 어떤 일을 당했는데요."
나는 말을 멈추고 아까 상상했던 대사를 곱씹었다.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보니 앞에 사람이 죽어 있었다, 나는 범인이 아니다, 하지만 혹시 몰라서 범행도구는 챙겨 왔다. 어느 하나도 쉽사리 꺼낼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남자는 내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릴 생각인 듯 어떠한 재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침묵이 가장 큰 압박이 되는 법이다. 무거운 바위가 머리를 짓누르려고 점차 다가오는 것처럼, 나는 1초라도 빨리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제가 어떤 범죄랑 연루가 된 것 같아서요.”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그게 지금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어 제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질 않거든요? 그런데 제가 한 게 아니고, 제가 그 현장에 있었을 뿐인데…”
남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제가 일단 챙겨 오긴 했는데..”
나는 아까부터 주머니에서 허벅지를 괴롭히고 있던 칼을 꺼내려고 고개를 숙였다. 왼손으로 주머니를 벌리고 오른손으로 칼날 부분을 조심스럽게 잡아 꺼내려는 순간,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남자의 주먹이 보였다. 나는 구부정하게 숙인 상태로 양손이 오른쪽 주머니를 잡은 채 고개를 들어 날아오는 주먹을 보아야만 했다. 남자의 주먹은 이상하게도 커다랬다. 어렸을 때 동물원에서 본 늙은 수컷 곰의 발처럼 거대했다.
‘카키색’
마지막으로 본 것은 카키색이었다. 카키색 점퍼가 둘둘 말린 채 남자의 손에 감겨 있었다. 거대한 몽둥이 같은 카키색 점퍼는 정확히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고 번쩍 하고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인 것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