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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by starka

중학교 동창들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정말이지 우연의 계기에 의해서였다. 작업에 필요한 서적들을 알아보기 위해 서점에 들른 차였다. 원래는 오후 세시 정도에 서점에 들렀다가 커피를 사서 집에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급하게 일감이 들어와 밤을 새워버리는 바람에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집에서 나왔다. 20대 초반이야 밤을 새워도 끄떡없었지만 스물아홉이나 된 지금은 한 번 밤을 새우면 하루 종일 머리가 멍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급하게 들어온 일감을 고사하기에는 일정한 수입이 없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업계에서 근 10년을 버텼다고 간간히 맡겨주는 외주가 벌이가 없는 나에게는 꿀 같은 존재였다.


나는 중고서점에 들러 미리 찾아놨던 책을 골랐다. 전문서적인 데다가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중고서적에 잘 나오지 않는 책인데, 운이 좋게도 입고된 것을 알아서 부랴부랴 서점에 온 것이다. 생각보다 상태도 깨끗해 마음에 쏙 들었다. 책 값을 지불하고 나니 잔고가 5,700원이 남았다. 오늘 넘긴 결과물이 의뢰인 마음에 든다면 일주일 뒤에 조금은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카페로 발길을 돌렸다.


“어? 너 덕구 아니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아직도 나를 덕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나를 부르는 사람을 찾았다. 묘한 기분은 불쾌함으로 바뀌었다.


“맞네! 야 진짜 오랜만이다. 이게 몇 년만이야?”


김민수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둘렀다.


“야 이리 와 봐! 덕구 맞아!”


“어 진짜?”


“야 그러네. 하나도 안 변했다 야.”


김민수가 부르자 유현석과 이재민이 다가오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불편해진 나는 어깨에 올린 김민수의 팔을 슬그머니 밀치며 말했다.


“어, 안녕.”


내 어색한 인사를 보고 김민수는 잠시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김민수의 눈을 몇 초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쳐다봤다. 김민수는 씩 웃더니 다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 요즘 뭐하고 사냐?”


김민수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의례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지만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뭐 그냥… 똑같지 뭐.”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뉘앙스로 알아듣기를 바라며 답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김민수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냥이 뭐야 그냥이. 뭐, 어디 회사 다녀?”


“어.. 그냥 프리랜서야.”


나는 그냥 조그만 회사를 다닌다고 말할까 하다 왠지 거짓말을 하기는 싫어 솔직하게 말했다.


“와 진짜? 이야 덕구 출세했네. 요즘 돈 잘 버는 프리랜서가 짱이잖아!”


실제로 돈을 잘 벌기는커녕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일감도 없었기 때문에 김민수의 지레짐작은 전혀 맞지 않았지만 나는 굳이 바로잡고 싶지 않아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슨 일 하는 프리랜서인데?”


옆에서 듣던 이재민이 불쑥 끼어들었다.


“어.. 뭐 일러스트 같은 거.”

“와 중학생 때도 그렇게 그림 그려제끼더니 결국 그쪽으로 풀렸구먼? 이래서 조기교육이 중요하다니까.”


김민수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김민수와 이재민을 보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때도 그랬다. 김민수가 앞장서서 애들을 괴롭혔고, 이재민은 옆에서 거들었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듯이 김민수 보다도 이재민의 평판이 아이들 사이에서 더 좋지 못했다.


“야 얼른 가자 춥다.”


뒤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던 유현석이 귀찮은 듯 말했다. 유현석 역시 똑같았다. 항상 김민수와 이재민이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으면 유현석은 가만히 뒤에서 지켜보며 웃었다. 그러다 싫증이 나면 김민수와 이재민을 보채 매점을 가거나 담배를 피우러 가자고 종용했다.


“알았어 알았어. 보채기는. 야 덕구야 전화번호 하나 찍어줘 봐.”


김민수는 내 연락처를 뺏듯이 자기 휴대폰에 입력하고는 연락할게-라고 말하며 갈길을 갔다. 밤샘 때문에 멍하던 정신이 극도로 예민해져 머리를 쿡쿡 쑤셨다. 중학교 때와 비교해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김민수 패거리들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가 조심스러웠고 껄끄러웠으며 피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 역시 중학교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실감하고는 들고 있던 서적이 괜히 더 무겁게 느껴졌다.




“연락할게-라는 김민수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김민수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중학교 반 단체 대화방이 있는데 초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썩 내키지 않아 고맙지만 괜찮다고 답장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김민수는 이미 단체 대화방에 나를 초대한 상태였다.


‘얘들아 덕구다 인사해라-‘


‘오 진짜 덕구야?’


‘와 오랜만!’


김민수의 말에 대화방에 있는 아이들이 하나둘 말을 건넸다. ‘삼정중 3학년 2반 모임’이라고 적힌 대화방에는 얼굴이 기억나는 애들 몇 명, 기억이 가물가물한 애들 몇 명을 합해 12명 정도가 있었다. 다들 반가운 투로 메시지를 보내지만 휴대폰 뒤의 얼굴은 어떤 표정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나는 어떤 이미지 일까? 김민수 패거리에게 1년 내내 괴롭힘 당하는 ‘덕구’일까? 아니면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 그런 애가 있었지!’ 정도의 존재일까. 나는 순간 속이 거북해졌다.


‘안녕-‘


나는 속과는 다르게 가벼운 인사를 대화방에 보냈다. 대화방에 있는 반은 내게 답장을 하고 나머지 반은 읽지 않았다. 누가 읽지 않았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단체 대화방을 읽고 일일이 답장을 하는 것 자체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귀찮은 짓이다. 나는 곧 흥미를 잃고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생각과 함께 휴대폰을 내팽개쳤다. 새로 들어오 작업 의뢰가 없는지 메일을 뒤지고 있는데 띠링하는 휴대폰 알림음이 두어 번 울렸다. 나는 단체 대화방 알림을 해제하지 않음을 깨닫고는 알림음 때문에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팽개쳤던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순덕이 안녕? 오랜만! 잘 지내?’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명치끝이 아렸다. 메시지를 보낸 이에는 ‘선화’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최선화였다. 중학교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는 생각에 사춘기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명치부터 시작된 설렘이 귀를 타고 뜨겁게 올랐다. 나는 휴대폰을 쥐고 가만히 앉아 최선화를 생각했다. 중학생이었지만 묘하게 어른의 냄새가 나던 소녀. 긴 생머리에 하얗고 보드라워 보이는 피부, 나이답지 않은 굴곡진 몸매, 살짝 웃을 때 양 옆으로 앙증맞게 들어가는 보조개는 내 마음뿐만 아니라 뭇 남자애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르긴 몰라도 남자 선생님들 또한 최선화에게 여인을 바라보는 감정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최선화는 그 당시에도 성숙한 여인이었다.


최선화와 나, 김민수는 중학교 2학년부터 3학년까지 2년간 같은 반이었다. 선화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예뻤다. 선화가 6학년일 때 당시 중학생이던 형들이 차례차례 찾아와 빼빼로며 초콜릿이며 갖다 주며 자기와 사귀어 달라고 애걸복걸한 사실은 유명했다. 그런 선화가 중학생이 되고 2차 성징이 시작되면서 여인의 향기까지 풍기니 주변 남자들이 안달 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와 김민수 역시 그들과 같은 입장이었다. 김민수는 초등학교를 선화와 같이 나왔지만 내가 선화를 본 것은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학원에서 남자애들이 ‘최선화가 말이야’ 어쩌고 하며 열띤 토론을 하는 것은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실물로 보는 것은 입학식 날이 처음이었다.


입학식 날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는데 공교롭게도 나와 선화는 바로 옆줄에 서게 됐다. 나는 8반이고 선화는 9반이었는데, 나는 우리 반에 끝줄이었고 선화는 9반의 첫 줄이었다. 2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본 선화는 너무 예뻤다.


짙은 남색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 스커트와 똑같은 남색 조끼와 타이를 입은 선화의 얼굴은 입고 있는 블라우스보다 더 희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선화의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릴 때마다 향긋한 샴푸 냄새가 내게로 날아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선화가 뒤에 친구와 이야기를 하려고 고개를 돌릴 때면 나는 혹여 시선을 들킬까 고개를 떨궈야만 했다. 하지만 바닥을 보고 있어도 선화의 얼굴이 감춰지는 것은 아니었다. 선화의 얼굴은 운동장 바닥에도 나타났다가 내 눈동자에도 나타났다가 사르르 부서져 내 콧속으로 들어와서는 머릿속을 간지럽혔다. 참다못한 나는 고개를 들어 선화를 바라보려는 순간 선화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선화는 그런 나를 보고는 새하얀 이가 드러나게 싱긋 웃어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 나는 비로소 첫사랑이라는 것이 찾아왔음을 짐작했다.



‘어 나는 잘 지내지’라는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려던 나는 다시 울린 알람에 얼굴을 찡그렸다. 김민수가 나보다 먼저 선화의 말에 답장을 보냈던 것이다.


‘어 덕구는 여전하더라, 내가 저번에 봤다. 그건 그렇고 우리 반창회 한 번 해야지?’


나는 김민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불쾌감을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최선화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이 ‘그래 언제 한 번 모이자’라고 대답했다.


‘언제 한 번은 무슨, 한국 사람들은 그게 문제야 항상. 언제가 언젠데? 말 나온 김에 이번 주 주말 어때?’


김민수가 못을 박았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김민수의 뜻에 동조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한 번 보자! 난 이번 주말 괜찮아!’


‘나도 괜찮아!’


‘나는 결혼식이 있어서 토요일은 조금 늦을 것 같은데 괜찮긴 해.’


다들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보고 싶은 듯했다. 정확히 말하면 예전 풋풋했던 시절의 자신들의 모습을 회상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김민수는 다시 한번 최선화를 재촉했고 최선화는 짧게 ‘알겠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약속한 주말이 되었다.



나는 무슨 옷을 입고 갈까 고민하다가 옷장을 열어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최선화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것만이 옷을 차려입고자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김민수 패거리와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에게 권순덕이라는 사람이 사실 너희와 같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이유가 더 컸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쇼핑이라고는 동떨어진 생활을 한 나로서는 찾아 입는다는 것이 고작 가장 새것처럼 보이는 청바지와 하늘색 스트라이프 셔츠, 그리고 목 부분에 기름때가 낀 오래된 검정 코트가 전부였다. 당장 간단한 옷을 사 입고 약속 장소에 바로 갈까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아직 저번 작업물에 대한 돈이 입금되지 않은 것을 확인한 나는 목 부분의 기름때가 검은색이니 잘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자위하며 입는 수 밖에는 답이 없었다.


코트를 입은 나는 장롱에 달린 손바닥만 한 거울로 이리저리 돌며 목 뒷부분을 보려 애썼지만 목이 90도 이상 돌아가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찝찝한 나머지 옷장 구석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던 목도리를 꺼내 코트 위를 한 바퀴 빙 둘렀다. 퀴퀴한 묵은 먼지 냄새가 났지만 한결 마음이 나았다.


밖을 나오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목도리를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발걸음을 바삐 옮겨 홍대로 가는 버스를 잡아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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