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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by starka

나는 ‘음…’하는 침음 성과 함께 눈을 떴다. 눈 앞에 처음으로 보인 것은 작은 화장대였다. 화장대 앞에는 작은 액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묘한 기시감에 혹시 아까 최선화의 방에서 정신을 잃은 것인지 생각했지만 핑크색이 아닌 하얀색 벽지로 둘러싸인 것을 보아 다른 방인 것 같았다.


일단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뒤에서 당기는 힘에 의해 반쯤 일어나다가 주저앉았다. 손목이 시큰거려 봤더니 실크인 듯한 끈으로 양손이 묶여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앉아 있는 곳은 나무 의자였는데, 양손이 의자 엉덩이 밑으로 묶여 있었다. 힘을 주어 손을 빼보려고 했지만 의자만 덜컹거릴 뿐 손을 묶은 실크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몇 번을 덜컹거리는 끝에 나는 손을 푸는 것을 포기했다. 아무리 힘을 줘봐도 실크는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손목을 부드럽게 압박하며 옥죄는 힘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앉아서 가만히 한숨을 쉬는데 머리가 또 지끈지끈 아팠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조용히 이 방에 가둔 사람을 기다렸다.


몇 분쯤 지났을까. 삑삑 거리는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같았다. 나를 이 방에 범인인 것 같은 사람이 ‘큼, 큼’하는 헛기침을 하며 방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는 방 바로 앞까지 이어지다가 바로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범인은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며 무엇인가를 꺼냈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어떤 서랍장 같은 것을 여는 것 같았다. 나는 칼이나, 망치, 노끈 같은 것을 정비해두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도 무섭기보다는 대체 왜 나를 여기에 이렇게 묶어둔 것인지 궁금했다. 무엇보다도 아까부터 손목이 너무 아파 도망치지 않을 테니 조금만 느슨하게 풀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범인은 나와 당장에 대면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으뜨따!’ 하는 신음과 함께 기지개를 켜는 것 같더니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하는 수 없이 가만히 기다려야 했다. 몇 번 더 손목에 힘을 주어 봤으나 여전히 실크 매듭은 풀리지 않았다. 억지로 힘을 짜내었더니 맥이 탁 풀려서 이대로 한숨 자고 일어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의자에 앉아 있는 채로 두 손이 아래를 향해 묶여있다 보니 도통 자세를 잡기가 어려웠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니 정신을 잃었을 때 하도 숙이고 있던 탓인지 목 근육이 뻐근했고, 뒤로 젖히자니 머리를 둘 곳이 없어 숨쉬기가 어려웠다. 요리조리 자세를 바꾸는 동안 나는 소변이 마려워졌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좀 더 소란을 피우기로 했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소변을 처리하기에는 싫었다.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이게 죽기 전 마지막 소변이라면 맘이라도 편하게 해결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컸다. 죽기 전 마지막의 소변이 속옷과 바지를 다 갖춰 입은 채 앉아서 억지로 흘려버리는 경우라면 얼마나 개운하지 않을까. 잔뇨가 남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축축하게 흘러내린 액체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찝찝함을 배가시킬 것이다.


남자는 내가 두세 번 의자를 쿵쾅거리며 움직이자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나타났다.


“깼냐?”


나는 남자의 목소리를 어디서 들어봤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얼굴을 올려 쳐다보려고 했지만 순간 눈이 흐릿해져 눈을 크게 깜빡여야 했다.


“누가 시켰냐? 요즘 세상에도 연장을 들고 다니는 새끼들이 있네. 형철이냐?”


남자가 살짝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이번에도 나는 남자의 목소리가 익숙했지만 눈이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아 얼굴을 확인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대답 안 한다 이거지? 나 참, 쉬는 날까지 사람 찾아와서 귀찮게 말이야.”


남자의 목소리를 화가 나 보였다. 나는 흐린 눈을 어떻게든 초점을 맞춰보려고 눈꺼풀을 열고 닫았지만 선명해지지 않았다. 남자는 한숨을 푹 쉬더니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카키색이었다.


“형사님..?”


남자는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뜻밖인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님? 웬일로 니들이 님까지 붙이냐?”


남자가 물었다. 목소리가 까칠한 것이 탐탁지 않은 것 같았다. 남자는 눈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나를 훑었다. 틀린 그림 찾기를 하듯 하나라도 잘못된 무엇인가를 찾아내겠다는 어떤 집념 같은 것이 느껴지는 눈이었다.


“저.. 저한테 왜 그러시죠?”


남자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허, 왜 그러시냐고? 그러는 너는 왜 그러냐 나한테?”


내가 아무 대답도 없이 쳐다보자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야말로 남의 집 앞에서 칼 들고 뭐 하는 건데?”


“네? 아니 그건…”


남자는 내 말은 들은 체도 안한채 말을 이어갔다.


“씨바 꺼, 남의 집 앞에서 피 묻은 옷에 피 묻은 칼로 뭐 하자는 거냐고. 벨 눌러서 사람 나오면 찌를라고? 너 아까 놀이터에 있던 새끼 맞지?”


남자는 말하다 감정이 격해지는지 톤이 높아졌다.


“어디서 왔냐? 아무리 깡패 새끼라도 그렇지 하다 하다 이런 애새끼를 칼을 들려서 보내네. 막장 새끼들이.”


남자가 내 멱살을 잡고 앞 뒤로 흔들었다.


“너 인마, 대답 안 해? 나는 새끼야, 순둥 순둥 한 새 아니여. 알어? 너 같은 새끼들 전문으로 잡아 족치는 놈이라고 내가. 응?”


고개가 앞으로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위잉-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머릿속 뇌 한가운데, 아니 보다 깊은 곳에서 오는 울림 같은 소리였다. 이런 울림이 계속된다면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소변이 너무 마려웠다.


“저기 형사님, 오줌이 너무 마려운데 화장실 좀 갔다 오면 안 될까요?”


“뭐?”


“아까부터 참고 있었는데 이대로라면 싸버릴 것 같아요.”


형사는 잡고 흔들던 내 멱살을 슬그머니 놓았다. 내 표정을 샅샅이 살핀 뒤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묶었던 실크를 풀기 시작했다.


“허튼 짓하면 바로 대가리 깨버린다.”


형사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나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손목을 조이고 있던 실크가 풀리자 막혔던 피가 손끝으로 빠르게 이동해 뜨겁게 덥혔다. 참았던 소변도 덩달아 요도를 타고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려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화장실 좀!”


나는 빠른 걸음으로 방을 뛰쳐나갔다. 뒤에서 형사가 ‘거기 말고 오른쪽!’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곧바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화장실로 들어갔다. 바지 단추를 풀자마자 참았던 소변이 쏟아져 나왔다. 콸콸 쏟아져 나오는 굵은 줄기를 보니 이러다 댐에 난 작은 구멍이 댐을 무너뜨린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십 초가 지나도 줄기는 얇아지지 않았다. 소변이 빠져나가면서 나는 나른함을 느꼈다. 좋지 않은 것들이 한데 모여서 한 번에 빠져나가 내 몸이 순간적으로 텅 빈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살짝 어지럼 마저 느낀 나는 오른손으로 벽을 짚은 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고는 변기 레버를 내렸다. ‘콰아아’ 소리를 내며 물줄기가 내려갔다.


“시원하냐?”


형사가 어이없는 눈으로 화장실을 나오는 나를 쳐다봤다.


“네. 아까부터 너무 참아서…”


나는 조금 정신이 말짱해져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볼일 다 봤으면 하던 이야기도 마저 해야지?”


“네. 다시 앉을까요?”


내가 의자를 가리키며 묻자 형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거실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거기 말고 저기.”


나는 형사에게 기억나는 대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간간히 머리가 아파 이마를 문질러가며 말을 했더니 형사가 부엌에서 물을 떠다 줬다. 내가 감사하다고 말하자 형사는 냉장고에서 가져온 맥주를 따며 어서 이야기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래서, 갑자기 일어나 보니 그 여자의 방이었다고?”

“네. 처음에는 그 애의 방인지도 몰랐어요.”


“그날 처음 가봤다는 말이야?”


“네… 음 아니요. 그 날 처음 간 것은 아니고… 안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에요.”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그게…”


“제가 몇 번 집 앞에 찾아간 적이 있거든요.”


형사는 잠시 늘어졌던 의심의 눈초리를 매섭게 조였다.


“그러니까, 피해자 집에 몇 번 방문을 했지만 집안까지 들어간 것은 그날이 처음이다라는 말이지?”


형사는 최선화를 피해자라고 불렀다. 피해자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최선화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선화가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저기, 오늘이 며칠이죠?”


“뭐?”


“날짜를 모르겠어요. 머리도 아프고…”


“12월 20일.”


“아…”


나는 잠시 기억을 되새겼다. 최선화의 집 앞에 간 것은 분명 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자정 즈음이었다. 휴대폰이 먹통만 아니라면 당장 대화목록을 불러와 확인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18일 밤이 확실했다. 분명 그날까지 최선화는 단체방은 물론 나와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다니 지금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 전날, 그러니까 18일 자정까지 저랑 연락을 하고 있었어요. 아니 저뿐만 아니라 단체방에서도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단체방? 피해자랑은 무슨 사인데? 친구야?”


형사가 내 말을 자르고 물었다.


“중학교 동창이에요. 지난주에는 동창회도 나왔어요.”


형사는 잠시 손을 들어 내 말을 멈추더니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18일, 중학교 동창, 집 앞에 몇 번’ 같은 내용을 입으로 되뇌며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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