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가 약속 장소를 홍대로 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자 다들 아우성이었다. ‘홍대는 너무 시끄럽지 않냐’는 의견에서부터 ‘우리 나이에 홍대가 가당키나 하냐’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나 역시 홍대는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홍대에서 술을 마시기에는 주변 젊음이 버거웠다. 더군다나 20대 후반 들어 사람이 많은 곳보다는 적은 곳, 유명한 곳보다는 내 마음에 드는 곳에서 더욱 만족감을 느꼈다. 아마도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김민수 역시 아이들의 반발심을 느꼈는지 다급히 해명을 시작했다.
‘아 당연히 나도 홍대는 싫지! 근데 여기는 진짜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라니까? 나도 얼마 전에 알았어.’
김민수는 자신의 지인도 어쩌다 들려서 알게 된 가게인데 한 번 간 뒤로 분위기에 빠져 단골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 가게 주인이 돈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귀찮은 것을 싫어해서 누군가에게 가게를 추천하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단골손님들에게 신신당부하는 바람에 가게 위치를 알아내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김민수의 설명에 몇몇 아이들은 호기심에 동했는지 뭐하는 술집이냐고 물었다. 김민수는 신이 나서 가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야. 근데 분위기가 진짜 장난 아니라니까? 거기다 원래 소주도 안 파는데 내가 하도 부탁하니까 특별히 넣어준댔어.’
김민수의 말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김민수의 말에는 사람들이 혹할만한 포인트들이 전부 들어 있었다. 남들은 잘 모르는 어떤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바라는 스토리와 힘들게 알아냈다는 정성, 그리고 원래는 안되는데 내가 특별히 부탁해서 됐다는 한정판 적인 요소까지. 게다가 마지막에 던진 김민수의 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중학교 때 추억하면서 만나는 건데 젊은 감성으로 홍대가 어때서! 레트로로 가는 거야 레트로로!’
김민수의 그 한마디가 채팅창을 열광의 도가니로 변모시켰다. 사이비교주가 따로 없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사람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끌고 가는 부분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다른 방향에서 홍대로 모이기로 약속했다.
삐-익 하는 정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버스를 타고 오는 새 눈이 꽤 쌓였다. 뽀드득 거리는 눈의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엄마 손을 잡고 내린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와 눈이 다하고 좋아했다. 바닥에 얕게 쌓인 눈을 손으로 뭉치려 하자 아이의 엄마가 지지야!라고 아이의 허리를 안고는 횡단보도 쪽으로 끌고 갔다. 나는 쪼그려 앉아 아이가 못다 한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눈을 모았다. 차갑지만 보드라운 눈의 감촉에 손이 시리지는 않았다. 슥슥 바닥을 쓸어 한주먹 만한 눈을 모아 단단히 뭉쳤다. 그 와중에 합쳐지지 못한 눈이 손의 온기에 녹아 손가락 사이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어느새 딱딱해진 눈 뭉치를 이리저리 굴려보다 정류장 근처 쓰레기통 쪽으로 휙 던졌다. 약속에 늦었는지 빠르게 걸음을 걷던 여자가 내가 던진 눈덩이에 맞을 뻔했다. 다행히 눈덩이가 여자의 머리 위쪽으로 날아갔기 때문에 여자는 자신이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던진 눈덩이에 맞을 뻔한 줄도 모르고 하이힐을 신은 발을 열심히 놀리기 바빴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눈싸움이라니, 김민수의 말 때문인지 왠지 어렸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재수 없지만 김민수가 말은 확실히 잘한다는 생각을 하며 나 역시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토요일 저녁 홍대는 사람이 많기는 했지만 예전만 못했다. 20대 초까지만 해도 어쩌다 한 번 주말에 홍대를 들릴 때면 행여 어깨라도 부딪힐까 조심하며 다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멀리서 한 무리가 보였다. 혹시 하는 생각에 걸음을 늦추고 자세히 보니 반창회 멤버들이 맞았다. 나는 기다렸다가 늦게 합류할까 고민하다 김민수가 가게 위치를 알려주지 않은 사실을 상기하고는 하는 수 없이 무리 쪽으로 발을 움직였다.
“오오, 덕구 왔어?”
나를 제일 먼저 반긴 것은 안타깝지만 김민수였다. 뭐가 그리 좋은지 한껏 올라간 얇은 입술이 오늘따라 더욱 꼴 보기 싫었다.
“오 덕구 오랜만이다!”
“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
“에이 지금이 훨 나은데 무슨 소리야.”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던졌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면면을 살폈다. 아이들이라고 말하기에는 이제는 한껏 사회인이 되었다. 남자애들은 자잘한 점처럼 모인 수염자국이, 여자애들은 움직일 때마다 풍기는 진한 화장품 냄새가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자자, 이러지 말고 추운데 들어가자고.”
김민수가 나에게 쏠린 관심을 자신한테로 끌어들이며 말했다. 김민수를 따라 우리는 골목 어귀로 들어갔다. 바를 찾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복잡했는데, 홍대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골목길을 누벼야 했다. 몇 번의 모퉁이를 돌자 [Bar souvenir]라는 간판이 보였다. 간판은 푸른빛의 네온 레터링이었는데 이따금 지직 거리며 깜빡이는 것이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오 진짜 분위기 있어 보이는데?”
누군가 감탄하듯 말하자 김민수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야, 내가 말했잖냐. 진짜 여기 오는 사람은 단골 말고는 없다니까?”
“근데 그럼 장사가 되나? 건물주인가?”
“글쎄 그건 모르지. 뭐 어쨌든 우린 좋으니까 된 거잖아?”
김민수는 가게 걱정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며 들어가서 술이나 마시자고 등을 떠밀었다.
“와 이거 문 손잡이 봐봐.”
제일 앞에 있던 유재환이 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야? 사자야?”
문에는 성인 얼굴 크기만 한 사자가 동그란 문 손잡이를 물고 있는 모습이 입체적으로 박혀있었다.
“디테일 좀 봐 장난 아니네.”
누군가 사자의 디테일을 말하자 모두가 수긍하는 듯 한 마디씩 거들었다.
“자자, 얼른 들어가자고.”
김민수는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우리를 재촉했다. 김민수의 재촉을 못 이긴 유재환이 사자 입에 있는 문고리를 밀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벽에는 영화에서나 보던 등불이 유리 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이거 진짜 불이야?”
“진짜 같은데?”
불빛이 일렁이며 계단 옆에 우리의 그림자를 그렸다. 너울거리는 불의 그림자와 함께 어우러진 우리의 그림자를 보니 마치 마법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앞장서서 내려간 김민수는 가게 안으로 휙 들어갔다 나오더니 왜 이렇게 굼뜨냐고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림자를 구경하는 것도 구경하는 것인데 계단 높이가 꽤나 높아서 구두를 신은 여자애들이 천천히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여자애들은 김민수의 핀잔에 계단이 높아서 그렇다고 받아치면서도 가게가 주는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친구들 때문인지 그리 짜증스러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가니 산뜻한 바람이 얼굴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아마도 환기 장치에서 나오는 공기 순환의 일종인 것 같았다. 바람에 섞인 아로마 향이 기분을 들뜨게 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묵직한 저음의 주인은 바텐더였다. 무테안경을 쓴 바텐더는 옆의 머리를 정갈하게 다듬고 윗머리는 포마드로 빗어 넘긴 세련된 30대 중반의 신사였다. 바텐더의 손짓을 따라 우리는 테이블에 앉았다. 신기하게도 바텐더가 서 있는 구역도 앉을 수 있게 의자가 있었다. 기다란 바 테이블에 한 명 한 명 마주 보는 형태로 앉고 나니 단체 미팅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야 이거 무슨 미팅하는 것 같은데?”
“그러게. 고등학교 동아리 대면식 같기도 하고 재밌네 호호.”
오랜만에 만나는 데다가 신기한 가게에 왔다는 생각이 모두를 설레게 한 것 같았다. 우리는 총 9명인데 그 때문에 한 명은 마주 앉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들어온 순서대로 앉다 보니 그 자리에는 서민주가 앉게 되었는데 그녀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왜 나만 혼자냐고 짜증을 냈다.
“덕구야 자리 좀 바꿔줘!”
결국 서민주는 나에게 자리를 바꿔달라고 부탁 아닌 통보를 했다. 누가 봐도 떼를 쓰는 모양새였지만 상대가 나인지라 별로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서민주가 하는 짓을 보며 기가 찼지만 군소리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어차피 내 맞은편에 앉은 여자애도 나를 불편해하는 눈치고 사실 친하지도 않던 애라 불편하던 차였다. 다만 중학교 때와 달라진 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서민주를 보며 자꾸만 변하지 않는 것들이 눈에 밟히는 것이 못내 불안했다.
“숙성시킨 맥주와 레몬을 썰어 넣은 소주, 그리고 간단한 안주 나왔습니다.”
바텐더가 커다란 쟁반에서 잔들과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간단한 안주라고 뭉뚱그려 말하기에는 과해 보이는 음식들이 차례차례 놓였다.
“전혀 간단해 보이지 않는데요?”
누군가 말한 의견에 모두가 동의하듯 바텐더를 쳐다보았다. 바텐더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김민수를 가리키며 특별히 요청했기 때문에 메뉴에 없지만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민수는 아이들이 오오 하는 소리와 함께 쳐다보자 잔뜩 어깨가 올라갔다. 하지만 곧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에이 뭐 사장님이 하셨지 내가 했나. 일단 목 좀 축이고 썰부터 좀 풀자 얘들아.”
김민수가 돌아다니며 한 잔씩 잔을 채워주었다. 여자애들 중 몇몇은 맥주를 마신다고 사양했지만 김민수는 첫 잔은 다 같이 먹는 거라며 기어코 한 잔씩 따라주었다.
“자, 얘들아 오랜만이다. 못 온 사람들도 있지만 어차피 우리가 오늘만 모일 것도 아니고 한 번 만든 자리 주기적으로 모이도록 해보자!”
“야 무슨 부장님처럼 이야기하냐?”
김민수의 건배사에 이재민이 딴지를 걸었다.
“야 인마, 너 같은 자영업자가 뭘 알겠냐? 회사원의 설움을. 잔말 말고 잔이나 들어.”
김민수의 말에 다들 깔깔 웃으며 잔을 부딪혔다. 나는 김민수의 입담을 구경하며 손에 쥔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딱히 건배할 사람도 없거니와 저들도 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 혼자 적당히 마시다 금방 일어날 요량이었다. 어차피 그 편이 나한테도 저들한테도 편하다.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드시다니.”
나는 어느새 내 앞에 서 있는 바텐더를 보고 놀래서 소주의 쓴 맛을 느끼지도 못한 채 삼켜버렸다.
“아… 괜찮습니다 저는. 혼자가 익숙해서요.”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자, 한 잔 받으시지요.”
얼떨결에 바텐더에게 잔을 내밀게 된 나는 잔을 채우는 투명한 액체를 바라보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하지만 바텐더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내 잔이 흘러넘치기 직전까지 술을 채우고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병 입구를 거두어갔다.
“이거… 소주가 아닌 것 같은데요?”
나는 잔에서 흘러나오는 강한 알코올 냄새를 느끼며 바텐더에게 물었다. 바텐더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술을 드셨으면 벌을 받으셔야 죠. 보드카입니다. 하지만 향에 비해 생각보다 독하지 않으니 괜찮으실 겁니다.”
“아… 예.”
나는 어서 들이키라는 듯 손짓하는 바텐더를 보며 마지못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잘 섞인 칵테일이 아니라 바텐더가 직접 따라주는 술이라니 묘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싫지는 않았다. 단지 자꾸만 코 끝을 찌르는 알코올 향이 속을 괴롭게 했다. 얼른 이 잔을 비워버려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소주잔에 담긴 보드카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음?”
엄청나게 쓴 맛을 기대한 나는 미리 찌푸리려고 하던 얼굴을 반만 찡그리고는 이상한 추임새를 뱉었다.
“어때요? 생각보다 괜찮죠?”
“아… 예. 뭔가 굉장히 깔끔하네요?”
“하하, 그 녀석이 냄새는 고약해도 술맛은 괜찮습니다. 어때요 한 잔 더 드릴까요?”
“아, 네. 부탁합니다.”
바텐더가 싱긋 웃으며 내 잔에 보드카를 따랐다. 바텐더의 손에 들린 보틀은 반대편이 그대로 비칠 만큼 투명했다. 그 위에 붙은 라벨은 검은색에 어떤 짐승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짐승의 머리 부분이 바텐더의 손에 가려져 무슨 짐승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사자나, 호랑이 같은 그런 부류일 것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이번에는 맥주를 조금 얹어드리죠. 이렇게 하면 냄새도 좋아질 겁니다.”
바텐더는 보드카를 치우고 옆의 맥주병을 들어 내 잔에 살짝 흘려 넣었다. 맥주병도 마찬가지로 흑갈색 보틀에 기괴한 모양의 짐승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잔에서 풍기는 냄새 때문에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어? 향이 좋아졌어요!”
바텐더는 신기하는 내 표정을 보고는 씩 웃을 뿐이었다. 나는 술잔에 코 끝을 대어 한 번 더 향을 맡았다. 오이향과 오렌지 향이 뒤섞인 듯한 독특한 향이었다. 향이 좋아서 한참을 맡다가 입가로 가져가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식도가 뜨겁게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술이 뱃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까 맡았던 향이 코끝으로 다시 넘어오며 기분 좋은 끝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술이 참 맛있다는 생각이 들어 한 잔을 더 달라고 바텐더에게 손을 내미는데 술잔이 잘 잡히지 않았다. 알싸한 취기가 배꼽부터 머리까지 타고 올라왔다.
“맛있는데 술이 좀 센 것 같은데요?”
머리를 짚으며 바텐더에게 말했다. 바텐더는 껄껄 웃더니 원래 맛있는 술은 대가가 따르는 법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손으로 한창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애들을 가리키며 취기도 올랐으니 합류하라며 비어있는 자리 쪽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내가 재밌게 놀고 있는 애들을 보며 머뭇거리자 바텐더는 어서 가세요 재밌겠네요 라며 재촉했다. 그 말을 끝으로 바텐더는 창고 쪽으로 발을 옮겼다. 나는 바텐더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무슨 바람이 들어서인지 바텐더가 가리킨 의자 쪽으로 몸을 옮겼다.
내가 바텐더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동안 다들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바 안을 가득 메워 잔잔하게 들리던 음악소리가 거의 안 들릴 정도였다. 분명 아까 바텐더와 이야기할 때까지만 해도 시끄럽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내 옆에 앉은 여자애는 내가 앉은 줄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나도 한 잔 줄래?”
나는 뒤돌아 있는 여자애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잔을 내밀었다. 여자애는 휙 돌더니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보다가 깔깔 웃더니 그래 하고는 술잔이 넘치도록 술을 부어주었다. 그리고는 뒤돌아서 옆의 남자애와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기분이 나빠져 술을 단번에 마셔버리고는 다시 그 여자애의 어깨를 두드렸다. 여자애가 짜증스럽게 뒤를 돌더니 뭐냐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너 이름이 뭐더라?”
“뭐?”
“이름이 뭐냐고 기억이 안 나서 그래.”
어디서 난 용기인지 나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여자애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렇듯 강압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29년 인생 처음으로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남자도 아니고 여자에게. 나는 아마 술 때문이겠지 하며 여자애를 바라봤다. 여자애는 대답을 종용하는 내 눈빛을 못 이긴 듯 고개를 살짝 돌리며 김소연이라고 이름을 말했다. 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진작 자신감 있게 사람을 대할걸 이라는 생각을 하며 김소연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는 반가우니 한 잔 하자고 말했다.
김소연은 약간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싫지 않은지 잔을 부딪혀 건배를 했다. 내가 잔을 거꾸로 뒤집어 한번에 술을 털어 넣자 김소연도 따라서 술을 들이켰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꽤 귀엽게 생겼다. 김소연이라는 이름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홍조가 발그레 핀 얼굴과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눈코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김소연에게 자리를 옮겨 한 잔 더 하자고 말할까 고민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다. 아무리 술이 들어갔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모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배꼽 아래에서 무럭무럭 솟아났다. 자신감이 생기니 움츠렸던 어깨가 자연스럽게 펴지고 허리가 곧게 서는 것이 느껴졌다. 자연스레 턱끝이 올라갔고 눈은 살짝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원래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모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나도 나이니까 라는 생각이 망설임을 눈처럼 녹였다. 나는 눈이 반쯤 풀린 김소연의 손을 잡았다. 김소연은 놀랜 듯했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의문이 담긴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자리를 옮기려고 말하려던 차에 누군가 내 어깨를 탁 소리 나게 쳤다.
“이야, 덕구 변했네 여자 손도 덥석 덥석 잡고?”
김민수가 우습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김민수의 말 한마디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아홉 명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쏠렸다. 김소연 역시 아까와는 다른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슬그머니 손을 뺐다. 옛날 같았으면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더듬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김민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지난날의 기억이 필름처럼 지나가며 속에 쌓인 응어리가 역한 냄새를 풍기며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하지 마.”
“응?”
“덕구라고 하지 마.”
“어?”
김민수는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는 듯 당황한 얼굴이었다. 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갔다.
“언제까지 덕구야 내가 지금 나이가 서른이 돼가는데.”
자신감이 과하면 만용이 된다고 했던가, 한 번 말을 뱉자 그다음부터는 내가 시키지 않아도 혀가 알아서 말하는 기분이었다.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내가 왜 덕구야? 내가 널 만수나 맹구라고 부르면 기분 좋아?”
김민수는 잠자코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나는 14년 전에 했어야 할 말을 이제야 김민수에게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맨 정신에는 용기가 나질 않아하지 못했던 말을 술의 힘을 빌어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라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말할 수 있는 것이 나는 너무나도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긴 시간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을 지냈는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면 될 것을 진작 말할 걸이라는 약간의 후회가 들었다.
목소리로 가득 찼던 바가 지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다. 다들 동작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얼굴에서도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내 입을 바라보면서 다음에는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궁금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마치 사이비교주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취해 나는 이참에 다른 애들에게도 이 냄새나는 응어리를 집어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네들도 마찬가지야. 더 이상 나를 덕구라고 부르지 마.”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느껴지니 식은땀이 났다. 괜한 짓을 하나 싶은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어떻게든 끝맺음을 해야 했다.
“알았지? 앞으로…”
따악- 하는 소리와 나는 하려던 말과 함께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언제고 나무 배트에 야구공이 정확하게 맞았을 때 나는 그런 청량한 타격음이었다.
“하,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야 덕구야.”
김민수가 왼손에서 시계를 풀고 있었다.
“도대체 옛날이야기는 왜 꺼내서 분위기 이렇게 망치는데?”
김민수가 시계를 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부릅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김민수를 보며 술기운이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잠시나마 느꼈던 무한에 가까울 줄 알았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었고 넓게 폈던 어깨도 다시 움츠러들었다.
“장난 좀 친 걸 가지고 말이야. 아직도 꽁해가지고 뭐 하자는 건데? 옛날 생각나게 만들어줘?”
김민수가 한걸음 다가서며 윽박지르듯이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볼 뿐이었다. 캔버스 단화 끝에 먹다 남은 과일 찌꺼기가 조그맣게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 꼴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다른 쪽 발로 찌꺼기를 슥슥 비벼 떼내고는 슬쩍 눈을 들어 김민수를 바라봤다. 김민수는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야, 그만해. 오랜만에 만나서 이게 뭐야 친구끼리. 덕.. 아니 순덕아 너도 민수한테 사과하고 그만해.”
퍽퍽한 분위기를 참다못한 이재민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예전부터 이재민은 이런 역할이었다. 권력을 가진 쪽에 찰싹 붙어서 시누이처럼 얄미운 짓은 도맡아 하면서도 분위기가 과열되는 눈치면 얼른 나서서 중재하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김민수 패거리가 애들을 괴롭혀도 큰 사고 없이 졸업한 것은 이런 이재민의 역할이 컸다. 아마 이재민이 없더라면 저들 중 몇은 강제 전학을 갔거나 어쩌면 소년원에 갔을지도 모른다.
“아니, 나와봐 진짜 너도 봤잖아 뭐래는지. 아니 별명 부른 게 그렇게 잘못이야?”
“에이, 야 싫다잖어. 그냥 이름 불러주면 되지 뭘 그래 친구끼리.”
김민수가 다시 뭐라고 하려고 했으나 이재민이 재빨리 나를 보며 말했다.
“야 순덕아, 너도 그만해. 민수가 그래도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게 자리 만들어서 좋은 데 왔는데 너도 그러는 거 아니다.”
말을 마친 이재민은 어서 사과하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민수는 손바닥을 펼쳐 귀 옆으로 가져다 대며 안 들린다는 시늉을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좀 더 큰 목소리로 김민수에게 말했다.
“미안해.”
김민수는 한숨을 쉬며 그만하자고 말했다. 이재민은 그런 김민수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는 미안하다는데 기분 풀고 마저 놀자라며 자리를 옮겨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김민수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래 이제 걔도 오니까 하고 말했다.
이재민이 김민수를 테이블 바깥쪽에 앉혀놓고 나머지 애들에게 자자 잠시 해프닝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만났으니 잊어버리고 마저 즐기십시다 하며 건배를 제의했다. 다들 회식자리에서나 나올 법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이재민을 보며 깔깔거리며 웃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그만 망연해져서 앉을자리를 찾다가 처음에 앉았던 자리로 돌아갔다. 술이 깬 기분이 싫어서 바텐더를 찾았으나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옆의 놓인 소주병을 들어 잔을 채우려는데 나보다 먼저 소주병을 낚아챈 사람이 있었다.
“안 좋은 버릇이 있네. 혼자 자작하는 거 실례야.”
“어…”
나는 당황해서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최선화는 그런 나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짓더니 술병을 내밀었다.
“자, 한 잔 받아.”
“응 고마워.”
“뭐가?”
“어? 아니, 술 고맙다고.”
나는 제멋대로 말이 튀어나가는 입을 손으로 막고 싶었지만 최선화가 술병을 내밀어 자신의 잔도 채워달라고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술병을 들어야만 했다.
“오랜만이네. 순덕이. 예전 그대로야.”
“어… 너도 여전해.”
“뭐가?”
“응?”
“난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점이 여전해?”
최선화가 자못 실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생각할 겨를이 없어 최선화의 말을 그대로 받은 것일 뿐인데 입장이 난처해졌다.
“아니 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호호, 됐어 농담이야. 여자랑 대화가 서툰 것도 여전하구나.”
최선화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놀리듯이 말하는 말투였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선화의 말에서는 다른 애들의 말에서 느껴지는 경멸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선화에게서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대단해. 김민수한테 그렇게까지 말하다니. 나라면 그럴 수 없었을 거야.”
선화는 술잔을 쳐다보며 말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선화의 속눈썹은 길었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끝이 날카롭게 벼려진 칼 같은 선화의 코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망설이던 차에 선화는 고개를 들어 술을 마신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도 너처럼 용기가 있었다면, 적어도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선화의 말에서 짙은 슬픔이 느껴졌다. 왜일까. 선화는 초등학교 때부터 모두의 예쁨을 받고 자랐다. 내가 아는 기억의 시작이 초등학교 때인 것이지 아마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모두의 주목과 사랑 속에서 자랐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런 선화에게 무슨 슬픔이 있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애초부터 슬픔과 고난, 시련 같은 것은 나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애초에 김민수 패거리에게 괴롭힘을 당해도, 대학에서 선배들에게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차일피일 대금 지급을 미루는 거래처에게도 크게 화를 내지 않았다. 당하는 쪽이 약한 것이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선화의 말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연의 세계에서 선화는 나와는 다른 종이 었다. 가장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나와는 달리 선화는 먹이사슬의 가장 높은 자리에 근접한 개체였다. 그런 그녀에게 어떤 걱정이나 슬픔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궁금해진 나는 선화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 순간 이재민의 목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자 얘들아, 슬슬 일어나자 2차 가야지?”
“시간이 애매한데 그냥 여기서 마저 더 마시고 시마이하자.”
누군가 시계를 보고는 벌써 열 시 반이야 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재민은 오랜만에 만났는데 막차는 무슨 막차냐며 오늘은 첫차를 타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거기에 덧붙여 2차는 반가운 손님이 올 것이라는 말도 했다. 그 말에 설득당한 아이들은 그게 누구냐고 물었지만 이재민은 2차 가는 사람만 알 수 있지- 라고 못을 박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