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민은 앞장서서 우리를 인도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이재민은 헷갈리지도 않은 채 단번에 우리를 큰길로 데려왔다. 이재민의 기억력에 김민수도 이 새끼 기억력은 여전하네라며 놀랄 정도였다. 이재민은 이 정도야 아직은 가뿐하다며 이제 곧 가게에 도착한다고 말했다. 그때 김소연과 김소연 옆에 있던 여자애가 자기들은 이만 가봐야겠다며 무리 뒤쪽으로 살짝 빠졌다. 다른 여자애들이 조금 더 놀자고 말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풀린 동공이 제자리를 찾은 김소연은 나를 흘끗 보더니 기분 나쁜 듯 고개를 돌려 택시를 찾는 척했다. 나 역시 아까의 일이 생각나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곧 사람을 태우지 않은 택시가 우리 앞을 지나갔고, 유재환이 택시를 세워 김소연과 그녀의 친구를 택시에 태웠다. 언제나 신사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의 몫은 전부 유재환의 것이었다.
김소연이 가고 우리는 몇 걸음 가지 않아 2차를 치를 장소에 도착했다. 이재민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옛날 곱창’이라고 써진 곱창집이었다. 가게 이름이 무색할 만큼 내부 인테리어는 신식이었다. 겍다가 리모델링을 한 지 얼마 안 된 듯 새 집 냄새가 물씬 풍겼다.
“자자, 곱창 못 먹는 사람 없지?”
이재민이 박수를 치며 시선을 모았다.
“없어서 못 먹지!”
서민주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다들 깔깔거리고 웃었다. 다행히 무리 중 곱창을 못 먹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곱창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아까의 일로 몹시 불편해서 곧바로 집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얼떨결에 큰길로 같이 나와버렸고, 나보다 먼저 김소연이 집에 간다고 선수를 치는 바람에 집에 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 때문에 나는 곱창집으로 오는 내내 힐끗거리는 눈빛들과 귀를 간지럽히는 속삭임에 시달리며 걸어야 했다.
한 가지 위안 삼을만한 것은 옆에 선화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선화는 나와 쭉 같이 걷지는 않았지만 이따금씩 한 두 마디씩 건넸다. 대화 내용은 특별할 것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의례 묻는 안부들이었다. 요즘 어때, 아직도 거기 살아, 여전히 그림은 그리고? 같은 일상적인 물음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선화의 그런 모습들이 좋았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편견을 갖지 않고 나를 대하는 것이, 나를 덕구가 아닌 순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 좋았다. 나는 선화의 물음에 성심껏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생각한 매끄러운 대답들이 입으로 나올 때는 엉망진창이었다. 말을 더듬거나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말하기 일쑤였다. 선화는 그런 나를 보고 쿡쿡 웃으면서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다시 물어보고 혼자서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그런 선화를 보며 서민주는 도대체 쟤랑 왜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야라며 핀잔을 주며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가버렸다. 선화는 그런 서민주를 보며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말하고는 급히 서민주의 뒤를 쫓았다.
나는 선화를 뺏어가는 것만 같은 서민주가 얄미웠지만 일단 집에 돌아가려던 생각은 살포시 접었다. 타이밍도 그렇거니와 저렇게 완벽한 선화의 그늘이 무엇인지 알아야 내고야 말겠다는 이상한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이모, 여기 불곱창이랑 소금구이 섞어서 주시고요, 처음처럼 4병에 맥주 4병 주세요!”
이재민이 능숙하게 주문했다.
“야, 무슨 맥주를 4병이나 시켜?”
“세 잔까지는 소맥으로 목을 축여야 소주가 잘 받지.”
“난 소맥 싫단 말이야!”
“그럼 넌 그냥 소주 마시면 되지 왜 그래?”
“돈 많이 나오니까 그렇지!”
서민주가 신경질을 부리며 말했다. 이재민은 서민주의 말에 어이없어하며 오랜만에 만났는데 돈이 중요하냐고 묻자 서민주는 그건 그거고 돈은 돈이고 라고 소리쳤다. 그 바람에 일순 분위기가 가라앉을 뻔했으나 김민수가 끼어들어 무마시켰다.
“하하하, 야 민주 너 돈돈 거리는 건 여전하구나? 걱정 말고 맘껏 시켜.”
“왜? 네가 내주기라도 하게?”
“내가 내는 건 아니지만 네가 내는 것도 아니니까 걱정 말고 시켜.”
김민수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민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민수에게 물었다.
“와 대박, 그럼 누가 사는 건데?”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서민주가 계속 누구냐고 물었지만 김민수와 이재민은 서로를 보고 씩 웃을 뿐 대답해주지 않았다. 서민주가 짜증 난다고 투덜거렸지만 김민수는 신경 쓰지 않고 잔을 들었다.
“자, 얘들아 한 잔 하자!”
이재민이 자신 있게 말아놓은 소맥이 잔에서 빙글빙글 회오리를 만들고 있었다. 잔이 연거푸 부딪히며 빠르게 술이 사라졌다. 바에서 걸어오면서 날아간 알코올을 보충이라도 하듯 다들 무섭게 술을 들이켰다. 나는 잔을 들어 입술만 적시고 다시 내려놓았다. 아까 바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화끈거렸다.
“순덕아, 왜 안 마셔?”
“응, 조금 쉬었다 마시려고.”
그런 나를 보며 선화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며 물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민주는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라고 선화에게 핀잔을 주었다. 서민주는 나를 흘겨보더니 고개를 획 돌려 다시 술자리에 집중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입모양을 봤을 때 모르긴 몰라도 내 욕을 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꽤 흘러 자정이 가까워져도 김민수가 이야기한 술값을 내러 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다른 애들은 술값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술자리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술자리에 앉은 면면을 살폈다.
각자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애나 수시로 젓가락을 떨어뜨려 테이블에 달린 벨을 누르는 애, 무슨 말만 하면 깔깔거리고 있는 애와 고개를 떨굴 듯이 꾸벅꾸벅 조는 애까지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나는 점점 술이 깨면서 술자리 밖에 있는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두가 술에 취해 즐겁게 놀고 있는 와중에 나만이 취하지 않고 있었다. 무리 밖에 홀로 떨어진 코끼리처럼 멀어져 가는 무리를 바라볼 뿐이다. 다만 코끼리는 무리에 피해가 가지 않기 위해 스스로 고립을 택한 것이고 나는 자연스레 도태되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순덕이, 한 잔 괜찮아?”
술에 취한 사람을 맨 정신으로 보는 것이 상당한 고역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쯤, 선화가 내 옆자리에 앉아 술잔을 내밀었다. 술잔을 잡은 가늘고 긴 손가락 끝에는 깔끔하게 살 색 매니큐어가 발려 있었다. 나는 선화의 손가락을 보며 사람이 손가락도 예쁠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 그래. 그럼 한 잔 만…”
술잔을 거절하려 했으나 단호해 보이는 선화의 눈빛에 나는 잔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선화는 내가 술잔을 받아 들자 소주가 거의 흘러 넘 칠 만큼 가득 따라주었다.
“자, 얼른 마시고 줘.”
“어?”
“수잔 몰라?”
나는 선화를 줄 새 잔을 찾고 있던 와중에 어서 술잔을 비우라는 선화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선화는 그런 나를 보고 회사 다닌다더니 좋은 회사인가 보네라며 따라 주었던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잔을 줬잖아. 그럼 그 술을 마시고 나한테 다시 주면 돼. 그럼 내가 그 잔으로 술을 마시고.”
선화의 설명에 나는 의문이 생겨 도대체 왜 그렇게 불필요한 짓을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화는 깔깔 웃으며 잔 돌리기라고 하는 것인데 자신도 회사 상사에게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진짜 쓸데없는 짓이야. 비 위생적이고. 역시 넌 꼰대가 없는 회사에 다니는구나.”
선화의 말에 나는 시선을 피했다. 선화는 내가 회사를 다니는 줄 알고 있었으나 굳이 바로 잡지는 않았다. 선화가 따라준 술잔을 비운 다음 휴지로 잔을 닦아 선화에게 건넸다. 선화는 잔도 닦아서 주다니 매너가 있네라며 웃었다. 나는 어쩐지 그 웃음이 슬퍼 보여 술을 따라 준 다음 용기를 내어 선화에게 물었다.
“요즘… 힘들어?”
선화는 뜻밖의 말을 의외의 인물에게 들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녀는 내가 따라 준 술을 단숨에 마시더니 빈 잔을 내밀었다.
“힘드냐고? 힘든 거야 항상 힘들었지. 하루도 안 힘든 날이 없었어.”
선화가 씁쓸하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술을 따라주었다. 옆 테이블에서는 저들끼리 깔깔대고 흥이 있는 대로 올라 이따금씩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다. 게다가 어느새 술집은 만석이 되어 목청을 높이고 귀를 가까이 대야지만 상대방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선화와의 대화는 서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선명하게 들렸다. 바로 옆에 앉아서라기보다는 집중의 차이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어디서 본 것 같은 이론을 떠올렸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나도 너처럼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다.”
선화가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순간 선화의 표정이 울 것 같다가 이내 우는 듯 웃는 듯 복잡한 표정으로 변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선화의 얼굴을 보고는 조용히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선화처럼 단숨에 마시려고 했지만 소주 특유의 역한 알코올 향이 코를 찌르는 바람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선화는 그런 나를 보고 언제 우울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아이처럼 까르르 웃었다. 선화의 웃는 모습을 보며 나는 중학생 때의 선화를 떠올렸다. 그때와 같이 웃고 있는 선화였지만 지금은 예전과는 다르게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마치 대가가 완벽하게 그려놓은 그림에 누군가 실수로 물감을 흘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그것이 아마 선화가 가지고 있는 어떤 모종의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잠시 잊고 있던 것을 생각해냈다. 굳이 2차까지 온 것은 시답지 않은 동창회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 기억 속의 비너스가 가지고 있는,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를 찾고 싶어서였다. 내 첫사랑의 온전한 미소를 다시 찾아주기 위해 이 자리까지 쫓아온 것이었다.
나는 선화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볼 요량으로 입을 열었지만 와하는 고함소리에 시선을 뺏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