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훨씬 든든한 일이다
선화에게 연락이 온 것은 만 하루가 지나서였다. 지난날 작업으로 인해 새벽까지 작업을 하고 오후 세시 즈음 이부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때였다.
'지이잉-'
휴대폰의 진동이 눈을 뜨게 했다. 나는 뻑뻑한 눈꺼풀을 몇 번 깜빡여 힘겹게 뜨고는 침대 밑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미안! 어제는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답장을 못했어. 그럼… 혹시 괜찮으면 이번 주말에 저녁이나 먹을까?'
나는 무겁게 느껴지던 눈꺼풀이 무색하게 눈을 크게 뜨고 문자를 읽었다. 동창회 이후 용기를 내어 보낸 잘 들어갔냐는 연락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선화의 말을 곱씹었다. 수학여행 전날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두근거림이 가슴을 두드렸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 커튼을 힘껏 젖혔다. 날카로운 햇빛이 눈을 질끈 감게 했지만 얼굴에 느껴지는 따스한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 반 통을 비우고 나머지 반은 도로 넣었다. 시원한 물이 몸 안을 적시자 비로소 현실이 인식됐다. 선화와 단 둘이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주말에는 아무 시간이나 상관없다고 답장을 보낸 뒤 곧바로 인터넷에서 약속 장소로 괜찮은 곳이 있나 검색하기 시작했다.
선화를 만나기로 한 토요일 저녁까지 나는 들뜬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다른 것에 몰두할 필요가 있었다. 지루하게 끝낸 작업물을 의뢰인에게 다시 연락해서 굳이 다시 봐주겠다고 이야기한 나는 고칠 필요 없는 세세한 부분까지 다듬어가며 내 의식에서 선화를 밀어냈다. 이미 끝난 작업물이라 더 손볼 곳이 없다시피 했지만 나는 이런저런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며 다듬고 다듬어 일주일을 꽉 채웠다.
의뢰인은 뜻밖의 친절에 처음에는 고마워하는 듯싶다가도 일주일이나 작업을 더 진행하겠다고 하자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쳤다. 중간중간에 이제 괜찮으니 완성된 부분만 보내주시라, 우리가 나머지는 채워 넣겠다 하는 연락을 몇 번이나 했지만 나는 내가 시작한 일이니 끝까지 마무리를 하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작업물을 넘기기 하루 전 날에는 노골적으로 작업이 오래 걸리는 것 같은데 혹시 페이를 더 드려야 하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평소 같았으면 ‘조금 더 얹어주시면 감사하죠’라고 대답했겠지만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무엇이지 돈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온 몸이 붕 떠서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다.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의 손에서 슬며시 놓아진 헬륨 풍선처럼 밑도 끝도 없이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 종국에는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펑- 하고 터져버릴 것이다. 나는 날아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오므린 발가락들이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얗게 변했다. 그렇게 선화와 약속한 토요일 저녁이 되었다.
선화를 만난다는 생각에 뒤척거리느라 세 시간밖에 자지 못했지만 머리가 약간 멍한 것 빼고는 기분은 아주 좋았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주문한 니트와 코트를 위에 걸치고 거울 앞에 섰다. 옷 태는 괜찮았지만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옛날에 쓰다 안 쓰던 뿔테 안경을 찾아 썼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주말에 지하철은 유독 사람이 많았다. 일주일 중에서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스무 살 무렵의 나는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싫었다. 기다란 열차칸에 몸을 꾸깃꾸깃 접어 넣은 채 평일에는 일터로 주말에는 놀이터로 실려가는 처지가 가축 같았다. 다들 코뚜레를 하고 멍에를 진 채 부자들에 손에서 놀아나는 노예들의 삶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날 집에 돌아온 저녁 엄마에게 던진 이 물음은 '원래 인생이 다 그런 거야'라는 간단한 말로 나의 고민은 처리되었다. 하지만 인생이 원래 다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일주일에 5일을 일하고 2일 쉬는 삶이 종국에는 어떻게 끝날 것인가,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죽음 이후에는 대체 어디로 가는가 따위의 것들을 스무 살 무렵의 나는 혼자 끙끙 앓으며 고민했다. 그때의 고민이 결국 나를 5일 일하고 2일 쉬는 삶의 트랙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지만 대신 나는 그들이 받는 월급이라는 일용할 양식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매일 일정량, 혹은 그보다 덜 일해도 배급처럼 받는 월급의 소중함을 스무 살의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따끈한 감자나 혹은 옥수수 같은 배급을 위해 그나마 이틀이라도 쉴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아버렸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인간의 삶이 가축이랑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너무도 빨리 알아버린 탓에 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했던 탓일 수도 있겠다. 결국 나 역시 살아남기 위해 코에 커다란 걸쇠를 걸고 끌어줄 주인을 찾아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푸쉬-익'
가득 찬 사람들이 버거운 듯 한숨 비슷한 소리를 내며 지하철 문이 열렸다. 나는 10번 출구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으나 뒤에서 불만 가득한 몸짓으로 나를 밀쳐대는 사람들 때문에 발을 바삐 놀려야 했다. 사람들은 이정표나 앞의 사람들은 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처박고 휴대폰을 보면서도 앞으로 잘만 나아갔다. 그 모습이 마치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심해어 떼의 이동과도 같아 경이로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그들 흐름에 섞인 나는 넋 놓고 행진을 지켜볼 수 없었다. 나는 흐름에 몸을 맡기며 보이지 않는 선두를 따라 자연스럽게 발을 옮겼다. 처음에는 나를 거치적거리는 장애물로 여긴 듯 피해 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들과 동류라고 판단한 탓인지 내가 흐름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고는 더 이상 나를 비켜가거나 추월해가지 않았다.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지상으로 나왔다.
사람들은 지상에 나오자마자 거짓말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지하에서부터 나를 이끌던 거대한 '흐름'은 바람이 지나간 것처럼 나만 덩그러니 놓아두고는 사라져 버렸다. 나는 '강남역 10번 출구'라고 적힌 기둥 아래에 서서 지금 일어난 마법 같은 일들을 곱씹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제 갈길 가기에 바빠 보였다. 오늘만을 기다린 듯 바삐 움직이는 발걸음이 분주했다. 어느덧 해가 빌딩 뒤로 서서히 숨으며 하늘이 라벤더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보니 아직 약속했던 시간까지는 15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나는 근처 카페라도 들어가서 커피를 마실까 하다가 그 정도까진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 자리에서 그냥 선화를 기다리기로 했다. 날씨가 쌀쌀하긴 했지만 못 버틸정도는 아니었다. 다행히 눈이 오지는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겨울 냄새가 상쾌했다.
출구 번호가 적힌 곳에서 기다리겠다는 연락을 선화에게 보내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어딘지 모르게 살짝 미소 짓는 얼굴들이다. 저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
선화는 말과는 달리 전혀 미안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고 보통 먼저 온 사람에게 의례 하는 인사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선화가 일단 추우니 어디라도 들어가자고 말했다. 내가 이미 예약해놓은 곳이 있다고 이야기하자 선화는 잘됐다며 얼른 가자고 내 팔을 끌어당겼다. 나는 느닷없는 선화의 스킨십에 나도 모르게 팔을 슬쩍 빼려는 시도를 해버렸다. 그러자 선화는 의아한 듯이 나를 쳐다보더니 아차 싶은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갑자기 오한이 들어서 그렇다는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하며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지만 선화는 더 이상 내 팔을 붙잡지 않았다.
나는 나의 어수룩함을 속으로 탓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선화와 나는 가까운 듯 멀게 거리를 둔 채 나의 인도를 따라 걸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찾아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침묵하는 시간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이자카야 앞에 도착한 우리는 테이블 정리에 시간이 조금 걸린다는 직원의 안내에 밖에 마련된 의자에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아까 선화를 기다릴 때까지만 해도 춥지 않은 날씨였는데 술집 앞에 도착하자 하늘이 까만색으로 뒤덮이더니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선화도 코트 앞섬을 한껏 여몄다. 기다리는 동안 쉴 새 없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다. 벌써부터 인사불성이 되어 나오는 사람과 어떻게든 그 사람을 택시에 태워 보내려는 사람, 아직 자리 정리가 멀었냐고 앙칼지게 따지는 목소리와 점원의 불친절한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는 외침이 뒤죽박죽 섞여 선화와 나를 더욱 어색한 침묵 속으로 밀어 넣었다. 잠시 후 점원이 큰 소리로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나는 나를 부르는 줄 모르고 멀뚱멀뚱 서 있다가 점원이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자 선화와 함께 서둘러 들어갔다. 점원의 불친절한 행동에 기분이 나쁠 새도 없이 우리는 마련된 자리로 던져지다시피 앉게 되었다. 게다가 숨 돌릴 틈도 없이 어서 주문하라는 듯한 눈초리로 서있는 점원의 눈치에 나베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시킨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후, 정신없네."
"그러게.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나 봐."
선화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빨갛게 상기된 선화의 볼이 귀엽게 느껴졌지만 잔뜩 지친 표정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서둘러 주말이라 사람이 많다고 맞장구쳤지만 정답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선화는 머리를 몇 번 쓸어 넘겨 정리를 하고는 물컵에 물을 따라 단숨에 비웠다. 괜히 머쓱해진 나머지 나도 선화를 따라 물을 마셨다.
"하, 이제 살 것 같다."
선화가 물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도 똑같이 물컵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를 찰나, 다행스럽게도 선화가 말을 이어갔다.
"주말에 강남이라니... 사람 구경하고 싶었니?"
선화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혀 다행스럽지 않은 전개였다. 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선화는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근데 사람 진짜 많다. 여기 꽤 유명한 곳인가 봐?"
"으응, 리뷰가 꽤 많더라고."
"오, 블로그 같은 거 찾아본 거야?"
선화가 귀엽다며 웃었다. 나는 그만 얼굴이 화끈거려 눈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아마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너가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놀랐어 조금."
"어.. 무리한 거면 미안해 나는 그냥.."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사과했다.
"아니, 아니! 내 말은 나 같은 애한테 따로 연락하고 그런 게 놀랐다는 거지! 고마웠다는 말이야!"
선화가 손사래를 치며 내 말을 막았다. 나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선화를 보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애'라는 표현은 절대로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저련 류의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낮은 유형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사람들한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속으로 많이 내뱉은 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전이나 누군가가 내게 호의 섞인 말을 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나 따위에게 무슨'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한 번은 내가 왜 이러는지 나 자신도 신기해 인터넷에 같은 증상이 없는지 검색해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꽤나 많았는데, 한 정신과 의사의 답변은(실제로 정신과 의사인지 알 길은 없지만)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종종 하는 행위'라고 정의해주었다. 그 날부터 나의 이유 없는 자기 비하가 자존감이 낮아서라는 사실을 직시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내 인생 최악의 시기를 보낸 중학교 시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억을 떠올릴 뿐 그 기억에 대해 어떤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그저 '그들의 괴롭힘이 내 자존감을 저하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만을 인정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선화의 말이 의문스럽게 느껴졌다. 나처럼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그 영향으로 성인이 되어서까지 칙칙한 분위기를 두르고 사람들을 대하는 게 어려워진 사람이나 뱉는 말을 선화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녀가 내뱉을 만한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닌 말이었다.
나는 기억 속에서 동창회 때의 선화의 모습을 끄집어냈다. 어딘지 맥없어 보이는 미소와 종종 쉬는 한숨이 무엇인가 고민을 떠안고 있는 사람 같았다. 선화의 그늘진 표정을 떠올린 나는 속으로 오늘은 꼭 그녀가 가진 어두움의 정체를 밝혀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고맙다니, 나는 네가 이렇게 선뜻 나와줄 줄은 전혀 생각 못했어. 나야말로 갑작스럽게 불러내서 미안하고 또 나와주니까 고맙지.”
“참 우리 십 년 넘어 만나서는 서로 고맙다는 이야기밖에 안 하네?”
“그러게.”
나는 가볍게 맞장구를 치고는 말을 이끌어가는 재주가 없는 나 자신을 원망했다. 어색한 침묵이 몇 번이나 우리 주위를 맴돌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선화가 적절하게 내게 말을 건네 침묵을 내쫓았다. 술이 몇 순배 돌아도 우리의 대화는 좀 더 깊은 곳으로 가지 못하고 얕은 수면만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주로 선화가 말하면 내가 대답하는 식이었는데 이따금 선화가 말을 멈추면 내가 먼저 어렵게 말을 꺼내기도 했다. 깊이 없는 대화가 늘 그렇듯이 우리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주제를 넘나들며 대화했다. 하나같이 가벼운 주제들이었다. 날씨가 꽤 쌀쌀하다는 이야기부터 어렸을 때 키우던 강아지가 소변을 못 가려 엄마한테 혼난 이야기, 직장을 다니는 삶에 대한 이야기와 옆 테이블에서 이따금씩 들리는 간간한 신음소리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말하는 정도였다.
"하는 것 같지?"
"글쎄... 그냥 어디가 아픈 것 아닐까?"
"아프긴 말도 안 되는 소리. 아픈 애가 술집을 와?"
선화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아픈 사람이 신음소리를 참아가며 술집에 앉아 있을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선화와 옆 테이블 커플의 노골적인 애정행각에 대해 논하기에는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음.. 그냥 잠시 바람 쐬러 나왔다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
선화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저건 백 프로 애무하는 거야."
나는 선화의 직설적인 표현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아까보다 훨씬 더 빨개져 있을 나의 얼굴을 상상하며 나는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단어들을 뒤졌다.
"얼굴은 왜 빨개져?"
선화가 내 얼굴을 보며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방이 조금 더워서 그렇다는 핑계를 댔다. 선화는 하나도 덥지 않은데 왜 그러냐며 열이 나는지 살펴보려고 손을 이마 쪽으로 가까이 가져왔다. 나는 순간 놀래서 고개를 뒤로 빼고는 한 박자 늦게 후회했다. 선화는 그런 나를 보고 못 참겠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미안 미안 내가 너무 놀렸지? 아까 처음 만났을 때 보니까 여전히 숙맥인 것 같더라고 너. 재밌어서 조금 놀려봤어 미안!"
선화가 눈을 찡긋하며 두 손을 합장했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여전히 중학교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짓게 했다. 그래서 더욱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그늘에 대해 나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참, 우리 번호도 없지? 핸드폰 줘 봐."
내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선화는 휙 낚아채더니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초쯤 통화음이 울리더니 익숙한 멜로디가 선화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 '딴, 따란딴 딴, 딴따라라라란' 하는 들어본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맴돌며 도대체 무슨 노래였더라 생각하는 사이 선화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슈베르트 송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
"아, 송어구나. 난 여태까지 숭어인 줄 알았는데."
"그건 오역이래. 듣기만 해도 엄청 신나지 않니? 딴~ 따라란."
선화가 멜로디를 따라 부르며 웃었다. 나는 신나기는 하는데 조금 아저씨 취향 아니냐고 선화를 놀렸다. 내가 말하고 나서도 나한테 이런 농담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혹여나 질 낮은 나의 농담에 기분이 상했을까 봐 선화의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 살짝 삐친 표정을 지을 뿐 기분이 상해 보지는 않았다.
"치. 클래식이라고. 아저씨가 아니라."
"흠. 그래 클래식. 그런데 어쩌다 숭, 아니 송어를 좋아하게 된 거야? 클래식이라기에는 뭔가.. 흔하다고 해야 하나? 쉽잖아?"
나는 송어를 흔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아차 싶었다. 타인의 취향에 대해 흔하다거나 쉽다거나 평가하는 짓은 굉장히 예의가 없는 행동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는 만화나 영화, 게임 캐릭터를 따라 그린 나로서는 나의 취향이 타인에 의해 왈가왈부되는 상황이 얼마나 불편하고 성질나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 별명이 '덕구'라고 지어졌던 날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행히 선화는 나와는 다르게 크게 상관없는 눈치였다.
"그렇지 아무래도. 사람들도 많이 알고 흔하지."
"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
"근데, 그래서 나는 더 좋아 흔해서."
"왜?"
"흔하다는 것은 누구나 접할 수 있다는 거잖아? 누구나 쉽게, 우연한 계기로, 어쩌다 갑자기 마주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것이 흔하다고 하는 거면 난 그런 흔한 것들이 좋아."
"흠, 신기하네. 보통 사람들은 유니크한.. 그러니까 특별하고 희귀하고 이런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나? 나도 그렇고."
"나도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아냐."
"왜?"
"음.. 뭐랄까. 특별하고 희귀하고 이런 것들은 적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어떤 것들이 더 숭고하고 고결하고 그래 보여. 행복도 불행도 소수의 사람한테만 돌아간다면 그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니겠어?"
선화의 말을 듣고 나는 그럴싸한 논리지만 궤변이라고 생각했다. 흔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값어치가 저렴하다는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평가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값이 나가는 희귀한 것에 목을 맨다.
행복한 소수를 향해, 소수의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클럽 안에 들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거나 은행 대출을 빌려 레버리지를 일으켜 부동산에 투자한다던가 하는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소수의 행복한 사람들을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불행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들보다 행복한 소수의 클럽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항상 불행하다. 어째서 선화는 불행이 소수의 사람한테만 돌아간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차피 자본주의가, 아니 우리 인간이라는 동물이 살아가는 한 생존은 경쟁이고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어떤 학자는 수렵채집인이었을 당시 인간이 현대사회보다 훨씬 일도 적게 하고 다양한 음식을 먹으며 행복하게 살았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봤을 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간이란 동물 자체가 함께 등을 부비며 살아가는 한 누군가는 일만 해야 하고 누군가는 얻어먹기만 하는 관계가 반드시 생긴다. 행복은 언제나 소수에게 돌아가고 불행은 다수가 짊어질 수 없는 그런 동물이 인간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굳이 선화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간에 사람이라는 동물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존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옳고 그름과는 또 다른 문제다. 나는 기껏 날씨나 좋아하는 색깔 따위의 얕은 이야기들로 한 겹 한 겹 좁힌 선화와의 거리를 훌쩍 멀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흠 그럴 수도 있지. 그건 나 같은 흔한 사람한테는 참 위안이 되는 말인데?"
내가 농담조로 웃으며 말했다. 선화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넌 흔한 사람 아닌데?"
"응?"
"네가 왜 흔한 사람이야? 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
"아.. 어 뭐. 하긴 나 같은 사람이 흔할 리 없지."
나는 뜻밖의 대답에 의기소침해졌다. 생각해보면 선화가 말하는 '흔한 사람'에 내가 포함되어 있을 리가 만무했다. 흔하다는 것은 곧 평범하다는 말이다. 평범하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는 것이고, 보통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학창 시절을 보냈을 리 없다. 평범하게 반 친구들과 어울리고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졸업 후에 가끔 만나며 안부도 묻는 그런 학창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나는 씁쓸함이 몰려와 혀 끝을 씹었다.
"어? 아니 아니 나쁜 뜻 아닌데!"
선화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 흔한 사람이 아니라 특별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였어!"
나는 선화의 눈을 보며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특이하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특별하다는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선화같이 정말 특별한 사람에게서 특별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칭찬인지 농담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선화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칭찬이야. 참, 특별하다는 말을 칭찬이 아닌 다른 말로 알아듣는 걸 보니 너도 어지간히 꼬였구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아니긴 뭘 아니야 표정에 다 써있구만!"
"미안.."
"아니 뭘 또 사과까지 하고 그래!"
"그게.."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선화는 그런 거 아니라고 어르고 달랬지만 다시 선화의 눈을 마주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화는 마치 울기만 하는 어린애를 겨우 달래 놓은 초보 엄마 같은 표정을 짓고는 자리를 옮기자고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나베 하나와 소주 한 병이 적힌 계산서를 받아 든 점원은 처음에 우리에게 자리를 안내했던 점원이었다. 점원은 계산서를 쓱 훑어보더니 건조한 목소리로 '이만 팔천 원입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건네자 직원은 카드를 받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 애쓰는 듯이 보였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나와 선화를 보며(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소개팅 자리라고 생각한 듯싶었다. 술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소주 한 병에 안주 하나만 시켜놓고 후다닥 나가는 모양새가 점원에 눈에는 소개팅에 실패한 패잔병처럼 보인 듯했다. 나는 순간 욱하는 마음에 직원의 생각을 바꿔놓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멀찍이 떨어져서 팔짱을 끼고 있는 선화의 모습을 보니 그러한 오해가 딱히 크게 틀린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졌다. 게다가 직원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점원 입장에서 보면 어서 나가자는 선화의 재촉과 카드와 함께 받은 영수증에 적힌 소주 1, 나베 1이라는 숫자가 정황상 합리적인 의심을 이끌어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바깥으로 나온 우리는 가슴께로 들어오는 찬 바람에 각자 팔짱을 껴야 했다. 겨드랑이에 손을 숨긴 두 명의 사람이 사람 하나 사이를 두고 걷는 모습은 차라리 서로 모르는 관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서로 어디를 가는지 묻지도 않은 채 도로에 난 길을 따라 쭉 걸었다.
주말이라 북적이는 거리 위에서 우리는 용케 서로를 잃지 않고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쳐갔다. 여전히 사람 하나 꼭 들어갈 거리를 유지한 채로. 나는 아무래도 오늘의 만남은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반쯤 포기한 채로 지하철 역을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오십 미터 정도 돼 보이는 곳에 아까 선화와 만난 출구가 길게 목을 빼고 있었다.
나는 선화를 한 번 쳐다보고, 자연스럽게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화 역시 별다른 말없이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차가운 바람이 몇 번이고 팔짱을 풀고 있는 안쪽으로 스며들기 위해 세차게 불었다. 그럴 때마다 겨드랑이로 손을 꽉 움켜쥐어 가슴 안쪽으로는 바람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대로 집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씁쓸함이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출구 쪽에 다 와 갈 즈음 내가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자 소매를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쪽 아니야."
선화가 내 옆에 바짝 붙어 내 소매를 잡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서 선화의 얼굴을 보자 또다시 말문이 막히려고 했지만 애써 당황하지 않은 척하려고 노력했다.
“왜?”
“여기로 안 갈 거야.”
"버스 타고 가게?"
나는 고르고 고른 말이 '버스 타고 갈 거냐'는 말인 것에 대해 속으로 나 자신을 원망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하철이 아니면 버스 타고 가는 게 맞지 않냐고 머릿속에서 합리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무리 숙맥이더라도 선화의 제스처가 버스를 타러 가자고 내 소매를 잡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보면 아는 것'이었다. 어쩌면 선화는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긴 거리를 사람 하나 사이를 두고 걸어오면서 내가 한 마디라도 걸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선화 역시 팔짱을 낀 채 모르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답답하고 초조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선화가 먼저 나에게 이야기했다.
"저쪽으로 가자."
선화가 가리킨 곳은 빌딩 사이로 나 있는 샛길이었다. 나는 군소리 없이 선화가 이끄는 대로 쫓아갔다. 슬쩍 돌아본 지하철 출구가 무저갱처럼 깊어 보였다. 나는 절벽에서 떨어질 뻔한 사람처럼 황급히 선화의 옆으로 뛰듯이 걸어가 발을 맞췄다.
선화와 빌딩 사이를 가로질러 나온 곳은 조용한 골목이었다. 방금 전까지 서울의 가장 번잡한 지역 중 한 곳에 있었다는 것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조용한 곳이었다. 골목 안을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한 명 내지는 두 명, 그마저도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간간히 클럽과 술집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이 들렸지만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웅웅 거리는 정도여서 오히려 거리를 더 고요하게 만들었다.
간간히 켜져 있는 빌라의 불빛들이 ‘여기부터는 가정집입니다’라는 안내문 같이 보여 나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하지만 선화는 아랑곳 않고 휘적휘적 앞으로 나아갔다. 발 밑에 놓인 캔을 보지 못하고 발로 차서 쓰러트리기도 했다. 걸음에 차인 음료수 캔은 땡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지며 크고 작은 소리를 냈다. 고요한 골목을 울리는 큰 소리가 몇 번 나고 나서야 파란 음료수 캔은 비명을 멈췄다. 나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주변에는 고양이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 꽤 걸었는데도 선화는 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과 점점 싸늘해지는 바람을 느끼며 아직 멀었느냐고 물었다. 선화는 이제 조금만 가면 된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빨리 고요한 골목의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화를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지만 한적한 거리가 주는 묘한 위압감은 꿈에 그리던 첫사랑과의 시간을 망쳐버린 조금 전의 나를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나는 선화의 앞에서 병신같이 작아지던 모습을 머릿속으로 몇 번씩이나 복기하며 가슴을 쳤다. 선화가 어디로 이끄는지에 대한 궁금증보다 얼른 집에 달려들어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종일 유튜브나 보고 싶었다. 그래도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면 야한 동영상을 찾아 그걸로 한바탕 자위를 하고 나면 푹 잠이 들 것이다. 다시 깨어나면 여전히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내 모습이 떠오르겠지만 다시 반복하면 그만이다. 며칠 동안 그 짓을 계속하다 보면 점점 괜찮아질 것이다. 시간은 약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응?"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냐고. 걱정 마 요 앞이야 이제."
나는 못된 생각을 들킨 아이처럼 뜨끔했다. 선화는 그런 나를 보고 씩 웃더니 내 손을 잡아챘다. 얼떨결에 손을 잡힌 나는 흠칫 놀랐지만 처음 만날 때와는 다르게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선화의 체온이 내 손을 타고 전해졌다. 고요한 골목이 주는 압박감이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선화는 가만히 있는 나를 보고 생긋 웃고는 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나를 움직이게 했다.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선화가 이끄는 대로 발을 움직였다.
선화의 손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땀은 아니지만 수분 기를 가득 머금은 손바닥이 젤리처럼 말캉거렸다. 크기도 아주 작아서 초등학교 2학년인 내 사촌동생의 손보다 작은 것 같았다. 선화는 그 작고 보드라운 손으로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앞으로 나아갔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는 와중에도 선화는 내 손을 놓지 않았고, 나도 선화의 손을 놓지 않았다.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지지직 거리는 가로등에 비친 우리의 그림자가 마치 폐지 수레를 몰고 힘겹게 올라가는 할머니 같았다. 그렇지만 발걸음까지 할머니의 그것과 같지는 않았다. 선화는 위태로워 보이는 자세와는 다르게 편안하게 나를 이끌고 있었다. 수레인 내가 알아서 선화의 뒤를 쫓았다. 언덕을 절반쯤 넘으니 끄트머리에 조그마한 갓등이 보였다. 다홍색 갓등 겉면에는 검정 글씨로 일본어가 적혀 있었는데, 아마도 술집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자, 여기야!"
선화는 마치 자신의 가게처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뭐하는 곳인데?"
"뭐하는 곳 같아 보여?"
"음.. 술집?"
"잘 아네. 2차 어때?"
선화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술집 앞까지 와서 2차 가는 게 어떻냐는 질문을 하는 선화를 보고 나는 저런 장난기 있는 면도 있었나 싶었다. 나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선화는 얼른 들어오라며 술집 입구에 걸린 발을 손으로 들췄다. 선화를 따라 들어간 가게는 생가보다 더 작았다. 성인 두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통로에 입구에서부터 얇은 선반이 길게 바 테이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바 테이블 너머로 뒷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요리사가 보였다. 프라이팬에 지글거리는 무엇인가를 볶고 있었는데 고소한 기름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얼마 전까지 먹다 나온 나베에 대해 이럴 거면 애초부터 먹지 말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화는 중년 요리사의 뒤통수에다 대고 '아빠!'하고 외쳤다. 중년 사내는 깜짝 놀란 듯이 뒤를 휙 돌더니 선화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내가 몇 번을 말하냐 갑자기 소리 지르지 말라고!"
"재밌잖아요 반응이. 아빠 친구 데려왔는데 우리 다락 가도 되죠?"
선화의 말에 중년 사내가 지긋이 나를 바라봤다. 사내의 얼굴 곳곳에 패인 주름이 더욱 깊어지며 한 차례 나를 훑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경계의 눈빛이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내의 주름들이 나를 탐지하듯 깊어졌다 엷어졌다를 몇 차례 반복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러던지. 비싸다고 오지 말랬더니 남자까지 데려오냐?"
사내는 눈썹에도 희끗희끗한 털들이 성기게 있었는데 부리부리한 눈동자와 축 늘어진 볼살 등 전체적인 인상이 호상이었다.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내에게 선화는 앙탈을 부리듯이 말했다.
"에이 그냥 친구예요."
"친구면 그냥 다찌에서 먹지 뭐하러 다락엘 가?"
"오랜만에 만났으니깐 그렇죠! 아무튼 저희 올라갈게요?"
"아서라, 네가 말한다고 듣냐. 꼴 보기 싫으니까 어서 올라가."
"흥, 그냥 알아서 주세요."
선화는 토라진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엔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선화는 내게 앞장서라고 이야기하고는 계단을 가리켰다.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계단은 낑낑 거리며 들어온 입구보다 더 폭이 좁았다. 나는 계단에 한 발을 올리고 선화를 바라보며 이거 무너지는 것 아냐하고 장난스레 웃으며 물었다. 그러다 주인장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황급히 계단을 올랐다. 생각보다 계단이 길지는 않아서 두 세 걸음 걸은 것 같은데 어느새 다락에 머리가 올라왔다.
다락은 생각했던 것보다 꽤 넓었다. 바닥에 얇게 다다미를 깐 것이 일본의 그것을 흉내 낸 것 같았다. 다락의 한가운데에는 적갈색의 4인 상이 놓여 있었는데, 상 주위로 동그란 방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락의 천장은 양쪽 끝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모양이었는데, 요즘은 보기 드문 뾰족한 세모 모양의 지붕을 가진 건물 때문이었다. 오른쪽 끄트머리에는 고타츠가 놓여있었다. 고타츠 덮개에 피카츄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니 어린아이의 것인 듯했다.
"야, 안 들어가고 뭐해?"
선화가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 나는 엉덩이를 맞은 것에 대한 놀람보다는 선화를 계단에 엉거주춤 서있게 만든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황급히 다락 위로 올라왔다. 급하게 올라오다 보니 천장에 머리를 쿵하고 박았다. 올라올 때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입구 쪽이 낮은 쪽 지붕이었다.
"머리 박았지?"
"응, 천장이 생각보다 낮네."
"여기 입구 쪽이 어두워서 천장 낮은 게 잘 안 보여서 그래. 나도 여러 번 박았어."
"여러 번?"
"응, 넌 그런 적 없어? 이상하게 똑같은 장소에서 계속 부딪히는 거. 난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
"문지방에 같은 발가락만 계속 찧이는 것처럼?"
선화는 내 말에 깔깔거리고 웃으며 바로 그거야!라고 외쳤다. 술에 취한 사람이 으레 그렇듯이 선화는 별 것 아닌 일에도 한참을 웃었다. 내가 멋쩍게 서있자 선화는 다시 한번 내 엉덩이를(이번에는 정말 세게) 찰싹 때리더니 다리 아프니까 빨리 올라가라고 재촉했다.
나는 얼른 계단을 올라와 선화가 올라오기 편하게 한쪽 구석으로 비켜섰다. 선화는 읏차 하는 소리를 내며 능숙하게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더니 가운데 있던 식탁을 치우고 구석에서 고타츠를 끌고 왔다. 선화는 고타츠에 달린 코드를 벽에 있는 콘센트에 꽂은 다음 다리를 쭉 펴서 고타츠 안에 넣었다. 두 팔로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뒤로 한껏 꺾더니 '하-' 하는 한숨을 쉬었다.
"아, 살 것 같다."
나는 목욕탕에서만 보던 감탄사와 대사에 웃음이 나왔다. 선화는 내가 킥킥 대고 웃자 뭐가 그렇게 웃기냐며 눈을 흘겼지만 이내 자기도 못 참겠는지 낄낄거리고 웃고 말았다. 한참 서로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사춘기 소년 소녀들처럼 웃던 우리는 밑에서 들리는 '안주 안 시키냐?' 하는 소리에 장난을 멈추었다.
"사장님이 조금 화나신 것 같은데.."
"아냐 원래 목청이 조금 크신 편이야."
선화는 별 것 아닌 듯 치부했지만 목청이 크다기에는 노기가 섞여 있는 듯해서 나는 신경이 쓰였다. 선화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에게 소주를 먹을 거냐고 물었다. 내가 그러자고 대답하자 선화는 다락 입구에 얼굴을 집어넣고 주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알아서 달라니깐요 아이참. 아부지! 그럼 우리 알탕 하나랑 소주 하나만!"
선화가 목청 좋게 주문했지만 밑에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나는 엉덩이를 내 쪽으로 내밀고 고개만 다락 입구에 처박고 있는 선화의 모습이 민망해 내가 내려가서 이야기할 테니 다시 와서 앉으라고 이야기했다. 선화는 들은 체도 안 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알탕! 소주 하나!"
"아 귀 안 먹었으니까 소리 그만 질러!"
"아부지가 대답이 없으니깐 그렇죠."
선화가 '히히'하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나는 민망해하면서도 자꾸만 선화 쪽으로 가는 시선을 멈출 수 없었다. 꿈틀거리는 욕망을 억지로 누르기에는 선화의 모습이 너무도 뇌쇄적이었다. 스커트가 살짝 올라가 스타킹 마감 부분이 보였다. 반투명 검정 스타킹의 유난히 더 진한 색의 끝부분이 내 피를 울컥울컥 아래쪽으로 힘차게 보냈다. 나는 고타츠 아래로 다리를 숨긴 다음 서둘러 선화를 불렀다.
"아, 따뜻하긴 하다 좋긴 좋네. 얼른 너도 이리 와."
"언제 들어갔어? 어때? 좋지?"
"응 좋네. 그런데 이건 왜 여기 있는 거야?"
"어렸을 때부터 너무 갖고 싶었거든. 인터넷으로 주문했었는데 방에 두려니까 너무 좁아서 답답한 거야. 그래서 허락받고 이리로 가져왔지."
"아버지한테?"
나는 이때다 싶어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선화와 하나도 닮지 않은 저 호랑이 같이 생긴 무서운 사람이 너희 아빠야? 하는 뜻을 담아 선화를 쳐다봤다. 선화는 잠깐 놀라는 듯싶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 사장님. 우리 아빠 아니야."
선화는 살짝 고개를 숙여 웃었다. 그 모습이 씁쓸해 보였지만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선화가 말을 이었다.
"그냥 내가 아빠라고 부르고 싶어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생각한 아빠의 모습이었거든. 좀 이상한가?"
"음... 아니, 나도 옆집 아줌마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했던 적이 있었어. 잔소리도 안 하고 마주칠 때마다 조그만 간식을 주셨거든."
내 말에 선화는 깔깔거리고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선화의 웃는 모습에 좋아진 기분을 감추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이야."
"진심?"
"응. 사춘기 때 거의 맨날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에이, 매일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좀 너무했다."
"뭐, 지금은 아니니까."
선화가 무엇인가 말하려고 할 때, 계단 오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입구에서 쟁반이 쑤욱-하고 올라왔다.
"아부지! 여기까지 갖다 줘야지 얼굴도 안보여주고 뭐예요!"
"아 지겨워 무슨 얼굴을 봐 보긴. 얼른 먹고 빨리 가!"
"에이 진짜 너무 하시네."
"너무하긴 니가 너무하다. 술 좀 작작 마셔!"
"알았어요. 알았어. 잔소리도 참."
사장은 선화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그대로 쿵쿵 발소리를 남기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그런 사장의 모습을 보고 선화에게 어떤 부분에서 아빠 삼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 물었다. 가게 들어와서부터 지금까지 본 사장의 행동들은 흔히들 원하는 '자상한 아버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목청이 크고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인, 전형적인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음.. 남자답고 듬직하고.. 거기다 자상하기까지 하니까."
선화가 사장이 두고 간 쟁반을 조심스럽게 옮기며 말했다.
"자상한 것과는 거리가 좀 멀어 보이시던데.."
"아냐. 얼마나 자상하신데."
"도대체 어디가?"
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묻자 선화는 싱긋 웃더니 쟁반을 가리켰다.
"이것 좀 봐봐."
쟁반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나베가 담긴 검은 솥과 어른 주먹 두 개를 합친 크기의 하얀 주전자, 앞 접시 두 개와 수저가 놓여있었다. 선화는 앞 접시 중 하나와 수저를 들고는 내게 보여줬다. 투명한 푸른색 앞 접시에는 작은 돌고래가 세 마리 그려져 있었다.
"이거, 내 전용 앞 접시다?"
선화가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 산 장난감을 자랑하는 표정을 지었다. 선화는 그릇을 들고 한 바퀴 빙 돌리며 찬찬히 바라보다가 나에게 내밀었다.
"돌고래네."
"응, 내가 여기 첨 왔을 때 엄청나게 취해가지고 아부지한테 장난 아니게 진상 피웠거든. 괜히 접시에 화풀이해서 이쁜 접시를 달라고, 접시가 왜 이리 칙칙하냐고."
"정말?"
"응. 그때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몰라. 보시다시피 여기 접시가 그렇게 못생긴 편이 아니거든. 아니 오히려 그냥 평범하다랄까, 딱히 모난데도 없고 너무 튀지도 않고 보통이지. 그러고 한 2주 정도 있다가 또 여기에 왔는데, 처음에는 나를 못 알아보시나 할 정도로 대하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내 자리에 세팅을 할 때 이 돌고래 접시를 탁- 놓으시더니 ‘니꺼다!’ 이러시는 거야."
"그걸 기억하신 거야?"
"응. 그다음 날 바로 시장 갔다가 사 오셨대."
"흠. 보통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나는 '술 취한 진상 손님의 컴플레인 아닌 컴플레인을 신경 써서 듣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큰일 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에둘러 말했다. 다행히 선화는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누가 술집 진상 손님이 한 말을 신경 쓰겠어? 그것도 만취한 사람이 아무 말이나 하는 건데. 암튼 그 이후로도 계속 이 집에 단골로 왔었어. 거의 매일."
"매일?"
"응, 매일. 그때는 술 없이는 힘들었거든."
나는 선화에게서 동창회 날 보았던 그늘을 다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선화의 얼굴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캐물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선화의 얼굴에 내린 그늘이 너무 짙었다.
"뭐 어쨌든, 자주 오다 보니 단골이 됐어. 이것 봐 봐. 내가 젓가락질 힘들다고 투덜댔더니 포카락 사 오신 것 있지?"
선화가 손에 쥔 수저를 자랑스럽게 들었다.
"진짜 포카락이라니 웬 말이야. 이거 우리 초딩때 나오지 않았나? 아직도 있을 줄 몰랐어 진짜. 시장에서 사셨대. 그래 놓고서는 꼭 젓가락 같이 주시는데 이유가 뭔 줄 알아? 나중에 시집가려면 젓가락질도 할 줄 알아야 상견례 때 큰일 안 난다고. 진짜 웃기지 않아?"
"뭐.. 젓가락질 못하면 좀 그렇긴 하지."
"뭐? 정말 그렇게 생각해?"
선화는 내 대답에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노려봤다. 나는 아차 싶어 아니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고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선화가 깔깔거리고 웃는 바람에 입을 꾹 다물게 됐다.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순덕이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아무튼, 이렇게 포카락까지 사다 주셨어 내 전용으로. 거기다 또 있어."
선화가 말을 마치고 하얀색 주전자를 조심스럽게 들어 내 앞에 가져다 놨다. 내가 이게 뭐냐고 묻자 선화는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라고 했다. 조심스레 뚜껑을 열자 가지런하고 수북하게 쌓인 오이가 둥둥 떠 있었다. 코 끝으로 전해지는 희미한 알코올 향이 없었더라면 '오이 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소주 냄새가 옅었다.
"이게 뭐야? 오이?"
"응, 오이 소주야. 나 술 많이 마신다고 소주 시키면 항상 이렇게 오이를 썰어서 넣어주셔. 한 번 마셔볼래?"
선화가 주전자를 들어 내 잔에 따라주었다. 투명한 내 잔에 비해 속이 비치지 않는 도자기 잔을 보니 아마 저 잔도 선화의 전용잔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향이 좋은데?"
"그렇지? 자, 한 잔 하자고"
짠 하고 잔을 부딪힌 우리는 거의 동시에 잔을 내려놓았다. 오이 특유의 향이 코를 통해 들어오다 목 끝에서 희미하게 알코올 향으로 변하는 맛이 독특했다.
"어때?"
"되게 신기한 맛이네. 순하고."
"그렇지? 아부지 자상하지? 근데 문제는 네 말대로 순하고 잘 안 취해서 한 병 먹을 거 두 병 먹고 간다니깐. 어휴."
선화는 배시시 웃으며 내 잔과 자기 잔에 소주를 따랐다. 선화의 말대로 이 정도라면 나도 꽤 마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거푸 술잔을 들이켜자 선화가 나베도 좀 먹어보라고 권했다. 맛있어 보이는 기름이 둥둥 뜬 국물을 수저로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왔다. 혀 끝에서 느껴지는 청양고추의 매콤한 향이 느끼한 맛과 어우러져 깔끔하게 목으로 넘어갔다. 내가 정말 맛있다고 말하자 선화는 마치 자기가 요리한 것처럼 기분 좋게 웃었다.
어두컴컴한 다락방에 선화와 둘이 있으니 분위기가 묘했다. 도마를 두드리는 희미한 칼질 소리만 아니었다면 선화와 둘이 외딴 펜션에 놀러 온 연인 같은, 기분 좋은 착각에 빠졌을 것 같았다. 우리는 술 주전자 한 동이를 금세 비우고 소주 하나를 더 시켰다. 사장은 '술 좀 작작 마셔 기지배야!'하는 호통 아닌 호통을 치며 역시나 손만 쑥 뻗어 다락 입구에 주전자를 놓고는 얼굴도 비추지 않은 채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퉁명스러운 말과는 달리 주전자 안에는 여전히 새파란 오이가 가지런히 썰려 있었고, 나는 비로소 사장이 자상하다는 선화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으 이제 꽤 취한다."
"그러게. 역시 소주는 소주인가 봐."
새로 시킨 소주의 주전자의 목을 90도로 꺾을 정도로 술을 비운 우리는 알딸딸한 기분으로 숟가락을 자꾸만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사람 대 사람으로 이렇게 오붓하게 술을 마신다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다시피 한 나로서는 이제야 사람들이 왜 그렇게 주말만 되면 술자리를 찾는지 이해가 됐다.
"한 병 더 마실래?"
"아니, 더 마시면 집에 못 갈 것 같아."
"못 가면 여기서 자고 가면 되지."
"여기서?"
"응. 나 술 마시고 여기서 잔 적 많은데?"
"사장님이 허락하셔?"
"당연하지, 딸이 잔다는데 허락 안 할 아버지가 어딨어?"
선화가 낄낄대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래도 남의 가게에서 잔다는 사실이(아무리 가족 같은 기분이 들어도) 이해가 되질 않아 선화에게 물었다.
"에이, 그래도 가게에 다른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해. 사장님 가족들이라던지..."
"괜찮아 올 사람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부지도 나 밖에 없거든."
"가족이 없으셔?"
"있었지. 지금은 없어. 딸이 있었는데 돌아가셨대. 그 이후로 사모님과는 서먹해지다 이혼. 지금은 혼자 셔."
"딸이 몇 살이었길래..."
"나보다 한 살 어렸대. 벌써 몇 년 됐을걸.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갔는지는 몰라 나도. 그런 것은 물어보기도 힘든 질문이고 구태여 기회가 오더라도 여쭤보고 싶지 않아. 꼭 그런 것을 알아야만 사람 사이의 유대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잖아? 누구나 하나쯤은 말하기 싫은 것이 있을 거고."
선화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전자를 들었다. 주전자를 아무리 꺾어도 술이 나오질 않자 선화는 뚜껑을 열어 술에 바짝 절여진 오이를 포카락으로 푹 찍어서 오물거리며 씹었다.
"술 정말 더 안 해?"
"응. 이미 많이 마셨어."
"아쉽네."
선화가 입맛을 다시며 다시 오이를 찍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손에 잡힐 만큼 술기를 머금은 오이는 만만하지 않았다. 이리 찍고 저리 찍어도 뭉그러지기만 할 뿐 잡히는 것이 없자 선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선화의 그런 모습마저 귀엽게 느껴지는 나 자신을 보며 무언가 단단히 홀리긴 홀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수저를 들어 물컵에 휘휘 저은 다음 선화의 포카락을 피해 도망친 오이들을 한 움큼 퍼서 선화의 입 앞에 잡아왔다. 선화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더니 입을 크게 벌려 내 숟가락을 합 하고 삼켰다.
"고마워."
"별말씀을."
"우리 간접키스네?"
"응?"
"간접키스잖아. 네 숟가락이니까."
선화가 낄낄 거리며 내 숟가락을 가리켰다. 나는 얼굴이 발개지는 것을 느꼈다. 간접키스라니, 중학교 때 들어본 이후로 처음 들어보는 단어가 나이 서른을 코 앞에 둔 남자를 이렇게 까지 수줍게 만드는 것을 보니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을 또 하나 발견하게 된 셈이다.
"장난이야 장난. 너무 놀려서 미안."
"아냐 괜찮아."
"너랑 있으니까 되게 편하다. 재밌구.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친하게 지내는 거였는데 말이야. 그땐 내가 용기가 너무 없었어."
선화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선화가 말한 용기라는 말에 중학교 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확실히 어른 아이 때의 기억은 희미해질지언정 사라지진 않는다고 생각하며 선화에게 말했다.
"괜찮아. 그때의 나에게 말을 걸 수 있을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야."
이번에는 내가 오이 무더기를 한 움큼 입속에 넣고 씹었다. 간접키스라는 선화의 말이 신경이 쓰였지만 멋쩍은 지금 상황을 버티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씹을 것이 필요했다. 차라리 아까 선화의 말대로 술을 한 병 더 시켰으면 좋았을 것을.
"나한테 말만 걸어도 민수네 애들이 괴롭히거나 놀렸을 것이 뻔했으니까. 괜찮아.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이다 하고 생각..."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선화는 손을 들어 내 입을 막았다. 놀라서 선화를 보니 어쩐지 화가 난 얼굴이었다. 선화는 큰 목소리로 소주 하나만 더 주세요 라고 소리치고는 내 입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나를 노려봤다. 침묵은 꽤나 길었다. 아래층에서 들리던 통통 도마를 울리던 칼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삐- 하는 주전자 끓는 소리가 정적을 잠시 깼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조용해졌다. 선화는 여전히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 곰곰이 생각했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오이를 썰어주시지 않는 걸까'하는 잡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선화가 침묵을 깬 것은 사장이 조심스럽게 쟁반 위에 주전자 두 개를 올려 다락 입구 쪽에 놔둔 시점이었다.
"저것 좀 갖다 줄래?"
선화의 말에 나는 곧바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뜨거운 피가 다리 쪽으로 흐르며 저릿저릿했다. 쟁반을 들고 보니 주전자 하나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아까 들은 삐- 하는 소리의 정체가 이 주전자 끓는 소리였구나 싶었다.
"보리 꿀차야."
"보리 꿀차가 뭔데?"
"보리차에 아카시아 꿀 섞은 거. 나 술 많이 마시는 날이면 해주시는 건데 한 병 더 시켰더니 같이 주셨나 보네."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니 은은하게 보리와 꿀의 향이 났다. 선화는 다른 주전자를 집어 들어 내 잔과 선화의 잔에 따랐다. 엉겁결에 술을 받은 나는 황급히 보리 꿀차가 든 주전자를 내려놓고 잔을 받았다. 선화는 내가 잔을 받자 곧바로 잔을 부딪히더니 순식간에 고개를 꺾어 잔을 비워버렸다.
"소주가 아니네?"
내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하자 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케야. 온나나카세라는."
"온나나카세?"
"응. 여자를 울리는 술이라는 뜻이야."
"무슨 술 이름이 그래? 맛은 있는데..."
정말이었다. 오이소주도 그냥 마시는 소주에 비해 훨씬 품격 있다는 느낌이 드는 맛이었는데 이 온나나카세라는 요상한 이름을 가진 사케는 아예 다른 술이었다. 목을 미끄러지듯 넘어가는 술의 감촉과 꽃향 비스무리한 단내가 입안을 즐겁게 했다. 나는 술을 꽤 마셨음에도 한 잔 더 먹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술병을 바라봤다.
"맛있지? 여자를 옆에 두고 이 술을 마시면 술만 마시고 여자는 본체 만체 해서 여자를 울리는 술 이래. 지금 너처럼."
선화가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나는 속마음을 들킨 것이 민망해서 슬며시 술병에서 시선을 뗐다.
"그런데 다른 뜻도 있어."
"무슨 뜻인데?"
"여자의 눈물을 담아서 만든 술이라는 뜻. 나는 개인적으로 이 뜻이 더 맘에 들어."
"왜?"
선화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내가 물끄러미 선화를 바라보고 있자 선화는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더니 조용히 잔을 내밀었다. 우리는 말없이 건배를 하고 이번에도 한 번에 잔을 비웠다. 은은한 단내가 입안을 맴돌았다. 나는 확실히 이 정도라면 여자를 소홀히 할 것 같다는 것과 한편으로는 선화의 눈물은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우선은 미안해."
"응?"
"나는 그런 의미로 용기가 없다고 한 게 아니었어."
선화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민수네 애들한테 괴롭힘 당하는 건 알고 있었어. 그치만 나는 그래서 너에게 친해지자고 말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야."
"그럼?"
"나는 네가 멋있다고 생각했어."
나는 예상치도 못한 선화의 대답에 할 말을 잃은 채 입만 벙긋거리다 술잔을 잡았다. 선화는 자연스럽게 내 잔에 술을 따라주었고 나도 자연스럽게 술잔을 비웠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말이고 앞으로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말인데..."
"정말로, 나는 그때의 네가 멋있다고 생각했어."
"대체 왜?"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선화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넌 꿈이 있었으니까."
"꿈?"
"응. 넌 애들이 괴롭혀도 포기하지 않았잖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나는 정말로 선화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되물었다. 꿈이라니, 그 시절에는 꿈같은 것은 꾸지도 않고 살았던 것 같은데 막상 선화의 입에서 꿈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정말 꿈같은 것을 꿨는지 가물가물하다.
"그림... 민수가 아무리 널 괴롭혀도 그림 포기하지 않았잖아."
"아..."
"나는 그런 네가 멋있다고 생각했어. 정말이야. 괴롭고 힘든 상황에서도 절대 놓지 않는, 몸은 부서져도 영혼은 절대 뺏기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눈빛. 그래 넌 그때 그런 눈을 하고 있었어."
"그건 너무 과한 칭찬인데 그런 것 아니야."
"아냐. 그때 내가 본 너는 그랬어.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어. 나라면 절대로 그렇게 못했을 거고, 실제로도 못했으니까. 그런데 너라는 애를 보면서 힘을 많이 냈어. 미안해. 너의 힘든 상황을 보고 힘을 냈다고 해서. 그런데 내가 너보다 나은 상황이라서 너를 동정하거나 연민했던 것이 아니야. 말 그래도 너를 보고 힘을 냈어. 절대로 꺾이지 않는 신념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나보다 강한 상대방이라고 해도 절대로 굽히지 않는 하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눈은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힘이 돼."
선화가 말을 멈추고 자기 잔에 술을 따랐다. 나는 말없이 내 잔을 선화에게 내밀었다. 선화는 내 잔에도 똑같이 술을 따라주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잔을 들어 술을 비웠다. 먹먹한 감정이 단내를 풍기며 목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한 적 없었는데. 내가 멋있다거나 누군가에게 힘을 줄 정도로 열심히 살았거나 하는 그런 생각들."
"적어도 나에게는 강하고 멋있는 사람이었어 너는."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
"진짜야.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그때 말이라도 걸어볼 걸, 친하게 지낼 걸 하는 생각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러다가 동창회 때 너가 나온다니 얼마나 반가웠는 줄 알아? 게다가 아직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어. '역시 얘는 끝까지 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동안 나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에 비하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좌절감도 들고. 그래도 무엇보다 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를 보고 또다시 힘을 낼 수 있겠다는 사실이 참 좋더라."
선화에 말에 나는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성공을 치장하는 것에 대해 느끼는 겸손의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사실과 다르게 나를 이해하고 있는 선화의 착각과 오해에 느끼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이었다. 선화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대단한 사람은커녕 자기 일에 대해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 앞가림조차 하지 못하는 팔푼이일 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내 성격에 차분하게 내 심정을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이 내 세계를 밖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지금이나 그때나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은 그림밖에 없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세계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거장들처럼 거창한 작품을 만들거나 유파를 만들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사람들이 평범하게 대화하는 것을 못하는 나로서는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유일한 대화였다. 사과를 맛있게 먹었으면 사과를 그렸고 판타지 영화를 재밌게 봤으면 영화 배경을 모방해 그린 다음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나를 대변하는 조연을 그려 넣었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좋아해서 일러스트를 따라 그렸을 뿐이고, 그게 직업이 됐을 뿐이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나는 십 년도 더 전에 일이 꼬여버렸지만 지금이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된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혔다. 나의 학창 시절 아이돌이 나 따위를 정신적 지주로 삼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길로 빠져있는 모습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선화야. 네가 오해가 있는데, 난 그냥 이것밖에 할 줄 모르는 것뿐이야. 그리고 지금 하는 것도 있잖아."
"잠깐."
다급하게 이야기하는 나를 선화가 제지했다. 이제껏 선화가 내 말을 끊으면 잠자코 있었지만 이번만은 양보할 수 없어서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이 바닥에서 어떤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고 변변하게 취업을 한 것도 아니어서 하루 벌어서 하루 먹을 뿐이야. 네가 생각한 것처럼 내가 꿈을 좇는 것도 아니고, 이게 정말 어디서부터 오해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순덕아 잠깐만."
선화가 한번 더 내 말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있었다.
"그날도 봤잖아. 김민수한테 아무 말도 못 하고 얻어맞기만 하고. 너 아니었으면 진즉에 집에 갔어. 아, 너 때문에 집에 못 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랑 좀 더 있으려고 2차를 간 거라는 말이야. 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아무튼 난 그래. 너 말대로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중학교 때 괴롭힘 당하던 권순덕이라는 인간이 질리지도 않았는지, 10년 넘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그때의 권순덕으로 살아왔던 거야."
선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잠시 쳐다보다니 한숨을 푹- 쉬었다. 검지 손가락으로 술잔의 모양을 따라 빙글빙글 돌리더니 온나나카세가 든 주전자 대신 보리꿀차가 든 주전자를 들었다. 선화는 내 잔에도 차를 따라주고는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호호 불어가며 차를 마셨다. 나는 원래 차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하얗게 올라오는 김에 섞인 단내가 입가에 침을 고이게 만들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단 것이 당기는 모양이었다. 살짝 뜨거운 술잔을 잡고 조심스럽게 불어가며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보리차도 꿀차도 아닌 오묘한 맛이었다.
"맛있지?"
"응. 신기한 맛이네."
"그치. 술 먹고 먹으면 진짜 맛있어. 속도 풀리고."
"그러게. 이렇게 챙겨주시고.. 정말 자상하시네."
"그치? 자상하시다니까 내가 말했잖아."
"그러게."
"순덕아."
"응?"
"다시 말하지만 미안해. 그때 내가 도와줬어야 했는데 비겁했어. 근데 정말 내가 널 보고 용기를 낸 것은 사실이야. 네가 어떻게 생각하던지 너를 보고 내가 힘을 낸 것만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니까 믿어줬으면 좋겠고, 너도 너무 너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네 꿈 이루길 바라. 너만은 꼭 빛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변하지 말고. 부탁이야."
나는 선화의 말이 어딘가 위화감이 있었지만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존재라고 말하기에는 선화의 눈이 너무 애절했다. 내가 알겠다고 하자 선화는 그제야 안심한 듯이 웃었다.
"약속한 거다?"
"아니 약속이랄 것까지는..."
"아니. 약속해야 돼."
"알겠어."
"고마워."
나는 대화가 점점 이상해진다고 느꼈다. 도대체 선화는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런 약속을 강요하는 것일까? 도대체 뭐가 고맙다는 것일까? 나는 이 의문을 풀지 않고서는 선화의 깊은 곳에 숨겨둔 그늘의 정체를 밝혀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선화야. 나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선화는 내가 '약속'을 하자 긴장이 풀어진 사람처럼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여름날 토요일 오후 네 시에 소파에 누워 가만히 에어컨을 쐬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한가롭게 쉬고 있는 사람의 평온을 에어컨 스위치를 꺼버림으로써 깨트리고 싶은 악취미는 없었지만 지금은 자리에 앉혀 놓고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다.
"너 무슨 일 있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선화의 표정이 순간 잠을 방해받은 사람처럼 짜증스럽게 변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모습조차도 예쁘다는 생각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내야 했다. 어렵게 꺼낸 말이기에 원하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미묘하게 깔린 선화의 표정을 보며 오늘은 기필코 저 그늘의 정체를 밝혀내리라 하는 어떤 사명감이 솟았다.
"옛날이랑 많이 달라서. "
"뭐가?"
"어... 뭔가 콕 집어서 이야기하기는 그런데."
"괜찮아. 말해봐."
"뭐랄까. 예전에는 더 밝은 느낌이었달까, 좀 활력 있어 보이고 음... 그렇다고 지금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예쁘지만 그 전에는 좀 더 화사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칙칙해?"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미안 아무래도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횡설수설하네. 술까지 마시니까 더 그런가 봐. 못 들은 걸로 해줘."
처음 시작과는 달리 나는 황급히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화의 기분을 생각하며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평소보다 더 횡설수설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이제껏 다른 사람과 단 둘이서 진지한 이야기를 한 경험이 전무한 나로서는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며 원하는 답을 끌어낼 수 있는 대화법을 알 리 만무했다.
생각해보면 선화와 거의 둘 밖에 없는 공간에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편하게 느꼈던 것은 단지 선화가 이야기를 주도했기 때문이고 피를 타고 흐르는 알코올이 쓸데없는 용기를 북돋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진실이었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이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래. 칙칙할 수 있지 사람이."
"아니 난 정말 그런 의도로 이야기한 게 아니라..."
"뭔가 예전같이 상큼 발랄하지 않지?"
선화가 배시시 웃으며 CF모델처럼 머리를 휙 넘겼다. 선화의 왼쪽 귀에 꽂힌 피어싱이 반짝하고 빛났다. 머리카락으로 항상 귀를 가리고 있어서 몰랐는데, 꽤 많은 피어싱이 귀에 박혀 있었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선화가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 말 네가 처음이 아니니까 괜찮아. 사실 꽤 자주 그런 말 들어. 어딘가 변했다는 말. 특히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중에서도 감이 예리한 친구들한테 듣는 말인데. 역시 순덕이 너는 예술을 하니까 바로 알아보는구나."
"아니 예술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 까지는 없는데..."
"에이, 약속했잖아."
선화가 웃으며 내 말을 끊었다. 나는 아까 선화와 했던 약속이 기억나 사족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예술이라는 단어가 주는 불편한 압박감이 몸을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네 말이 맞아. 많이 변했지. 특히 네 기억 속의 최선화는 앞으로 있을 일에 100만 분의 1도 안 되는 짐을 지고는 힘들어 못 버티겠다고 하는 어린 여자애였으니까."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있었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음... 오늘은 말고 다음에."
"왜?"
"오늘은 술도 많이 취했고... 오랜만에 이렇게 편하게 친구랑 술 마시는데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다음에 말해줄게 다음에."
내가 몇 번 더 졸랐지만 선화는 '다음에'를 반복했다. 내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자 선화가 괘씸하다는 듯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래도 너니까 다음에 이야기해준다고 말하는 거야. 나 누구한테 이런 이야기 한 적 없거든."
"정말?"
"그래. 나도 십몇 년 만에 만난 학교 동창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 뭐, 그만큼 네가 편해서 그렇겠지? 네가 편한만큼 좋은 사람이길 바라."
선화가 찻잔을 들어 호로록 소리를 냈다. 내가 그만 내려가서 계산하고 가자고 말하자 선화는 여기서 자고 가겠다며 나에게 큰길로 나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늦었으니까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고 이야기하자 선화는 늦었으니까 여기서 자고 가는 것이라며 완강히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핑- 도는 취기를 느끼며 혼자서 계단을 내려왔다. 카운터 옆에서 호랑이를 닮은 사장이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흔들어 깨우기는 뭐해서 헛기침을 몇 번 하니 사장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계산하겠다고 말하니 사장은 가래 끓는 목소리로 쟤가 이미 했어 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도대체 언제 선화가 계산을 했는지 몰라 곰곰이 머릿속을 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 속의 선화는 계속 나와 같이 있었다. 내가 우두커니 서 있자 사장이 이상한 사람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민망해진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가게 문을 나섰다. 선화가 알려준 대로 큰길을 찾아 걸어가는 와중에 선화가 한 말이 귀에서 계속 맴돌았다. 편한만큼 좋은 사람이길 바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선화에게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가슴이 따땃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