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람이라... 재밌네."
김민수는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네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어. 덕구야, 너나 최선화 같은 인간이랑 나랑은 전혀 같지 않아. 사람들은 눈코입 똑같이 달려 있다고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저엉말 큰 착각이야. 그래,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너희 같은 사람들이 맹신하는 격언이 하나 있지.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아니야 덕구야. 이 세상에 공평한 것 따위는 없어. 너의 한 시간과 나의 한 시간이 똑같을까? 이렇게 생각해보자. 너랑 내가 똑같이 한 시간이 걸리는 길을 간다고 치자. 너는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걸어서 그 장소에 도착해야 해. 반면에 나는 기사가 딸린 최고급 독일제 플래그쉽 세단을 타고, 가는 길에 책을 읽으면서 배가 고프면 냉장고에서 오늘 아침 셰프가 최고급 식재료로 만든 샌드위치와 탄산수를 마시지. 그리고는 웬만한 호텔 침대보다 푹신한 시트에 몸을 파묻고는 한숨 자는 거야. 그러다 보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목적지에 도착해 있지. 헐레벌떡 갖은 에너지 소비를 다 하면서 도착한 너와, 한 시간 동안 에너지를 보충하면서 이동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도착한 나와 어떻게 같은 시간을 소비했다고 볼 수 있겠니?"
타이르듯 나에게 이야기하는 김민수의 표정은 마치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고 나무라는 듯했다. 궤변이다. 김민수의 말은 철저히 궤변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나름의 논리가 있어서 나는 반박할 말을 쉽게 찾지 못했다. 내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자 김민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해는 가는데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네. 하지만 받아들여야 해. 너의 1분과 나의 1분은 가치가 다르다니까?"
"그럼 네 말은 대기업 고위직 간부나 국회의원 같은 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거야?"
나는 일부러 '나 같은 사람들'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렇지. 그게 당연한 거지. 가끔 보면 사람들은 착각을 해. 인간을 동물이라고 말하면서도 마치 자기들은 자연법칙에 적용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니까? 인간도 똑같이 먹이사슬에 영향을 받아. 다만 특이한 것이 같은 종끼리 먹이사슬이 얽혔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지 예외는 없어. 하급 계층이 상급 계층에게 먹힌다. 서민계층이 상류층을 위해 일한다."
"무슨 그런 억지가 있어?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 해도 말이야.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산다고. 천민자본주의라고 불릴 정도로 사람들의 돈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을 하지만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대통령도 바뀌지 않을 테고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네 말대로 노예처럼 살다 죽겠지."
"재밌는 말을 하네. 대통령을 바꾼 게 너의 힘인 양 말하는데, 착각하지 마. 바뀔 시점이어서 바뀐 거지 결코 너의 힘으로 바뀐 게 아니니까. 너 같은 애들이 국가 단위로 있어도 그 자리 마음대로 못 바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하네."
나는 김필수의 말에 비웃음으로 대답했다. 나를 깔아보는 것에 대한 분노와 오기가 섞인 일종의 도발이었지만 김필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는 것으로 내 비웃음을 털어버렸다.
"아는 만큼 보이는 거니까."
"그래 좋아. 네 말대로라면 나한테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이유가 뭔데? 네가 그리 잘 나가는 샐러리맨인 것은 이제 잘 알겠어. 근데 그게 죽은 사람의 집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샐러리맨'에 힘주어 말했다. 나의 말에 이번에는 김필수가 반응했다.
"김민수가 왜 널 그렇게 싫어했는지 알겠다."
김민수가 내게로 한걸음 다가섰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오만하고 차가운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사람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 알아? 7년이야. 7년. 나는 평생 사람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될 줄 몰랐어. 내가 그간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너 같은 애들은 꿈에서조차 알 수 없을 거야. 널 봐.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세 가지고. 그 알량한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상처 입을까 봐 그렇게 날을 세우고 덤벼드는 꼴을 보라고. 상대가 누군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눈이 뒤집혀서 그렇게 달려드니 강자 입장에서는 열이 뻗치지. 말 좀 듣나 싶을 때 꼭 한 번씩은 개기니까 말이야."
나는 김필수의 말에 발끈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김필수는 김민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김민수처럼 덩치도 크지 않고 김민수처럼 인상이 사납지도 않았다. 오히려 허여멀건 얼굴이 나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 정도라면 내가 주먹을 날리면 쓰러지지 않을까, 저 재수 없는 눈빛을 겸손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코를 때리면 부서져 버릴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지나가며 나는 주먹을 김필수에게 뻗었다.
그러나 '퍽'하는 타격음은 김필수가 아니라 내 얼굴에서 터졌다. 축축한 것이 코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닦아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 끈적끈적한 피가 입술을 타고 턱 끝으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쉽지 않지?"
김필수가 웃으며 말했다. 김필수 옆에 나를 때린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서 있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머리에 나른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는 검은색 양복차림에 타이는 하지 않은 차림새였다. 옷을 회사원처럼 갖춰 입었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후줄근한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괜찮아? 피가 나는데."
김필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 피를 닦을만한 것을 찾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코피가 터진 주인공이 옷깃으로 피를 슥- 닦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다. 이 축축한 피를 옷으로 그냥 닦아내 버리는 것은 마치 바퀴벌레를 손바닥으로 꾹 찍어 눌러 죽이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피라는 것이 내 몸안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하고 살지만 막상 그것이 몸 밖으로 나와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 더럽고 불결하다. 그것이 아픈 와중에도 옷으로 피를 닦아내지 못하는 이유다.
"자, 이걸로 닦아."
김필수가 품 안에 손을 짚어 넣더니 나에게 무엇인가를 휙 던졌다. 나는 갑자기 뭔가 날아오자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것은 빠르게 날아오다 도중에 펄럭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이 뭘 또 그걸 피하고 그래. 어서 닦아. 비싼 거다 그거?"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고 보니 손수건이었다. 회색에 끄트머리만 주황색으로 포인트가 된 고급스러운 재질의 천으로 만든 것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수건을 코에 갖다 대었다. 코가 욱신거리면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굳이 엑스레이를 찍지 않아도 뼈가 부러졌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피가 많이 나와서 손수건이 금방 축축해졌다. 주르르 흐르는 핏물을 거슬러 손수건에서 싸구려 남자 향수 냄새가 콧속을 자극했다.
"어이구 피가 많이 났네. 이 실장, 애를 왜 그렇게 세게 때렸어? 덕구야 그거 안 돌려줘도 되니까 양껏 닦고 너 써."
김필수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나는 뭐라고 맞받아치고 싶었지만 코에서 피가 계속 흐르는 탓에 숨쉬기에 급급했다. 김필수는 이래서야 무슨 대화가 안 되겠네. 우리 덕구가 물어보고 싶은 게 참 많을 텐데 말이야. 오늘 마침 여유가 있으니 조금 기다려줄게라고 말하더니 '이 실장'을 시켜 의자를 가져오게 했다. 이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화의 시체 바로 옆에 있는 화장대에서 조그만 간이 의자를 번쩍 들어 올려 김필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내가 피를 닦는 사이 오후 일정과 관련한 이야기를 꽤 오랜 시간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