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그 날의 이야기

by starka

"자, 덕구야 좀 괜찮니? 치료는 나중에 병원에 가서 하고 이야기나 마저 할까? 이제 더 기다려줄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아, 치료비도 챙겨줄 테니까 걱정 말고."


"너 뭐야 대체?"


"응? 뭐가?"


"뭔데 그렇게 사람을 무시하고, 때려놓고서는 그렇게 당당해? 너 감당할 수 있겠어? 경찰 부르고 언론에 제보하면 힘들 텐데?"


나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도가 지나쳤다. 사람을 죽이고,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저렇게 당당한 표정과 태도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게다가 김필수의 말에서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것을 덮을 수 있기 때문에 당당하다기보다는 자신의 행동 자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김필수는 내 말에 대답이 없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김필수가 직접적으로 선화를 죽였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녹음기가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그래도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 나중에 증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걸고 나는 김필수에게 선화를 죽인 것이 너 맞냐고 물었다.


"응 맞아. 내가 죽였어."


나는 김필수가 검사 앞에 선 피고처럼 요리조리 대답을 회피하며 확답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김필수는 싱겁게도 자신이 선화를 죽였다고 단박에 시인하고 말았다.


"뭐?"


당황한 나의 대답에 김필수는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죽였다고. 아, 원래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김필수가 의자에 앉은 채로 다리를 꼬며 말했다. 자, 내가 죽였으니 이제 어쩔 건데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죽인 게 맞다고?"


당황한 내가 재차 묻자 김필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덕구야. 당황스럽겠지. 사람이 죽었으니까. 또 그 사람이 네가 남몰래 짝사랑하던 애고, 그 애를 죽인 범인이 네가 되게 생겼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 애를 죽인 사람이 나라고 하니까. 게다가 당당하게 내가 죽였다고 말하니까 할 말이 없겠지. 이해해. 그냥 내가 설명을 해줄게. 응? 중간에 듣다가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말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으면 얼마든지 대답해줄게. 알았지?"


김필수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만한 눈빛으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채 어리바리한 신입사원을 대하는 부장처럼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반창회가 있던 날, 나와 김민수 패거리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아이들이 옛 추억에 젖었다. 그중에는 김필수도 끼어 있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은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 특성이 있다. 그 앞에는 돈이 얼마가 있는지 지위가 높고 낮은 지는 중요하지 않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그 기억에 휩쓸려 한동안 현재와 동떨어져 표류하던가 아니면 잠시간 추억을 음미한 뒤 다시 현재를 살아가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에 해당한다. 아무리 그들이 과거에 젖어 있고 싶어 해도 시간이 용납하지 않는다. 언제나 앞으로 흐르는 시간은 출근이나 육아, 낮과 밤 따위의 것들로 우리의 등을 떠민다.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사치라는 듯이.


하지만 김필수와 김민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과거에 남아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는 과거의 최선화를 쫓고 있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빛이 바래버린 그녀였지만 우리는 각자 다른 식으로 선화의 흔적을 더듬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김민수도 선화에게 연락을 했다. 나와 다르게 김민수는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았다. 밤 12시나 새벽 1시쯤 술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김필수의 말에 의하면) 김민수는 선화가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냈다. 선화는 김민수의 한없이 끈적거리는 연락에 지쳐만 갔다. 김민수도 선화의 태도에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전까지는 자신의 배경과 외모, 거침없는(상대에 따라서는 예의 없는) 리드로 여자들을 꼬셨지만 선화는 자신이 어필하는 매력 중 어느 하나에도 휘둘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김민수는 더 필사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선화에게 최대한 많이 자신을 노출시키는 일이었다. 일부러 선화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회사 근처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주말에 하루 종일 선화의 집 주변 카페에서 죽치고 있기도 했다. 물론 메신저와 전화 역시 꾸준히 했다. 그렇다면 선화가 내게 내내 말하던 누군가 쫓는 듯한 느낌은 김민수를 말하는 것이었을까? 김필수는 아니라고 대답해주었다. 김민수는 그렇게 선화를 한 일주일 쫓아다니다 포기했다고 했다. 김민수의 연락과 우연을 가장한 만남에 지친 선화가 한 번만 더 그러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니 선화의 면전에 대고 ‘씨발년 비싸게도 구네’라고 욕을 했다고 한다. 아마 그렇게 하면 선화가 무서워하며 잘못했다고 빌기라도 할 줄 알았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하던 일이기도 하니 김민수로서도 차라리 잘됐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호감을 얻고 유대관계를 쌓아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보다 힘으로써 상대를 굴복시켜 얻어내는 편이 훨씬 효율적인 일이니 말이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중학생 시절 김민수의 그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선화에게 말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비열한 미소는 얼마 안가 일그러졌을 것이다. 그런 싸구려 협박이 먹히기에 선화는 너무 무거운 것을 안고 있었다. 김태식에 비하면 김민수의 1차원적인 협박은 귀찮은 수준이었다. 선화가 휴대폰을 들어 112를 누르고 통화음이 울리는 사이 김민수는 나지막하게 씨발이라고 중얼거리며 자리를 떴다. 그 이후로 김민수가 선화에게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선화가 느낀 시선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여기 있는 김 실장이야."


김필수가 웃으며 나를 때린 사내를 가리켰다. 나는 의아한 생각에 이 실장이 아니라 김 실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고 중얼거렸다. 내 혼잣말을 들은 김필수는 아까보다 조금 더 밝게 웃으며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내가 시켰어. 불안하게 좀 만들라고."


"그게 무슨 말인데?"


"말 그대로야. 내가 최선화 주변을 맴돌면서 불안하게 만들라고 시켰다고. 누가 날 지켜보고 있다, 누가 아무도 없는 사이에 나를 어떻게 할 것 같다 이런 느낌을 주는 거지. 그런데 그게 누군지는 알 수 없고, 시선은 느껴지고. 사람은 말이야, 생각보다 약해서 이런 정신적인 부분을 건드리면 금방 무너진다고."


김필수가 둘째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나는 그제야 선화가 이야기한 시선의 정체가 김필수의 지시를 받은 김 실장(때로는 이 실장이 되기도 하는)이었음을 알았다.


김필수가 선화에게 접근한 것은 동창회가 있은 후 2주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김필수가 선화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선화가 먼저 김필수에게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간단히 웹사이트에 대한 질문이었다. 선화가 김필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동창회 때 김필수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동창회 때 내가 밀려나듯 선화의 테이블에서 나온 사이 선화와 김필수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술이 들어간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이 자연스럽게 서로 입이 터졌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서로 다니는 회사에 대한 이야기, 주로 하는 업무에 대한 이야기, 주말에는 주로 무엇을 하는지, 저녁에 자기 전에 맥주를 마시는지 같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 이후로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다가 휴대폰 알림을 확인하더니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황급히 택시를 잡았다. 김필수는 처음에는 선화가 쫓기듯이 일어나자 왜 저러나 싶었으나 잠자코 있었다고 말했다. 어차피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굳이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의아한 내 표정을 본 김필수가 웃으며 자신이 현재 맡고 있는 부서가 최신 IT부서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정보나 이런 것들을 마음대로 열람하거나 조사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하하. 맞아 불법이지 일반인 기준에서는 말야."


선화는 술자리에서 김필수가 IT부서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흥미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필수가 최신 IT기술과 앞으로 미래에 구현될 기술을 현란하게 표현했기에 선화 입장에서는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구세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인류가 화성에 갈 준비를 한다는데 한낱 아마추어가 만든 웹사이트 따위 없애는 데에는 손짓 한 번으로 충분할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선화는 김필수와 따로 만나 조심스럽게 김필수에게 웹사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쇼핑몰을 하려고 하는데 개인이 간단히 웹사이트를 만들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런 것은 해주는 업체들이 많으니 돈만 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대답을 듣자 선화는 망하거나 했을 때 웹사이트를 삭제하는 일도 가능하냐고 물었다. 김필수가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은데 없애는 거야 당연히 가능하다고 하자 선화는 조심스럽게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참 귀찮았지. 요즘 이래저래 스트레스받는 일이 아니었다면 만나지도 않았을 거야. 그래도 최선화라는 과거의 네임밸류 때문에 흥미가 돋은 거지. 뭐 우리들 사이에서만 있는 이름값이긴 하지만 말이야. 이제는 나이도 먹고 고생도 했는지 예전만 못하더라고. 못 배워먹어서 그런지 술집 주인에게 아빠 아빠 거리질 않나 나 원 참."


선화는 김필수를 만나 간단히 식사를 하고 골목길 깊숙이 숨겨진 야네우라로 김필수를 데리고 갔다. 야네우라는 선화에게 있어 마음의 안식처이자 자신의 비밀이 담긴 장소였다. 그리고 선화의 비밀이 담긴 상자는 세상에서 선화가 가장 신뢰하는 '아빠'가 지키고 있었다. 선화는 내게 '아빠'가 야네우라를 지키고 있는 한,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다. 다락방 바깥에서의 일들이 아무리 자기를 괴롭혀도 돌아갈 곳이 있으니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선화가 빛도 잘 들지 않는 반지하에 자리를 잡은 것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야네우라와 비슷한 공간에서 보내고 싶은, 그런 욕망의 발현이었지 않을까. 김태식의 마수에서 견디기 위해서는 매일 같이 야네우라에 몸을 숨기고 있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김필수에게 선화의 사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야네우라는 이상한 골목에 있는 '별 시덥지도 않은 가게'였고 선화의 '아빠'는 술집 사장이었다. 선화는 '술집 사장을 아빠라고 부르는 정신 나간 년'이었다. 그는 선화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얼굴 좀 반반해서 잘만하면 쉽게 쉽게 살 수 있었는데 한심하네.'


김필수는 그 생각을 끝으로 선화에게 흥미를 잃을 뻔했다. 곧이어 걸려온 김민수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김필수가 선화를 찾아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 필수야? 나야 민수. 어떻게, 통화 괜찮니? 하하, 밥은 먹었고?"


시답잖게 걸려오는 김민수에 전화에 김필수는 웃음이 나왔다. 매번 김민수가 자신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김민수에 비굴한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김필수가 지금 좀 바빠서 그런데 무슨 일이냐고 묻자 김민수는 다급한 목소리로 김필수에게 말했다.


"아 내가 바쁜데 전화했구나 미안 미안. 하하, 혹시 동창회 또 할 건데 올래? 저번에 너도 꽤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김필수는 ‘글쎄’라고 대답했다. 아마 김민수는 이번 달 갱신되는 아버지 회사의 계약에 대한 확답을 듣고 싶어 전화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과 친구관계로 엮기 위해 동창회 이야기를 꺼내는 김민수의 모습에 웃음이 비져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아야 했다. 하지만 전화를 곧 끊어야 했다. 김실장이 조용히 손목을 가리키며 다음 스케줄로 이동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물론 김실장의 의견을 김필수가 곧이곧대로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실장은 말 그대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고 그 의견을 수용할지 여부의 문제는 오롯이 김필수의 몫이었다. 하지만 김필수는 고민할 필요 없이 김실장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의견을 내는 경우가 많지 않은 김실장의 성격상 이번 의견은 김필수가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가이드'가 분명했다.


"좀 생각해 볼게."


김필수는 그만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뒤이은 김민수의 말에 방문을 열러 가는 김실장을 손바닥을 들어 제지했다.


"그, 그래 꼭 좀 잘 생각해보고! 마침 오늘 최선화 만나기로 했는데 적극적으로 추진 한 번 해볼게!"


"최선화?"


"응, 기억하지? 왜 우리 중학교 때 예쁘다고 난리였잖아. 그때 보니까 지금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도 웬만한 여자애들보다는 훨씬 낫지? 내가 따로 연락해서 만나자고 했어. 오늘 향수도 제대로 뿌렸다 아주 하하."


김민수는 김필수가 반응을 보이자 이때다 싶어 황급히 말을 이었다.


"내가 다음 동창회 때 최선화 딱 꼬셔서 옆에 데리고 나갈게. 크 딱 폼나게 말이야. 최선화 정도 네임밸류를 여친으로 만들어서 나가면 애들이 기절하겠지? 재밌을 거야. 내가 꼭 그렇게 만들 테니까 필수 너도 꼭 와!"


김필수는 김민수와 전화를 끊고 김실장에게 최선화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찾아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김실장이 미리 대기시켜놓은 차에 오른 김필수의 머릿속에는 늦은 약속시간에 대한 걱정보다는 최선화와 김민수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김필수가 최선화의 웹사이트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났을 때였다. 김실장이 보내준 링크에는 최선화의 출생부터 현재까지의 기록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중 빨간색으로 표시된 항목에는 '김태식에게 성관계 동영상으로 협박을 당하고 있음'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김태식에 대한 정리도 있었는데 최선화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여자들에게 영상으로 협박하고 돈을 갈취하는 그저 그런 쓰레기였다. 김필수는 '쯧'하고 혀를 찼다. 곱상하게 생긴 외모만 주기적으로 관리하고 인맥만 제대로 만났으면 이런 저질 양아치 같은 인간들하고는 마주치지도 않을 삶을 살았을 텐데 자기 팔자를 자기가 꼬는구나 싶었다. 김필수는 대충 스크롤을 내리며 내용을 읽은 뒤 김태식이 만들어놓았다는 최선화의 웹사이트를 클릭했다. 150개의 영상이 카테고리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겉보기에 꽤나 신경 써서 만든 티가 났다. 아마도 김태식이라는 인간은 이렇게 여자들 한 명 한 명으로 성인사이트를 만들어 이걸 빌미로 돈과 성을 갈취하고 종국에는 대중에게 오픈해 돈을 벌 생각인 것 같았다.


"재밌네."


김필수는 영상들을 보며 생각했다. 오래간만에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중요한 프로젝트 때문에 여자와 잠을 자지 않았단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대로 바지를 내리고 조용히 페니스를 움켜쥐었다. 김필수는 조용히 영상 속의 남자와 싱크를 맞추어 페니스를 부드럽게 흔들다 곧 사정했다. 김필수는 휴지에 묻은 자신의 정액을 보면서 채 해소되지 않은 욕구를 느꼈다. 김필수는 곧바로 김실장에게 연락해 최선화의 집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김실장은 평소처럼 금방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김실장에게 지시만 하면 일은 항상 김필수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회장의 양아들이 되고 나서는 늘 이런 삶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삶에 안주했지만 김필수는 더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었다. 자신 같은 위치의 사람들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위치. 신, 말 그대로 그곳에 있는 이들은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상의 신이었다. 김필수는 신이 목표였다. 신이 되면 뭘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다만 궁금할 뿐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지금 자신의 위치를 보고도 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보다 위는 도대체 어떤 세계일까 하는 막연한 호기심이 김필수는 더 위를 올려다보게끔 하는 원동력이었다. 회장이 자신에게 붙여준 김실장이라는 인물도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김필수의 의지를 부추기는 데에 한 몫했다. 김실장은 김필수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얼굴, 키, 몸 어느 한 군데 빠지는 곳이 없었고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 아랍어 등을 거의 원어민에 가깝게 구사했으며 격투기 역시 세계 랭킹에 포함될 수준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이었다. 경영 지식 또한 상당해서 지금까지 진행한 프로젝트에서 김실장이 없으면 진행되지 않았을 것들도 상당히 많았다. 처음 김필수의 궁금증은 도대체 김 실장 같은 사람이 왜 한 사람에게 묶여서 때로는 비서보다도 더 귀찮은 일들을 하는가였다. 김필수의 궁금증은 김 실장의 입을 통해 해결이 되었다. 김필수가 어렵게 꺼낸 질문에 김실장은 늘 그렇듯 감정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정도 위치에 계신 분들은 다 저 같은 사람들이 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커왔고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김실장은 그러면서 김필수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면 자신도 같이 회수된다고 덧붙였다. 김필수가 자신이 자리에서 내려가게 되는 조건이 뭐냐고 묻자 김실장은 그것은 모른다고 말했다. 단지 위의 결정이라고만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날부터 김필수는 '위'로 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계획을 조정했다.


최선화에게 가기로 한 것은 분명 '위'를 향한 계획 안에 있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몇 개의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서 자신을 위한 아무 보상도 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는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필수가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영상 속의 최선화가 아니라 실제 최선화를 갖는 것. 김필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그렇게 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최선화는 김태식에 의해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었고 그저 그런 인생을 사는 여자이니 차라리 자신과 하룻밤을 자고 물질적으로 크게 보상을 받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여겼다.


김실장이 내려다 준 곳은 한적한 골목에 있는 허름한 빌라 앞이었다. 계단을 오르려고 발을 내딛자 김실장이 조용히 '지하입니다'라고 말해 김필수는 얼굴을 찌푸렸다. 김실장의 안내를 따라 반층 내려가니 102호라고 적힌 푯말이 달린 녹슨 문이 살짝 열린 채 김필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필수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잡이를 감싸 쥐고 가볍게 몸 쪽으로 당겼다. 끼기익 하는 녹슨 쇳소리가 불쾌하게 귀를 긁었다.


연분홍색 벽지가 촌스럽게 발려진 방 안을 둘러본 김필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 이십 분. 최선화는 평일에는 퇴근하고 곧바로 집으로 귀가했다. 조금 있으면 최선화가 집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김필수가 두리번거리며 앉을 곳을 찾자 김실장이 조그만 의자를 가지고 와서 김필수 옆에 놓았다. 김필수는 가만히 의자 위에 앉아 흥분되는 마음을 관조했다. 이것은 여흥이다. 단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과정이다. 게임이다. 같은 말 따위를 속으로 되뇌어도 발기된 페니스는 가라앉지 않았다. 김필수는 조용히 손짓으로 김실장을 내보냈다.


최선화의 서랍장으로 걸어간 김필수는 순서대로 손잡이를 당겼다. 첫 번째 칸은 양말과 스타킹이 줄지어 들어있었고 둘째 칸에는 속옷이 동글동글하게 말려있었다. 김필수는 오른손 둘째 손가락과 셋째 손가락 첫마디로 속옷 뭉치들을 쓸어내렸다. 까끌까끌한 레이스들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김필수가 검은색 브래지어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을 때 문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현관문이 반쯤 열리더니 김실장의 팔이 최선화를 휙 밀어 넣고는 문을 닫았다. 최선화는 무슨 일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채 검은색 브래지어를 들고 있는 김필수를 쳐다보았다. 검은색 브래지어가 자신의 것임을 알기까지 꽤나 시간이 필요했다. 김필수는 손에 든 브래지어를 자연스럽게 바닥에 떨어뜨렸다. 당황하는 최선화에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며 사과 아닌 사과를 한 뒤, 자신이 온 이유를 설명했다. 최선화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했다가 멍했다가 마지막에는 화가 난 듯 커다란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김필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반인에게 꽤 큰돈과 원하는 데로 웹사이트까지 지워준다는데 이런 거래를 거절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김필수는 최선화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아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필수는 증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휴대폰을 꺼내 선화의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최선화는 김필수의 손에 들린 네모난 화면 안에서 교성을 지르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최선화는 이성을 잃었다.(김필수는 영화에 나오는 괴수 같은 소리를 질렀다고 말했다) 곧바로 화장실 옆에 딸린 조그만 부엌 싱크대에서 과도를 꺼내 김필수에게 겨누었다. 김필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에 들린 과도가 애처롭게 보였다고 말했다.


김필수는 마지못해 김실장을 소리쳐 불렀다. 김실장은 그대로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와 구둣발로 최선화의 명치를 걷어찼다. 최선화가 윽 하는 신음소리를 삼키며 벽에 부딪혔다. 충격으로 액자가 떨어지며 이마에서 핏줄기를 만들어냈다.


김필수는 조용히 다가가서 최선화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 최선화는 김실장에게 차인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김필수는 김실장에게 나가 있으라고 지시한 뒤 배를 잡고 있는 최선화의 팔을 억지로 젖혀 윗옷을 벗기고 스커트를 내렸다. 김필수는 페니스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속옷 차림이 되어버린 최선화는 다시 배를 부여잡고 있었지만 눈은 김필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김필수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굴복시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김필수는 휴대폰을 켜고 최선화가 가장 치욕스럽다고 여길만한 동영상을 틀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김필수는 웃었다. 자기도 그렇게까지 할 작정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저 스트레스가 조금 쌓여서 푼다는 것이 일이 커졌을 뿐이라고.


선화는 김필수가 그 동영상을 틀자 아픈 배를 가리고 있던 손을 들어 김필수의 뺨을 후려갈겼다고 한다. 그러고는 두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김필수에게 '씨발 곰보 새끼 죽여버린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게 화근이었다. '곰보 새끼'는 김필수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관통하는 단어였다. 김필수는 자신도 무엇에 홀린 듯이 행동했다고 말했다. 발치에 떨어진 과도를 집어 들어 선화의 목을 관통하는 데까지는 십 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필수는 선화의 목에서 끄륵하는 피 끓는 소리가 멎을 때까지 힘주어 칼을 밀어 넣었다며 칼끝에 단단하게 걸린 것이 아마도 목뼈였을 것이라고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선화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자신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칼을 뽑았다고 말했다. 김필수는 자그마한 구멍에서 울컥울컥 사방으로 뿌려지는 피를 보며 다급하게 김실장을 찾았다고 한다. 김실장은 손에 과도를 들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하고 있는 김필수에게 여전히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몇 가지 옵션을 제시했다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말끔히 치우고 행불 처리를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혐의를 씌우거나 하는 편입니다."


김필수가 '이런 경우'가 종종 있는지 묻자 김 실장은 ‘꽤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김필수는 '다른 사람에게 혐의를 씌운다'는 김 실장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김필수는 김 실장에게 근처 로드샵에서 남자 향수를 사 오게 시켰다. 김 실장은 고개를 꾸벅이고는 현관문을 나서려고 문을 열었다. 잠시 뒤 김 실장이 김필수가 말한 싸구려 남자 향수를 사 왔고, 김필수의 지시대로 방안 구석구석 향기가 퍼지도록 세밀하게 뿌렸다. 김필수가 화장실에서 얼굴에 튄 선화의 피를 깨끗하게 씻고 나왔을 즈음 선화의 방안에는 지독한 남자 향수 냄새가 선화의 피 냄새와 섞여 끔찍한 냄새를 만들어냈다. 김필수는 김 실장에게 어서 나가자고 이야기했고 김 실장이 현관문을 여는 순간,


"네가 들어온 거지. 김 실장이 순식간에 네 뒤로 돌아가 뒤통수를 쳐서 기절을 시켰어. 잘 기억 안나지?"

내가 대답하지 않고 김필수를 쳐다보자 김필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김필수는 내가 최선화의 집에 올 것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 이상으로 당황했다고 말했다. 김실장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는 물음에 김필수는 일단 방에 넣어두고 자리를 뜬 다음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김필수가 뿌려 놓은 향수와 함께 선화와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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