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 결혼을 고민하다.
"ㅇㅇ도 얼른 결혼해야지. 좋은 사람 만나야 할텐데.."
"이제 여덟인데, 아직 멀었어요 결혼은 무슨."
"얘는, 삼촌은 그때 애가 둘이었어!"
할머니의 말씀에 '외삼촌은 저보다 16살이나 많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로 시작하는 변명을 대려 했지만 입에 남아 있던 밥과 함께 삼켜버렸다. 출근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만원 지하철을 타고 가며 할머니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결혼이라니. 갑자기 확 나이가 든 느낌이다. 유일하게 자유로운 목 윗부분을 돌려 사람들을 살폈다. 다들 무엇인가에 홀린 표정이다. 10명 중 7명은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있고 2명은 서서 눈을 감고 졸고 있다. 1명은 그저 아무 생각없이 멍한 표정이다.
'다들 저렇게 바쁘게 사는데 결혼은 무슨..."
실제로 내 또래들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거의가 회의적이다. 내 주변의 회의론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크게 두 가지의 변명으로 귀결된다.
우리나라는 유래없는 학력 인플레에 대졸 백수가 400만에 이른다.(부정확한 조사임에도 불구하고) 집 값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아 서울에 있는 아파트 하나 사려면 5억은 우습다. 취업난을 뚫고 들어간 직장에서, 몇 년 일해서라도 집 값을 마련할 수 있으면 다행이련만, 그나마 비비고 들어간 직장은 대기업이 아닌 이상 연봉 3000만원을 받기가 힘들다.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20대 후반에게 '결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겠다.
이미 대부분의 20대들은 이미 스스로 집을 마련할 능력이 없음을 받아들이고, 암묵적으로 집안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산다. 그렇게 부모가 집을 팔아 자식에게 신혼집을(전세라도) 마련해주고 좁은 집으로 이사가는 풍경이 정당화 된다. 부모 자신들은 이미 늙었고, 둘이서 살기에는 너무 넓어서 청소하기 번거로웠는데 마침 잘됐다라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고 말이다.
우울한 이야기는 아직 끝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자식들에게 전세자금조차 줄 형편이 못 되는 부모들이 훨씬 많다. 자식들에게 신혼집을 해줄 의무는 어디에도 없지만, 사회적 분위기가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의 자녀들은 월세부터 시작해야 한다. 혹은 무리를 해서 은행 대출을 끼고 교외에 전세를 얻거나. 그렇게 빚을 갚으며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니다가 아이가 생기면 양육비가 추가 된다. 4-5년 전에 아이 한 명을 성인까지 키우려면 2억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지금은 얼마만큼 올랐는지 모르겠다. 아마 못해도 3억은 들지 않을까. 자녀를 키우며 마침내 서울에 집을 마련했을 때 그들의 나이는 정년퇴직할 즈음. 이제 서울의 집을 팔아 자식의 신혼집을 해주어야 하는 때이다. 악순환이다.
인간의 성장 가능성과 행복의 척도를 무시한, 돈만을 위한 변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삶의 대부분의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돈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으며 많은 이들이 돈 때문에 결혼을 포기한다.
돈과는 별개로, 결혼 그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다.(돈에 대한 방어기제일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 결혼에 대해 물으면
'난 아직 준비 안됐어'라거나
'아직 하고 싶은 일들이 더 많아'
혹은
'꼭 결혼을 해야해?' 등의 대답이 돌아온다. 이런 대답을 하는 부류는 대개 다른 사람들보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월등히 높고, 취미가 다양하며,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목표가 확고하다. 혹은 꿈이나 목표를 만들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반대로 혼자만의 취미나 혼자만의 꿈, 목표가 없는 사람일수록 결혼에 대한 강박적인 생각을 갖는 경우가 많다)
또 이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생각이 많은 편이고 감각이 예민하다. 따라서 매우 감성적이고 조그마한 일에도 상처를 크게 받는다. 첫사랑을 못 잊어서 연애를 하지 못한다거나 옛 연인과의 쓰린 기억을 극복하지 못해 이성에게 마음의 문을 닫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과 이별은 크던 작던 흔적을 남기는 법이지만 이들에게는 그 자취가 더욱 깊숙히 남는다. 더욱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기성세대보다 훨씬 많아졌다. 아마 '취향 존중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민감한 감성을 가진 이들이 자신 있게 커밍아웃할 수 있게 된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들이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것에 이미 결혼한 주변 선배들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결혼하니까 세상이 너무 행복해. 힘들어도 하루하루 버틸 수 있어."
라는 말 보다는
"결혼하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더 했어야 했는데..."
와 같은 후회성 발언을 우리는 더욱 쉽게 듣는다. 물론 간혹가다 결혼생활을 찬양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미지의 영역이다. 동거조차도 완벽하게 결혼을 체험하게 할 수 없다. 때문에 다분히 경험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밖에 없다. 100명 중 1명이 결혼을 찬양한다고 해서 결혼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바뀌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로지 내 주변의 이야기라 다소 편협한 시각으로 20대의 결혼 생각에 대해 말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신의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으로 시작하는 주변 사람들의 일화도 소소하게 꺼내는 법이다.
결혼 이야기가 주제로 나왔을 때 '아는 사람'들도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사는 것이 다 비슷하구나 싶다.
다만 기성세대와 20대들에게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점은 결혼이 힘겨운 주제가 된 것에 대해 너무 사회에 촛점을 맞추거나 너무 개인에 맞추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무능으로만 돌려서는 안되며, 개인의 무능을 온전히 사회의 탓으로 돌려서도 안된다. 그것이 유일한 규칙일뿐 정답도 없고 오답도 없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또래들에게 심심한 응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