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 빨간 페라리를 탄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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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다음날 아침 김은 머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잠에서 깼다. 낯익은 천장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가운데 붙어있는 갓 등에 새끼손톱 크기의 검은 얼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 자신의 방이 분명했다. 작년 여름 들어왔다가 출구를 찾지 못해 죽어버린 파리의 사체가 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어떻게 들어왔지?’라는 생각과 함께 허리를 세우던 김은 또다시 두통을 느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이케아에서 싼 값에 산 테이블과 스탠드, 실내 공기를 맑게 해 준다고 해서 산 스투키와 태국여행 때 싼 값에 사 온 야경 액자를 보니 김의 집이 확실했다.


김은 다시 한번 어제의 기억을 곱씹었다. 피로를 풀러 들어간 펍에서 노신사를 만나고, 의미 없는 대화들을 나누고, 서비스로 받은 보라색 병의 특이한 맥주... 레.. 레비아탄... 레비아탄! 그 이상한 맥주를 마신 뒤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계속해서 기억을 더듬던 김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러그를 밟는 순간 김은 아차 싶었다. 장을 보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주말부터 귀찮아서 미루고 미뤄왔다가 마침내 엊그제 생수까지 동이 나 장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어제 일인데.. 원래대로라면 퇴근 후 집 앞 마트에서 장을 봐서 집에 왔어야 했지만 어제는 유달리 지치기도 했고 마침 금요일이기도 해서 맥주 한 잔 안 하고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단골 펍을 찾아갔고, 우연히 노신사를 만났고..


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냉장고 앞까지 느린 걸음으로 다가갔다. 하나쯤은 생수가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매주 로또가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 토요일 8시 40분만 기다리는 마음과 같은 기대감. 김은 결과를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머릿속으로 원하는 것을 그리는 자신을 책망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속에는 남이 보면 부끄러울 정도의 비루한 식재료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몸짓만큼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유통기한이 언제까지인지도 모르는 계란 세 알과, 지난겨울 먹다 남은 귤 몇 개, 브로콜리 반 개, 먹다 남은 식빵 한 조각과 바닥을 보이는 딸기잼 하나. 그리고 처음 보는 낯선 생수병 한 개.


김은 냉장고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생수병은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은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표면에 서린 하얀 서리가 김의 손자국을 따라 녹으며 축축해졌다. 갑자기 나타난 생수병이 의아했지만 김은 몹시도 갈증이 나서 일단 먹고 나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병뚜껑을 돌려 땄다.


병 주둥이를 코에 갖다 댄 김은 이상한 냄새가 나는지 맡아보고는 병을 기울여 입에 조금 머금고 맛을 보았다. 다행히 물이었다. 그것도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했다. 물을 벌컥 들이켜던 김은 뒷골이 띵 하고 당기는 것을 잠시 참다가 마저 들이부었다.


“하!”


개운한 한숨을 뱉은 김은 ‘도대체 어디서 난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밑바닥만 찰랑거리는 물병을 들어 찬찬히 살폈다. 라벨은 없었지만 라벨 자리에 음각으로 볼록하게 숫자가 적혀 있었다.



‘0’



김은 물병을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봤지만 ‘0’이라는 숫자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좀 더 살펴봐도 특별한 구석이 없자 김은 흥미를 잃고 갈증을 해소시켜준 고마움도 뒤로한 채 물병을 쓰레기통에 휙 던졌다.


부스럭거리며 비닐을 비비고 물병이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김은 허기를 느꼈다. 단골 순댓국 집의 진한 육수가 간절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열두 시 반이었다. 김은 ‘점심시간이네’라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저었다. 그 순댓국집은 맛집으로 유명해서 김 씨뿐만 아니라 점심시간이면 한 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은 비좁은 곳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쓰린 속을 달랠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질 않아 자리에 도로 누웠다.


'순댓국은 무슨'


잠이나 더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불을 끌어당겼지만 머릿속에서는 순댓국이 계속해서 방울이 터지며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하얀 김 사이로 살짝살짝씩 보이는 순대와 머리 고기들, 발갛게 살이 오른 통통한 새우젓과 보기만 해도 고소한 들깻가루 세 스푼. 가지런히 놓인 생양파를 하나 집어 잘 익은 쌈장에 찍으면...


김이 도저히 안 되겠다 생각하며 몸을 뒤척일 때 뜻밖의 전화가 김을 벌떡 일어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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