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 빨간 페라리를 탄 남자

03

by starka

“그럼 제가 어떡할까요?”


김은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범죄자처럼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김을 보고 노신사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그리며 웃었다.


“그래, 이거야. 이때가 나는 가장 흥미로워.”


“뭐가요?”


갑작스러운 노인의 변화에 김은 두려움을 느꼈다.


“내 자네에게 방법을 한 가지 알려주지 아주 쉬워. 쉽고 말고.”


노인은 김의 물음을 무시한 채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 살면서 간절히 무엇 인가를 바라본 적 있나?”


“네?”


“한 번이라도 간절해 본 적이 있냐는 말이지.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든 간에. 너무나 얻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도저히 잠이 안 오고 머릿속에 그것만 가득 차 있는 거야. 그러다 보면 24시간 내내 그것을 얻기 위해 몸이 저절로 움직이지.”


자기 계발서 같은 노신사의 말에 김은 믿은 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제가 오늘 좀 피곤해서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김은 퉁명스럽게 대꾸한 뒤 자리에 서서 3분의 2 정도 남아 있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런, 내 말이 장난 같나 보군 그래. 하긴 인간은 자신이 본 것만을 믿는 경향이 있지. 좋아 이렇게 하지.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을 말해보게.”


노신사는 김이 맥주잔을 내려놓자마자 제안을 했다. 김은 속으로 ‘당신이 꺼졌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김은 너무 소심했다. 대신 김은 입가에 남아있는 거품을 엄지로 훔치며 ‘글쎄요, 당장 바라는 것은 없는데... 맥주를 다 마셔버렸으니 새 맥주가 턱 하니 앞에 나와있으면 좋겠군요’라고 말했다.


김은 자신이 있었다. 첫 번째로 새 주문 없이는 새 맥주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김은 맥주를 더 이상 주문할 생각이 없었다. 두 번째로 만약 노신사가 맥주를 주문한다면 원하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노신사의 말에 스스로 위배되기 때문에 김으로서는 노신사를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김은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만일을 위해서 새 맥주를 간절히 원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 조금, 마음속에 새 맥주의 이미지만 잠깐 떠올렸다가 이내 지워버렸을 뿐이다.


김이 외통수를 놓은 기사처럼 노신사를 ‘뭐 어쩔 테요?’하고 쳐다보고 있을 때, ‘탁’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오목한 그릇이 놓였다. 그릇 안에는 코를 찌르는 치즈 냄새와 함께 나쵸칩이 성기게 담겨있었다.


김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맥주 한 잔 더 할걸이라는 생각을 했다. 노신사와 이야기하다 보니 나쵸칩을 시킨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서 들리는 ‘탁’ 소리와 함께 놓인 것을 보고 김은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이게 뭐예요?”


“보면 몰라? 맥주 아냐.”


사장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이걸 왜…”


“우리 가게 단골이 외국 갔다가 몇 병 사다 줬어. 의사 양반도 맛이나 보라고. 매번 혼자 와서 청승 좀 떨지 말고. 뭐야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 마셨어?”


사장은 ‘맥주를 무슨 맛도 안 보고’라는 혼잣말과 함께 김의 빈 잔을 거둬갔다.


“자 어떤가?”


노신사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자네가 맥주를 좀 더 간절히 원했으면 생맥주로 갖다 줬을 텐데 말이야.”


김은 적잖이 놀랐다. 절묘한 타이밍이 부른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김은 저 사장이 얼마나 인색한지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눈 앞에 나쵸칩만 해도 열 조각이 될까 말까 였다. 김이 이 집에 처음 온 날 나쵸칩의 양으로 사장과 실랑이를 벌였을 정도였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사장이 서비스로 맥주를 준 것은 큰 이벤트였다.


김은 왠지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아 자리에 앉았다.


“잘 생각했네. 앉아서 새 맥주를 마시며 천천히 이야기해보자고.”


“아니 이건 그냥...”


김이 만류할 새도 없이 노신사는 손수 맥주병을 건넸다. 언제 땄는지도 모르게 맥주 뚜껑이 열려 있었다. 김의 의아한 눈초리에 노신사는 ‘별거 아닐세.’라고 답하고는 어서 들이키라는 듯이 손을 위아래로 까딱했다. 병 주둥이를 입에 가까이 댈수록 알싸한 향이 입맛을 자극했다. 병을 입에 대고 맥주를 한 모금 들이붓자 김의 눈동자가 커졌다. 생전 처음 맛보는 맛이었다. 과일향과 함께 묵직한 씁쓸함이 입안을 순식간에 가득 채우며 목구멍으로 쏜살같이 흘러들었다.


김이 ‘크-‘소리를 내며 맥주병을 내려놓자 노신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굉장한 맛이지 않나?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맛을 내는 맥주지.”


“이 맥주 아세요?”


김이 맥주를 들어 라벨을 확인하며 물었다. 조명이 어두워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병도 갈색이 아닌 어두운 보라색 병이었다. 라벨 가운데에는 병 색깔과 똑같은 보라색으로 그려진 커다란 고래가 그려져 있었다. 특이한 것은 고래 배 밑부분에 무엇인가 적혀있었는데, 무슨 글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레비아탄이라고 읽는 걸세.”


“레비아탄이요?”


“지금은 잊힌 곳의 글자지.”


노신사는 회상의 잠긴 얼굴로 말했다.


“잊힌 곳이요?”


“자, 내가 아까 했던 말 기억하나? 자네는 머리가 좋으니까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원하는 것을 강렬하게 소망하는 거야. 쉽지? 그럼 나중에 보세.”


노신사는 김의 말을 자르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마저 들게. 맛이 아주 좋으니 술술 넘어갈 거야.”


노신사의 옆에는 어느새 저번에 봤던 비사가 중절모를 들고 서있었다.


“아, 맥주 치고는 좀 세니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라고. 내 말 기억하고.”

김은 노신사를 따라 일어나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노신사의 ‘마저 들게’라는 말이 메아리처럼 귓속에 울려 퍼졌다. 김은 홀린 듯이 맥주병을 들어 입에 가져갔고 맥주를 다 비우자 책상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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