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적인 사람 = 무조건적인 YES맨?
직장생활 10년 차이지만 2013년부터 현재까지 대략 9번의 이직을 통해 나는 무수히 많은 신입사원 시절
반복했다. 현 직장도 입사 5개월 차의 신입사원이자 부서 내 귀여움을 담당(?)하고 있는 막내 직원이다.
잦은 이직이 가능한 노하우를 가끔 물어보는데 내가 생각하는 정답은 딱 하나이다. 미래에 대한 목표나 가치를 가지고 이직하지 않는 이상은 경력 인정은 물론 복지, 스펙, 연봉에 대한 염원을 다 포기하면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프로이직러(*이직의 전문가처럼 보이는 사람을 표현한 말)가 된 것은 아니었다.
나의 첫 직장은 전자제품을 만드는 대기업의 경호, 경비업체로 경비 및 행정업무를 담당했다. 사실 경비업무라 하더라도 직원 및 외부인, 차량 입출입 전산관리가 주였기에 TV 브라운관에 나오는 것처럼 순찰을 돌거나
거동수상자를 제지하거나 하는 역할은 하지 않았다. 여성이기 때문에 배려 차원으로 업무분장이 이루어진 것이라 설명하며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라고 말씀하셨다. 그냥 그렇게?? 묘하게 기분이 나빴지만 나는 신입사원이고 내가 모르는 회사의 분위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더 이상 선배님에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면 다닐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생겼다. 그중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이야기하자면 1. 외부 근무 시 여직원은 7cm 이상의 힐 착용 2. 점심 먹고 난 후 여직원 남자 선배님들에게 커피 드리기 3. 점심 또는 저녁 회식 때 여직원은 반드시 사장님 옆에 앉기이다. 명문화된 규정은 아니었지만 암묵적인
규칙으로 고착화되어있었고 몇 달이 지난 후 해당 부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을 때 선배님들께 아주 독특한 이야기를 들었다.
00이 자기소개서에 능동적이고 솔선수범하는 사람이라며,
면접 때도 융통성 있게 선배님들과 소통 잘한다고 이야기했잖아
응? 능동적인 사람으로 업무에 솔선수범한다고 작성하긴 했으나 이 부분이 부당한 일에도 YES를 외친다는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 회사의 암묵적 규칙은 엄연한 성차별였고 직원에 따라 성추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예민한 부분이었기에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한다고 결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넘어서까지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 자기소개서 적은 말 다 거짓말이네'였다. 그날로 나는 퇴사를 결심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프로 이직러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2번째 직장은 제조 대기업이었다. 인력공급업체를 통해 대기업 구매팀에 파견직으로 입사했고 입사
첫날 구매팀 부장님께서 '내가 00 씨를 왜 뽑았는지 알아요?'라고 물었다. '자기소개서에 맡은 바 일을 책임 있게 수행하며 저의 일로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습니다라고 적혀있어서 맘에 들었고 면접 때 입사하게 된다면 어떻게 일하겠냐는 질문에 적어도 저의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해서 뽑았다.'라고 했다.
부장님께 감사인사를 전하며 사무실로 돌아가 배정받은 업무를 보는 순간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전임자가 그만둔 지 한 달이 넘은 시점이었고 밀려있는 데이터가 무려 5천 가까이 있었다.
물론 사수가 있었기에 업무를 배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나는 입사한 지 2일째 되는 날부터 매일 아침 8시에 출근, 밤 11시에 퇴근했다. 당연히 파견직이었기에 시간 외 수당은 없었다. 맡은 바 일을 책임감 있게 수행한다고 했지 회사에 나의 영혼을 바치겠다는 뜻은 아니었음에도, 심지어 당일 해야 하는 업무량을 끝내고 퇴근을 하려고 할 때에도 소속 팀장님은 온갖 이유로 퇴근을 최대한 막았다. 부장님과 팀장님에게 맡은 바 책임을 다한다는 이야기는 과중한 업무량에도 YES를 외치며 업무를 수행하고 회사에서도 제일 늦게 퇴근하는 성실한(?) 직원을 뜻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긴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한번 더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두 번째 이직 이후에도 2년 동안 중소기업이 일하며 3번째 이직을, 군청에 계약직으로 근무하며 4번째 이직을, 서울에서 정말 아무런 이유 없이 채용 합격이 채용보류 전환되며 5번째 이직을 하게 되었다. 중소기업과 군청역시 능동적인 태도로 상사의 모든 말에 YES를 외치는 직장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솔선수범의 뜻은 중소기업의 경우 신입사원이 무조건 사무실 청소를 혼자 하는 것이었고 군청은 계약직 직원이 정수기와 쓰레기통을 혼자 비우는 것이었다. 혼자 할 수 있는 부분들은 분명히 맞지만 상사와 정규직들의 의도는 분명히 불순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멋있었고 배울 것이 많았던 최고의 직장인 6번째 직장도 초반에는 별 다르지 않았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이틀째가 되던 날 나의 업무는 9명 직원의 근무일지 표지를 2권씩 만드는 것이었고 신입사원이 선배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만드는 전통적인 관행이라 설명했다. 앞선 여러 번의 이직과 직장생활에서
쌓은 내구력 덕분에 이런 일이 아무렇지 않았고 웃으며 맡은 바 업무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데 문제는
9명의 선배님들의 기존 근무일지 표지를 바꾸는 것 과정이 순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선배님들이 기존 표지 파일을 한꺼번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한 권씩 따로따로 주셨다. 하나 끝나고 정리하면 그제야 다시 주는 것을 반복했고 마지막 최고참 선배님이 6시가 다 되어서야 파일을 주며 교체를
요청했고 나는 복잡한 감정을 뒤로한 채 업무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날 신입사원 역할에 대해 최고참
선배의 면담을 요청했고 정말 공손하고 겸손하게 한꺼번에 기존 파일을 주는 것을 제안했을 때 그 최고참 선배는 '이게 싫으면 나가세요'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때 다시 한번 깨달았다.
회사의 신입사원은 절대 기존의 문화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어서는 안 되며 신입사원은 무조건 YES라는 의미의 능동적 태도와 솔선수범만이 원만한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이후 절대로 그 어떤 말에도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업무에 임했다. 너무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했고 더 이상의 이직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시기가 지나고 어느 정도 업무에 익숙해질 무렵 좋은 사수를 만나게 되었고 나는
해당 직업세계에 대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정말 많이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선배의 위치에 올랐을 때 나는 신입사원 근무일지 표지 교체의 암묵적인 룰을 깨트렸다. 첫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6번째 직장에서 사회인으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기회를 얻었고 처음으로 나의 미래를 위한 이직을 결심하게 되면서 센터장 및 직장동료들의 축하와 함께 7번째 직장으로 이직했다.
그 후 7번째 직장도 능동적 태도와 솔선수범의 의미는 다르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 있었다면 나의 마음가짐이랄까? 신입사원은 회사의 업무와 문화를 배우는 단계이기에 어떤 행위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명확하지 않고
자칫 큰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YES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모든 업무에 임했다. 물론 누가 보아도 객관적으로 부당한 사항이 부지기수 발생했고 성추행, 성희롱 또한 없지는 않았지만 신입사원 시절엔
모든 직장동료들이 나의 능동적이고 투철한 신고정신을 막았고 당시 신입사원의 행동의 기준이 되는 사회적인 의미의 능동적이고 솔선수범하는 태도로 조용히 일 할 것을 부탁했다. 그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모두가 신입사원이었고 생계가 달린 문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신입사원에서 2년 차 직장인이 되던 날 나는 더 이상 사회적 의미의 능동성과 솔선수범의 의미를 따르지 않았고 커다란 태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중간 관리자 이상의 직급에서는 조직의 분란을, 이하의 직급에서는 사내의 문화를 바꾸며 2020년 계약 만료로 8번째 이직을 하게 되었다.
1번째 직장부터 7번째 직장의 신입사원 시절, 자기소개서의 내용대로 사회생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회사에서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을 뽑지만 막상 회사의 일원이 되었을 때의 사전적 의미의 능동성과 솔선수범은 오히려 조직의 통합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괴리는 어디를 가더라도 꾸준히 이어질 것 같다. 신입사원은 무엇이든지 배워서 익혀야 하는 존재이기에 능동적으로 업무에 임해야 하는 건 맞지만 모든 일에 YES를 말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에 대답은 아직도 정확히 내릴 수가 없다. 다만 여러 번의 이직 끝에 체득하게 된 신입사원의 자세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익숙해질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것이고 그 배움을 골라서 하는 것은 되도록이 지양해야 하는 사실이다. 배움을 고르는 순간 나의 업무역량과 회사 적응력은 다른 동료에 비해 느려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10번째 이직을 준비하고 있는 나는 아직도 신입사원의 능동성과 솔선수범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세울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많은 신입사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부당한 일까지 무조건 YES를 외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