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라는 드라마를 매우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로 인해 병원을 많이 다녔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응급실에 자주 다녔던 편이기에 병원, 의사, 간호사라는 단어들이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하지만 저 드라마를 계기로 '저 사람들도 사람이구나'를 느끼며 '의사란 의미 있는 사람들이며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했고 '의료인'들을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런데 나는 운이 좋지 않았던 것인지 정말 의사의 도움이 절실했던 순간, 종합병원을 전전하게 되면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허구의 이야기구나'라는 나쁜 믿음을 가지게 된 경험이 있다. 2020년 가을이 다가올 무렵,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나는 갑작스러운 안면통증이 찾아왔고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그 고통은 심했었다. 울지 않으면 그 얼굴에 가해지는 압력을 견딜 수 없었고 진통제를 먹으며 참아보려 했지만 진통제 1일
최대 복용량인 8알을 다 먹어도 안면통증 그 가운데 왼쪽 눈을 둘러싼 통증은 멈출 수 없었다. 급하게 동료의 도움을 받아 회사 근처 A종합병원을 찾았다. 오후 5시를 조금 넘긴 시간, 신경과 내원하며 의사를 처음 만났을 때 의사는 나의 얼굴과, 눈물, 눈 떨림을 흘깃 보기만 할 뿐 그 어떤 촉진이나 물음 없이 딱 한마디를 전했다.
안구(=눈)에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어요. MRI(A)를 찍어야 하는데 근무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찍을 수도 없습니다.
나도 직장인이기에 퇴근시간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시간이 걸리는 진료는 하지 못하더라도 통증을 줄 일 수 있는 진통제 처방이라도 요청했으나 의사는 매우 단호한 목소리로 "눈의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지 못하면 안돼요. 내일 오전에 일찍 오셔서 MRI(A) 접수하세요. 지금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안면통증을 그대로 유지한테 진료실을 나왔고 나와 동료들은 급하게 또 다른 B종합병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B종합병원은 이미 정상진료 시간이 종료되어 응급실로 내원했고 응급실에서도 눈의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지 못하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며 해당 병원 근처 안과를 우선 방문한 후 다시 내원을 요청했다. 엄청난 속도로 안과에 도착한 후 뛰어들어가 눈의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B종합병원 응급실로 돌아왔지만 B종합병원 응급실 의사는 "아... 저기.. 눈에 이상 없으면 신경의 문제인데 담당 신경과
의사 선생님이 퇴근하셔서 지금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또다시 진통만이라도 줄여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지금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였다. 그 순간 나는'내가 죽어야 이 사람들이 뭐라도 해주겠구나'라고 생각하며 그 자리에서 너무 아프다고 펑펑 울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끝내
B종합병원에서도 어떠한 진료를 받지 못하고 다시 A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관내에는 C종합병원이 있었지만 당시의 통증으로는 거기까지 견딜 수 없었고 다시 한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출발했다.
병원에 도착해 로비에서 우는 나를 보고 원무과 직원은 아직 신경과 의사 선생님 퇴근 전이라고 말하며 전화를 걸어 나의 상태를 설명하고 진료를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대답 역시 '지금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였다.
도대체 진통만이라도 줄여달라는 환자의 요청이 그렇게 들어주기 어려운 일이었을까? 눈앞에서 고통에 시달리며 아프다고 울고 있는 환자를 보고도 의사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드라마에서는 어떤 식으로라도 원인을 찾아서 낮이던 밤이든 의사들이 뛰어다는데 왜 여기 의사들은 외면만 하는 것일까? 너무 원망스러웠고 나는 다시금 병원과 의사를 불신하게 되었다.
나의 상태에 심각성을 느낀 동료는 이대로는 절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마지막으로 A종합병원 응급실로 향했고 다행히 응급실 당직의는 나의 상태와 안과 진료기록을 살핀 후 소량의 진통제를 처방해 주었다.
나는 진통제를 맞으며 '여기 병원 신경과 선생님은 진통제도 안된다며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던데 진통제 맞아도 되나요?'라고 물었고 나를 살피던 당직의와 간호사는 '아.. 그.. 신경과 선생님이 지금 환자가 많아 그러셨던 같다. 안구에 문제없음을 확인했고 다른 신경반사 반응은 괜찮으니 소량 투여는 괜찮을 것으로 판단된다." 답하며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다행히 진통제가 잘 들었고 나는 회사를 빠져나온 지 3시간이 지나서야 안면통증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의사에 따라 환자가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 일 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으며 병원에 올 일을 만들지 말자 다짐했었다.
하지만 이번 안면통증에 원인을 알아야 했기에 다른 종합병원에서 MRI(A) 검사를 받고 신경과 의사 선생님을 만나 정확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진료 중에 "다른 병원에서는 안구에 문제가 있지 않음을 확인하지 못하면 진료하지 못한 다했는데 안과랑 협진은 안 해도 되나요?" 묻자 의사는 매우 놀라며 "지금 증상은 눈이랑 전혀 상관없는데요?" 답했고 나는 허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의사마다 진료방법이 다르고 판단을 하는 근거 또한 임상경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지만 2020년 병원을 전전하던 그날의 경험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2년이 흐른 지금은 다행히 건강도 많이 되찾고 일상생활도 잘하고 있다. 중간중간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의사들만큼 사명감과 소명의식을 가진 의사는 만나지 못했지만 최소한 증상 발현 환자를 거부하는 의사는 만나지 않았기에 병원과 의료인에 대한 불신은 많이 소강된 상태이다. 나의 이런 소강상태가 2020년 그 당시 의사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없겠지만, 그들이 명백하게 잘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 그저 앞으로의 삶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의사'가 아닌 '무엇이라도 하는 의사'를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가끔 여전히 나는 의문이 든다. TV에 나오는 멋지고 사명감 넘치는 의사가 진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언론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인 것일까? 아니면 내가 운이 좋지 못해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나오는 의사 같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 것일까? 아마 그 어떤 것도 정답이 될 수 없고 나의 경험이 모든 의사를 일원화는 보편화된 경험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관련인'이 있다면 '나는 한 번이라도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사람)를 외면한 적은 없었나?'라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