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총량은 마음의 두께와 정비례한다
23살의 나는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를 읽고 사람의 존재를 어마어마한 우주로 정의했다. 그때의 나는 겁이 없고 모두에게 다정했다.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그 사람의 무한한 세계로 들어가는 탐험이었다. 사람을 알아가는 것과 음료의 양은 반비례 관계라고 고백했고 음료가 줄면 줄수록 그 사람의 우주가 내 마음에 점점 채워지는 과정을 사랑했다.
그때의 나는 스스로를 빗방울이라 불렀다. 그때 썼던 글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왔다.
"창밖에 폭우가 쏟아진다. 요란한 굉음을 내며 하늘이 땅을 두드린다. 땅은 하늘 덕분에 온몸 구석구석을 씻는다. 이곳저곳에 버려졌던 쓰레기들은 빗물에 씻겨 내려간다. 사람의 마음에도 부정적인 감정이란 불을 꺼트릴 폭우가 필요하다.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검게 그을린 재가 남겠지. 그래도 난 그 재가 거름이 되어 꽃잎이 피어나길 바란다. 내가 방문객이 되는 이유는 당신의 불을 꺼트릴 굵은 빗방울이 되고 싶어서."
누군가의 마음에 난 불을 꺼트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하늘에서 떨어져 부서져버릴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 마치 골든 리트리버처럼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는 조력자였다. 하지만 세월이라는 이름의 지도를 따라 걷다 보니, 어떤 우주는 아름다운 성운이 아니라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었다. 내가 구하려 뛰어든 어떤 집은 이미 기둥부터 썩어 문드러진 채 나를 덮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돌부리에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성숙했다는 성자조차도 눈물을 흘리며 아파했으며 돌부리에 걸리면 무릎이 깨지고 피가 났다. 하물며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에게 가장 신뢰했던 존재 혹은 나를 보호해 주어야 마땅한 견고한 시스템 안에서 당한 정서적 학대는 단순한 돌부리가 아니었을 테다. 거대한 절벽에서 떨어진 것과 같은 추락과 같다. 깨진 무릎을 싸매며 눈물을 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천천히 다시 일어서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마주했던 그 사람은 나를 보호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마치 숭고한 신앙인처럼 '너를 위한 기도'라는 그럴듯한 간판을 내걸며 내 영혼을 처참히 난도질했다. 보살핌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의 가장 연약한 마음의 틈새만 골라 파고들었다. 나의 다정함은 고쳐야 할 결함이 되었고, 나의 헌신은 그가 휘두르는 채찍의 명분이 되었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는 포장지로 감싼 독설들이 매일같이 비릿하게 쏟아졌다.
그때의 나는 그 말들이 오물인 줄도 모른 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문득,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미정의 절규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내가 뒤집어쓰고 있던 것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염치 없는 인간들에게 마음을 빌려주고 상처로 돌려받은 미정에게 구씨는 서늘한 통찰을 내뱉는다. 사내놈들도 여우 같아서, 적반하장으로 지랄 떨면 찍소리 못하고 찌그러질 여자만 귀신같이 알아본다고. 그때 미정의 목구멍에 걸려 있던 응어리가 비명처럼 터져 나온다.
미정 : 한 번도 채워진 적 없고. 그지 같은 인생에. 그지 같은 인간들. 다들 잘난 척. 아무렇게 쏟아내는 말.
구씨 : !
미정 : (말 끝에 구씨를 본다. 너, 지금 말 함부로 하고 있어!) 말..!
미정의 입술 끝에서 터져 나온 그 짧은 단어 하나가 내 영혼을 후려쳤다. 그래, 문제는 언제나 그 오물 같은 '말'이었다. 구씨의 말대로 세상의 포식자들은 영악하다. 그들은 찍소리 못하고 가만히 있을 사람, 혹은 당사자가 아프건 말건 자신의 아픔을 먼저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만 귀신같이 골라낸다.
내가 마주했던 그 사람 역시 나의 선의를 만만한 영토로 오해했고, 그 무방비한 땅에 자신의 내면에서 처리하지 못한 더러운 오물들을 말이라는 형식을 빌려 무책임하게 쏟아냈던 것이다. 23살의 나라면 그 오물조차 닦아내 주려 손을 뻗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그 사람이 내뱉은 것은 조언이 아니라 자신의 죄책감을 나에게 전가하기 위한 비겁한 투사였으며 그 사람이 지키려 한 것은 질서가 아니라 자신의 초라한 권위였다는 것을.
요즘 매일 밤, 긴 시간 샤워를 한다. 수압을 가장 높게 높이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고 있으면, 마치 그들이 영혼에 새겨놓은 "거지 같은 말들"이 하수구로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타인의 불을 끄기 위해 빗방울이 되고자 했던 23살의 소망은, 이제 스스로를 정화하기 위한 폭풍우가 되어 쏟아진다. 이럴 때마다 난 늘 생각한다. "과연 나는 다시 누군가를 믿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을 향한 신뢰가 바닥을 치는데 그 수치를 0에서 0.001조차 올리는 일이 너무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보기 위해 왕복 5시간의 거리를 마다치 않고 달려와 준 졸업한 제자들의 눈망울을 마주했을 때 내 영혼의 밑바닥에 고인 아주 작은 떨림을 보았다. 그 떨림 끝에서 인생의 수식 하나를 새로 썼다.
공감의 양은 마음의 두께와 정비례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두께란 단순히 상처받지 않으려는 고집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무례가 내 영혼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비판적인 사고다. 무조건적인 수용 대신 단호한 거절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다. 23살의 나에게 부족했던 것은 다정함이 아니라 바로 이 두께였다.
예컨대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포장지 속에서 숨겨진 의도를 비판적으로 읽어내고 '그 걱정은 감사하지만, 안 됩니다.'라고 감정과 사실을 분리해서 답하는 것이 바로 그 두께의 실체다. 타인의 비난이 쏟아질 때 이것이 진짜 나의 잘못인지 아니면 저 사람의 처리되지 못한 감정적 투사인지를 냉철하게 판단하여 타인의 감정과 나의 감정을 분리하여 보는 것이다. 내 영혼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영역으로 정중히 되돌려 보내는 일이다. 즉, 타인의 우주를 이해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우주의 경계선을 침범하는 이들에게 "여기까지."라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함이 필요했다.
23살의 내가 믿었던 사랑은 합이 일정하게 정해진 폐쇄계였다. 내가 가진 에너지가 100일 때, 상대에게 80을 주면 나에게는 20만 남는 식이다. 나의 비워짐이 타인의 채워짐이 되는 이 반비례의 함수 안에서 내가 소멸할수록 숭고해진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는 결국 나라는 기하학적 존재를 점으로 수렴하게 만드는 자학적 수식이었다. 이젠 23살의 나에게 나직이 말해주고 싶다. "활짝 웃지만 등 뒤엔 칼을 숨긴 우주, 그 가짜 다정함에 너를 내어주지 마라. 무너져가는 집 안으로 억지로 들어가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너를 사랑하는 이들이 너의 부재로 인해 흘릴 눈물을 먼저 생각해라."
반비례를 노래하며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비워냈던 23살의 시절은 지나갔다. 나라는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 쓴 공감의 함수는 "정비례의 법칙(E=kT)"이다. 여기서 E는 공감의 총량이고 T는 마음의 두께다. 기울기 k는 내가 세상을 향해 열어둔 신뢰의 계수다.
이 수식에 따르면 내가 타인을 깊이 공감(E)하고 싶을수록 반드시 나의 방어벽인 두께(T)도 함께 두꺼워져야 한다. 두께가 0인 상태에서 공감의 수치만 높이려 한다면 공감의 함수는 정의되지 않는다. 더불어 우리가 다시 신뢰의 계수(k)를 회복해야 하는 이유를 세상에 그래도 믿을만한 구석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희망 따위를 전하고자 함은 아니다. 상대가 어떤 오물을 던져도 나에게는 그것을 즉시 씻어낼 수 있는 수압 높은 샤워기, 견고한 마음의 두께(T)가 탄탄하기 때문이다.
신뢰의 계수(k)를 높이는 용기는 타인에 대한 무모한 방심이 아니라, 어떤 상처에도 다시 일어설 준비가 되었다는 나 자신에 대한 강력한 신뢰다. 수학적으로 신뢰의 계수(k)가 0이라면 마음의 두께가 무한대여도 공감은 일어날 수 없기에. 나의 단단함을 정서적 고립이 아닌 타인을 향한 환대로 바꾸기 위한 용기다. 즉, 타인을 향한 신뢰라는 기울기가 커져야 우리는 비로소 같은 두께의 마음으로도 더 넓은 우주를 품어 안는 기적을 경험한다.
이 과정이 얼핏 보면 딱딱해 보일지라도 타인의 투사로부터 내 안의 본질적인 온기를 지켜내기 위한 방법이자 장차 내가 다시 사랑할 누군가를 살리는 가장 확실한 온기임이 분명하다.
사람의 마음엔 부정적인 감정이란 불을 꺼트릴 폭우가 필요하다. "땅은 하늘 덕분에 온몸 구석구석을 씻고, 이곳저곳에 버려졌던 쓰레기들은 빗물에 씻겨 내려갈 것"이다.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검게 그을린 재가 남겠지만, 믿는다. 그 재는 단단한 기준이라는 양분을 만나 더 견고한 꽃잎을 피워낼 거름이 될 것임을. 다시, 6월의 장마를 기다린다. 영화 <노트북> 속 두 주인공처럼, 정신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온 세상을 뛰어다니고 싶다. 힘껏 소리치면서.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을, 그리고 이 세상을 더욱 간절히 사랑하고 싶은 것이 분명하니까.
다시 누군가의 빗방울이 될 수 있을까. 나의 공감이 나의 경계와 비로소 정비례하게 된 지금, 나는 다시 누군가의 우주를 향해 조심스럽고도 단단한 첫발을 내디디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