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사랑의 정의역을 설계하는 것은
전 세계 77억 인구를 모두 1원짜리 동전으로 치환한다면 그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창희의 계산에 따르면, 1원짜리 동전을 77억 개 쌓으면 거대한 산이 된다고.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 산더미 속에서 1원짜리 날 찾을 수 있겠니?"
그 대사는 내 가슴에 뼈아픈 구멍을 낸다. 우리는 모두 저 거대한 고철 산속에서 누군가 나를 발견해 주기를, 나의 미미한 무게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며 악바리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현실은 나를 1원 이상의 가치로 봐주지 않을 만큼 타인은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고, 나조차도 이 무거운 군중 속에서 나 자신의 형체를 잃어버리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하루 종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소주를 삼키던 구씨의 뒷모습에서 나의 그림자를 읽는다. 존재의 허무라는 산은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그 무게 앞에서 우리는 자주 길을 잃는다. 내가 단지 수억 개의 동전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이 막막한 생의 산더미 속에서 나의 위치를 증명할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내가 붙잡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명징한 세계, 수학이었다.
수학 교사로 살아가며 나는 내 삶의 불확실성을 통제하기 위해 나와 타인의 관계를 함수로 치환해 보곤 했다. 대개 우리의 관계는 입력과 출력, y=f(x)라는 가혹한 수식 속에서 작동한다. 상대가 던지는 말 한마디, 표정 하나라는 입력값(x)에 따라 나의 행복(y)이 좌지우지되었다. 다정한 문자에는 함숫값이 치솟고 차가운 침묵 앞에서는 그래프가 바닥을 뚫고 내려갔다.
드라마 속 미정 역시 이 피로한 함수 속을 유영하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고백한다. 누군가를 만날 때조차 그 사람의 수준을 점수 매기고, 상대가 바닥을 길 때 오히려 안도하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했노라고 "누구랑 있으면 내가 좀 나아 보일까."를 고민하며 90점보다 64.238점 언저리의 사람들을 골라냈던 그 비겁한 안도감. 그것은 내현적 나르시시즘의 늪에 빠진 연인들이 서로의 결핍을 먹고 자라는 방식이기도 했다. 상대의 애정도를 재고, 답장이 늦으면 나도 똑같이 늦게 답하는 조용한 응징과 보복. 그 모든 것이 상대의 변수에 따라 나의 출력값을 미세하게 조정하며 나 자신을 깎아 먹는 행위였다.
이 감정의 널뛰기가 괴로웠던 스물세 살의 나는, 그리고 드라마 속 미정은, 이제 다르게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타인이란 변수에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고 그냥 쭉 좋아해 보는 일. 상대가 빵점짜리여도 혹은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파멸의 길에 서 있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오직 응원만을 출력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이다.
그 무렵 어느 가을날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가을 산행을 하던 중, 어머니는 무심한 듯 내게 한 마디를 건넸다.
"벚나무의 낙엽이 먼저 물들어야 가을이 온단다."
나는 그때 빨강 물감을 푹 찍은 듯한 벚나무의 낙엽을 보며 깨달았다. 사람들은 봄날의 흩날리는 벚꽃잎에만 환호하며 나무를 사랑한다 말하지만, 꽃이 지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하지만 나는 벚나무의 모든 계절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화려함이 가시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을 때도, 벌레 먹어 구멍 난 잎사귀가 되었을 때도 기꺼이 그 곁을 지키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어떤 입력값이 들어와도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상수를 출력하는 존재. y=c (단, c는 변수가 아닌 상수) 상수함수.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타인과의 아름다운 관계였으며 가장 완벽한 사랑의 수식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 나의 아름다운 상수는 때로 치명적인 독이 되어 돌아왔다. 어떤 값을 넣어도 한결같은 사랑을 출력하겠다는 나의 숭고한 결심은 누군가에게는 가장 손쉽게 집어삼킬 수 있는 먹잇감이 되기도 했다. 세상에는 타인의 한결같은 마음을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도구로 삼는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들이 존재한다. 자신의 불안을 숭고한 상처로 포장해 상대를 유혹한 뒤, 상대가 전적으로 자신을 수용하도록 길들인다.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모욕이나 상처라는 입력값을 지속적으로 넣어도 나의 출력값만큼은 여전히 변함없는 상수를 내뱉도록 강요하며, 나의 시스템을 서서히 붕괴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밑 빠진 독처럼 음의 무한대로 수렴한다. 그 블랙홀 같은 심연에 나의 상수를 들이붓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명백한 자기 파괴였다. 내가 아주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죄책감이라는 톱을 꺼내 들어 나의 뿌리를 베어버린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너는 이것밖에 안 되니?"라는 말로 나의 상수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이제 나는 함수의 정의역(Domain)을 치밀하게 설계하기로 했다. 나의 사랑은 여전히 상수일 수 있지만, 그 함수가 작동할 수 있는 안전한 범위를 내가 직접 정하는 것이다. 내 뿌리를 톱질하러 오는 이들에게 나는 더 이상 상수가 아니다. 그 영역에서 나는 "정의되지 않는 함수"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배운 가장 서글프지만 단단한 자기 방어이자, 진정한 해방의 시작이었다.
사랑에 대한 안전한 정의역을 찾아 나선 끝에야 비로소 드라마 속 미정의 선택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타인에게 갉아먹히지 않을 나만의 영토를 갈망하던 그녀는 그 수많은 사람 중 하필 시골 구석에 숨어 알코올에 자신을 가둔 구씨를 추앙의 대상으로 삼았을까. 내가 그토록 경계했던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들과 구씨 사이에는 어떤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을까. 그 답은 구씨가 가진 투명한 파멸에 있다.
나르시시스트들이 화려한 포장지로 자신의 결핍을 감추고 상대의 에너지를 갈취할 때, 구씨는 자신의 망가짐을 어떠한 위장도 없이 드러냈다. 그는 효율을 중시하는 ISTP 답게, 이미 서울에서의 치열한 밑바닥 삶을 통해 인간의 추악함을 겪을 대로 겪어버린 인물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지독한 번아웃과 해탈뿐이었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면을 쓸 에너지조차 남지 않은 상태. 앙상한 가지만 남은 벚나무처럼 그저 그 자리에 비어 있는 존재. 미정은 구씨를 감싸는 화려한 포장지 부재에서 역설적으로 생애 초유의 심리적 안전감을 느꼈다.
구씨가 매일같이 산을 바라보며 소주를 마시는 행위는 단순한 알코올 중독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수학적 명상이었다. 창희에게 산은 77억 개의 1원짜리 사람이라는 호기심의 대상이었지만, 구씨에게 그 산은 그가 치를 떨며 도망쳐 나온 77억 명의 욕망 그 자체였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하찮고 징글징글한 1원짜리 변수들을 한데 모아 5천 톤의 거대한 산으로 치환해 놓고 봤을 때, 도대체 저 작은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허탈함이었을 테다.
그가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는 그가 인간의 추악함을 다 알면서도, 여전히 무언가 더 나은 가치를 갈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지지대다. 이미 에너지를 다 써버려 침묵하고 있지만, 그 침묵은 무능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효율적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미정의 생뚱맞은 "날 추앙해요."라는 요구를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 뒤에 숨겨진 미정의 지독한 공허함, 나르시시스트들에게 갉아먹히고 남은 상처를 꿰뚫어 본 것이다. 평생을 가짜 말들에 시달려 침묵을 유일한 방패로 삼아온 그에게, 미정은 말이 가진 창조적인 힘을 일깨우며 이렇게 건넨다.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될 텐데. 모든 말이 그렇던데."
미정은 깨달았을 것이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자신의 파멸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진심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는 것을. 그가 괜찮은 척 연기하지 않았기에, 미정은 비로소 자신의 해방일지에 "좋기만 한 사람"이라는 문구를 써 내려갈 수 있었다. 상대의 애정도를 재거나 보복성 응징을 할 필요가 없는 관계. 상대가 어떤 입력값을 주어도 심지어 그가 이 세상에 사라져 버린다 해도 응원이라는 결과값만을 출력하겠다는 결단. 상대의 변수에 춤추지 않고, 스스로 평온한 상수가 되어버리는 것. 그것이 투명하게 망가진 두 영혼이 서로를 구원하는 방식이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내 잔이 차고 넘쳐흘러야 비로소 타인에게 베풀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내가 더 깊게 채워진다는 역설이다. 얼마 전 나는 SNS 스토리에 하트를 누르거나 짧은 답장을 보낸 이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진심 어린 장문의 메시지를 또박또박 써서 보냈다. 내가 먼저 상수로서 따뜻한 값을 내보내자 상대방의 마음에서도 진짜라는 응답이 돌아왔다. 그 순간, 1원짜리 동전 같던 나의 존재는 비로소 찰랑이며 차올랐다. 다시 헨(Hen)의 <푹> 노래를 듣는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까,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도." 무지개가 왜 좋은지 굳이 수학적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듯이 사랑 또한 그러하다.
사랑은 늘 한결같다. 한결같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변함이 없어야지. 모난 티끌까지 품을 줄 알아야 한다. 꽃을 피우건, 낙엽이 지건 나무는 나무이다. 차갑던, 뜨겁던 물은 물이고 설레던 사람이 편안함만 남았어도 그 사람은 그 사람인 것을.
23살의 내가 꿈꿨던 사랑은 정의역이란 견고한 설정과 합쳐져 비로소 누가 와도 기댈 수 있는 튼튼한 벚나무가 되었다. 나는 이제 77억 개의 동전 산더미 속에서 나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상수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 나는 이미 그 산에서 가장 고유한 빛을 내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톱을 든 이들에겐 단호한 거부의 침묵을 그리고 투명하게 망가져 내 곁에 선 당신에겐 이유 없는 '푹' 빠짐을.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된다는 미정의 말처럼, 나는 오늘도 나 자신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나지막이 말해본다.
"그냥 그렇게, 당신을 쭉 좋아해 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