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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Sep 17. 2024

대체로 우중충하다가 잠깐 갠다면

해독여행_유럽

 런던에 도착한 지 다음날부터 계속 날씨가 우중충했다. 영국 날씨는 악명이 높으므로 예상 못한 건 아니었지만, 4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날씨가 안 좋다 보니 기분도 가라앉았다. 6월인데도 런던은 매우 추웠다. 초여름은 남유럽에선 더운 시기지만 서유럽권은 아직 쌀쌀했다. 그걸 몰랐던 나는 얇은 여름옷들 위주로 가져온 것이다. 살색 스타킹에 원피스, 긴팔 남방을 걸치고 추워서 벌벌 떨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회색 하늘에 돌아다닐 의지를 잃었다. 



대관람차인 런던 아이를 타고 빅벤과 템즈 강을 위에서 내려봤다. 그 외엔 더 이상 여행을 하고 싶지 않았고, 추워서 잠바를 사고 싶었지만 예산이 빠듯해서 더 참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기분은 참아지지 않았다. 여행 왔으면 즐겁게 다녀야 하는데 난 왜 우울해하고 있는 걸까? 처음 와본 외국의 교통 시스템, 지리도 잘 모르겠고 어렵기만 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어졌고, 앞으로 여행이 많이 남았는데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20대 중반의 나는 아직 애구나, 실감했다. 



 거리를 걷는데 추워서 온몸이 떨렸고 실내로 가고 싶었다. 무슨 영화를 보려고 혼자 왔나, 하다가 영화를 보기로 했다. 숙소로 가면 더 우울할거고, 극장에라도 가서 앉아 있자는 마음이었다. 작은 동네 상영관엔 마침 <매드맥스>가 걸려 있었다. 영국 극장은 한국 극장에 비해 낙후돼 있었다. 관은 50석은 될까 싶게 DVD 관에 온 듯 작았다. 의자도 20년은 돼 보였고, 천장도 낮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영화를 보고 나니 전보다는 기운을 찾았다. 무기력하던 기분이 미친 맥스와 퓨리오사가 이끄는 도파민에 조금 감화되어 끌어올려졌다. 매드맥스가 아니라 다른 영화였어도 기분이 나아지긴 했을 것이다. 처음 혼자 여행을 오니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하다며 기분을 달래보았다. 




소호 쪽으로 옮기니 날씨가 차차 개었고, 거리가 아름다워 보였다. 빨간 이층버스와 빨간 전화부스가 새로 페인트칠한 듯 밝아졌다. 하이드파크에 갈 때쯤엔 지도에서 하이드파크 부분을 도려내서 남유럽으로 옮긴 것 같았다. 날씨가 여행의 8할이라더니 이렇게 사람 기분을 뒤흔들 줄이야. 하이드 파크는 영국 왕실 소유의 정원을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라고 한다. 면적이 140만 제곱미터나 되는 거대한 곳. 


파란 하늘 아래 잔디밭에 주저앉아 오면서 포장해 온 <허밍버드 베이커리>의 레드벨벳 컵케잌을 꺼냈다. 한 입 베어 무니 진한 달콤함에 혀도 기분도 항복했다. 모든 게 사랑스럽게 보였다. 초록 지평선이 넓게 펼쳐진 이곳엔 청설모와 오리들이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거나 돗자리를 펴고 놀았다. 모처럼 갠 하늘에 다들 얼굴이 환했다. 



공원 안에 무인 자전거 대여소가 있길래 한번 시도해 봤다. 동전을 넣고 바로 후회했지만. 자전거도 못 타면서 무슨 생각으로 빌린 걸까. 나는 세 발, 네 발이 아닌 두발자전거 타는 것에 성공한 적이 없는 인간이다. 바로 반납하려다가 옆에서 자전거 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처럼 되고 싶어졌다. 억억거리면서 애써 균형을 잡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페달을 밟아봤자 몸통이 흔들리니 새끼 기린처럼 온몸을 비틀거렸다. 결국 패잔병처럼 10분 만에 반납했다. 


그야말로 ‘뻘짓’이었지만, 안 하던 짓을 시도한 내가 조금 마음에 들었다. 혼자 여행와서 하는 모든 시도가 자전거 같다. 처음 보고 홀딱 반해서 이것저것 해보지만 익숙하지 않아 금방 관둔다. 깔짝깔짝하는 시도들 속에서 재미를 느낀다. 내가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는지 알아가는 단계인 것 같다. 대학을 졸업했으니 학생 시기는 끝났지만 말이다. 



서펜타인 호숫가 근처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으니 햇살을 가로질러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에 등을 기대어 책 읽는 남자였다. 세상 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 책에 빠져있는 모습이 옆에서 다람쥐가 도토리를 주워 먹는 모습만큼이나 한갓지고 자연스러웠다. 이 평화가 오래 가진 않았다. 한 아랍인이 벌건 대낮에 벤치 옆자리에 앉아 속삭였다. 물담배를 하러 가자고, 키스하고 싶다고. 나는 진저리를 치며 뿌리치고 말했다. 

“Koreans don’t do like that. 한국에선 그런 거 안 해요!” 



잠깐 기분이 상했지만 공원은 넓었고 평화를 찾을 만한 풍경이 많았다. 나는 나와의 대화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바로, 내게 엽서를 써보는 것이다. 어제 기념품 샵에서 영국 로고와 문구가 있는 엽서를(Keep calm and stay) 몇 장 샀는데, 왠지 오늘을 기념해 내게도 써보고 싶었다. 잔디밭에 청바지 차림으로 털퍼덕 앉아서 펜으로 술술 써 내려갔다. 여행와서 글로 정리하는 것이 의외의 기쁨과 위로를 주었는지, 쓰는 내내 미소 짓게 되었다. 써놓고 보니 줄 긋고 다시 쓴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정제되지 않고 중구난방 쏟아낸 감성이지만 뿌듯해졌다. 그때의 서툰 생각과 감정은 다시 안 오니까. 유치한 내 모습 그대로 관대하게 봐주고 싶었다.






 "
런던아이도 타고, 극장도 갔고, 하이드파크도 왔고, 엽서 써서 속마음 쓰기도 하고 있다! 오늘은 4개나 한 날이네. 혼자 잘 즐기고 있지만 사실은 엄마, 친구들이 보고 싶다. 이상한 아저씨도 만났고… 공원에 앉아 있으려니 심심하니까 나에 대해 생각한 걸 써보고 싶다. 나는 참 이중적이고 알 수 없는 사람이다. 허당이라 정신을 잘 놓고 다니지만, 집중할 땐 잔머리가 잘 돌아간다. 차분하지만, 은근히 흥이 많다. 새롭고 다양한 걸 좋아하지만, 불안정한 삶은 싫다. 순둥한 편인데, 독할 땐 독하다. 태도는 시크하고 마음은 여리다. 이렇게 모순되는 구석이 많아서 피곤하다. 


무엇보다, 생각이 너무 많다. 여기까지 와서도 나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알면 안 하면 될 텐데… 그래도 여행하고 있는 게 대견하고 좋다. 오늘은 햄버거도 많이 먹어서 갈증이 난다. 유럽의 수질 구려... 생수를 사 먹어야 하는데 에비앙은 비싸다. 내일은 벌써 파리로 가는 날이다! 비틀스의 애비로드, 노팅힐을 안 가본 게 아쉽지만, 영국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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