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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Jun 07. 2023

돌잡이

I’m Thirty Three 난 몹시 예민해요

 하나만 골라야 한다, 하나만. 오로라색 위시 리스트와 빨간색 생필품 리스트에 적힌 것들 중에서 딱 한 품목만! 


  위시 리스트에 든 애들은 어찌나 순하고 아름다운지. 언제 열어봐도 여유 있는 자태로 슴벅슴벅 긴 속눈썹을 자랑한다. 우구구구, 이쁜 것들! 언제 너희를 데려올 수 있을까? 아이구, 이뻐~ 아이구~! 이에 반해 생필품 리스트에 든 녀석들은 상당히 위협적인 송곳니를 드러내며 언제든 내 목덜미를 물어뜯겠다고 그르렁댄다.   “즉시 구비하지 않으면 후환이 따를 것…”   어휴. 알았어, 알았다고 이 자식들아…!   이 생필품 리스트에서 6개월 연속 1순위를 차지했던 프라이팬은 음식들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재촉했다. 그 녀석이 두부든 뭐든 올려놓는 족족 먹어 치우는 걸 보는 게 보통 열 받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렇다고 섣불리 만 원 이만 원짜리를 샀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그 꼴이 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무려 6개월이나 기회를 틈탔던 것이다. 하지만 통장엔 틈이 안 났지, 응. 


  I’m thirty three. 꾸준하게 쥐꼬리인 게 수수께끼인 월급을 가지고서, 몹시 예민하게 저울질 하며 산다. 이번 달엔 뭘 먼저 사서 채워야 인생이 무리 없이 굴러갈까? 


  가장이 되고 나서 인생의 색감이 변했다. 어릴 때 받아 쓰던 용돈은 비록 코딱지만 하긴 했어도 전기세나 수도세, 가스비나 대출금의 지분이 없었다. 먹고 자고 씻는 것 이외의 사치에만 돈 쓰던 나의 쨍한 시절. 스티커나 지우개, 열쇠고리 아니면 미미 발에 신길 구두로 바꾸던 나의 용돈…! 부족하다고 징징댔던 어린 날의 나야, 뚝 그치렴! 너 어른 되면 전기세가 그만큼이야, 그것도 다 네가 내야 하고. 좀 가혹하게 들리겠지만 진짜란다. 어른이 되면 네 예쁜 노랑에는 회색이 섞이고, 혼자서 세상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자신만만한 시기가 지나고 나면 일상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게 네 유일한 숙제가 된단다. 


  아유, 이렇게 다 큰 어른처럼 말했지만 지난달의 나는 무너져 내렸고 즙을 좀 짰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울 일은 아니었는데, 조금 눈물이 날 때 과장해서 울어버려야 앙금이 남지 않으니까 눈물 찔끔 나온 김에 콧물까지 흘려가며 울었다. 슈퍼에서 설탕이나 소금, 식용유나 간장 같은 것을 골라 담고 7만 원 나올 때 억장 무너지는 게 나뿐일까? 내가 뭘 그렇게 영양가 있게 먹고 산다고 7만 원인가, 7만 원이? 난 소문난 멸치 몸매고, 난 오늘 기본 품목만 샀어! 사치 품목은 과자 한 봉지라고! 게다가 질소가 많이 든 건 과잔데 왜 내가 터지는 거야…! 나는 좀 억울한 마음에 과하게 울었고, 금세 명분이 없어졌다. 봐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더 울어제낄 동력도 없었다. 그래서 입을 좀 삐죽댄 다음 눈물 슥 콧물 팽 닦고 밥 한 숟갈을 입에 욱여넣었다.

  ‘어휴 시발(始發, ‘자! 다시 시작이다!’라는 뜻), 인생은 기니까 울 땐 울더라도 져서는 안 된다.’

한 그릇을 알뜰히 비웠다. 


  내 노랑에는 회색이 섞였다. 노랑에 회색을 섞으면 베이지가 되지. 그래, 베이지. 얼마나 무난하고 예쁘냐. 우리 어른들은 베이지가 얼마나 활용도 높은 고-운 색인지를 생각하면서 때마다 무릎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울어야 할 일은 이것 말고도 많을 테니까. 


  내 일상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건 보통은 별것 아닌 것들이다. 간장 없으면 소금으로 치대고, 올리고당 없으면 설탕으로 문대고, 프라이팬 없으면 냄비로 살살 때우면서도 잘 굴러가는 듯하던 일상이 바로 그것들 때문에 무너지곤 한다. 간장 좀 없는 것뿐이었는데, 휴지 좀 간당간당할 뿐이었는데, 그게 그냥 간장 한 병 휴지 한 롤이 아닌 날이 오는 거다. 있어야 하는 것이 없을 때, 꼭 필요한 것을 포기하고 넘어가야 할 때마다 금 가던 마음이 걷잡을 수 없는 붕괴로 이어지는 날. 나는 내 위시리스트 속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 하나가, 없으면 다른걸로 비벼볼 수도 있는 생필품 중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울린다는 게 무섭다. 


  그래서 이번 달에도 생필품 리스트에 적어둔 물건 하나를 골라 샀다. 위시리스트는 이번 달에도 바이바이. 언제나 그렇듯 예쁜 얼굴로 거기서 조금 더 기다려주길…. 대신 얘 휴지야, 생리대야, 칫솔아, 간장아, 나를 좀 지켜다오. 내 일상을 좀 지탱해다오. 너희들이 있으면 다음 달엔 좀 나아지지 않겠니. 내년엔 뭐든 달라지지 않겠니. 


  별것 아닌 것들에 돈을 들여 나의 소중한 일상을 건다. 인생을 어딘가에 걸어야 한다면 이런 것들에 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삶이 한 방에 날아갈 일도 없겠지. 내 인생은 내 쥐꼬리를 나눠 산 휴지에, 칫솔에, 양말 위에 있는 거니까. 나를 무너뜨리려면 휴지 탑을 무너뜨려 보라지. 간장을 원샷 해 봐라, 양말에 구멍을 내든지! 근데 별로 타격은 없다! 또 사면 되니까. 


  내 첫 번째 생일에 나는 앞에 놓인 물건들 중 연필을 골라잡았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서른세 번째 생일을 넘긴 요즘은 매일 손에 돌을 잡아 쥐고 있는 것만 같다. 누가 그랬다. 손에 돌을 쥐고 달리면 더 오래 달릴 수 있다고. 어쩐지 끝도 모르고 오래 달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 돌을 쉽게 내려놓을 수가 없다. 이 돌멩이는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까?  






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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