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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May 03. 2023

털갈이

삶의 형태가 바뀌는 아주 드문 기회

  서울을 떠난 지 갓 1년이 넘었다. 얼마 전엔 일자리까지 이곳에 잡았으니 나는 이제 웬만하면 서울에 가지 않고도 생활이 되는 ‘완전 로컬'이다. 이사 후 한동안은 서울과의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 물리적 거리도 가깝다는 착각에 빠져 사느라 고생을 좀 했는데, 요새는 정신 차렸다. ”사당역? 거기 내가 잘 알지. 이수역 거기, 바안포? 챠-하, 눈 감고도 훤하지. 어, 그래 거기서 보자. 강남역? 조-취.”하다가 좌골 신경통이 찾아와 내 뚝배기를 쳐 주었기 때문이다. 좌골 신경통이 말했다. “이 파-보야~! 왕복 네 시간은 결코 가까운 것이 아니야!” 나, 차 없는 경기도민- 이제 웬만하면 경기도를 벗어나지 않기로 했다. 아, 경기도여... 너는 서울과 얼마나 가깝고도 먼지.


  서울을 떠나는 데는 일정량의 용기와 환멸과 등 떠밀림이 필요하다. 용기만 가지고 떠났다가는 밤이 되어도 반짝이는 시내와 북적여서 활기찬 느낌 같은 것이 몹시 그리워질 수 있고, 환멸만 가지고 떠났다가는 인간은 어딜가나 똑같다는 걸 깨닫는 데 한 달도 걸리지 않는다. 도리어 세련된 ‘척’이라도 하는 대도시 사람들이 낫다 싶을 때가 생기기 때문에 함-빡 질려버려서 이중으로 고통받을 수 있다. 또 등 떠밀려서만 떠났다가는 남은 생애 내내 모옵시 억울한 기분에 사로잡힐 수 있고…. 난 이 세 가지가 적절한 비율로 배합되는 기회를 타서 서울을 떠났다. 서울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용기가 차오르는 시기에, 숨 쉬기도 힘들만큼 촘촘한 인구밀도에 조금 울렁울렁하다가, 집값이 폭등해 주어 표면 장력 무너지듯 차르르 흘렀다. 흘러서 흘러서 경기도로 온 것이다.


때때로 우리에게도 털갈이가 필요하다. (…) 실연, 죽음, 실업, 환경의 변화와 같은 묵직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우리에게는 비로소 새로운 살이 돋아나고 삶의 형태가 바뀐다. 하지만 이런 기회는 아주 드물다. p.18 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


  30년 넘게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게 쉬운 결정일 수는 없는데, 어쩐지 그게 쉬워지는 시기였다. 털갈이를 하는 새들처럼 나에게도 비로소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열리는 것인지… 이 털갈이라는 것이 옴짝달싹 못하게 붙잡혀 억지로 털이 뽑히는 방식이었던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드문 기회가 나에게 온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잡아야지. 받아들여야지.


  새로운 살이 돋아난다

  삶의 형태가 바뀐다

  아주 드문 기회.


  털 뽑히던 당혹감과 민둥민둥 드러난 맨살을 보며 느꼈던 절망감 같은 것을 ‘아주 드문 기회'라는 말속에 담는다.


  처음에 이 이사는 여행의 첫날 같았고, 이내 여행의 마지막 날처럼 되어 곧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되었다가, 이제는 내가 돌아올 곳이 여기라는 걸 아는 걸로 자리 잡았다. 아주 드문 귀한 기회로 나는 서울 아닌 생소한 리듬에 오래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리듬과 묘하게 어긋나 나를 당황케 하던 이곳의 리듬이 나의 새로운 기준이 되어간다. 이곳에 비하면 서울의 비트는 너무 잘게 쪼개져 있어 그걸 타려면 잔뜩 긴장해야 한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긴장한 몸으로 살아온 건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심장이 비대해지고 뇌 회로가 촘촘해진것도, 그렇게 커진 심장이 과하게 자기주장 할 때마다 공황이 오고, 뇌 회로가 지직거릴 때마다 신경쇠약이 왔던 것도 그 리듬과 무관하진 않았겠거니 한다.


  나는 이곳의 낮고 듬성듬성한 건물들을 보면서 ‘시골 같다'는 말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빈곤한 사람이다. 다만 아침마다 버스를 타고 털털털 내천을 따라 내려가, 회전 교차로를 돌아 신호등 없는 큰 길가의 버스정류장에 덩그라니 내리자면, 버스가 붕 떠나가고나서 보이는 신호등 없는 5차로를 눈치껏 건너 새 일터로 가는 산길을 오르자면, 자유롭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도시마다 각자의 리듬이 있다. 공간마다 흐름이 있어 시간도 다르게 흐른다. 내가 타고 있는 지금 이 리듬은 수많은 리듬 중 하나다. 매일 것도 답답해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아주 드문 기회는 드물지만 계속해서 찾아올 것이다. 언젠가 조금 더 느려도 된다는 용기가 생기는 날, 그런 용기가 생길 만큼 숨이 깊어지는 날, 나는 경기도를 떠나려고 한다. 또 다른 리듬을 가진 곳으로. 그때까지는 빨간 버스를 타고 서울에 방문했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며, 매번 서울과 멀어지는 기분을 한껏 즐기려고 한다. 도망 같기도 하고 유배 같기도 하고, 대부분 스스로 찾은 해방 같기도 한 기분을.





20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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