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가 기억하는 사람들
아침 일찍 여는 동네 카페에는 아르바이트생이 준비해 준 착한 가격의 모닝커피가 있다. 여전히 음악도 내 취향이라 좋고, 2시간 이상 책을 읽다 가도 눈치 줄 주인 없는 더 좋다. 그렇게 스터디카페의 의자들은 각자 아무 말 없이 우리를 기다렸다.
이상하게도 의자가 나를 기억이라도 하고 잡아당기듯
끌리는 자리가 있어 나는 늘 뷰좋고 에어컨 바람도 적당한 세 번째 테이블로 정해놓고 앉는다.
혹시라도 늦게 오게 되는 날이면 그 자리는 낯선 이의 자리가 되곤 한다.
이름이 적힌 것도 아니고, 주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리만큼 한 사람씩 꼭 그 자리에 앉게 되는데
나도 어느새 1년 넘게 주말아침이면 어김없이
이곳에 익숙한 자리를 꽤 차고 있었다.
자리를 고른 것이 아니라, 어쩌다 거기에 놓인 삶이 하나씩 자리에 뿌리내린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는 매주 주말마다 같은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눈도장이라도 찍듯 익숙한 사람들이 있다. 이름도 모르고, 말을 섞은 적도 없지만
나는 그들이 앉을자리를 안다.
같은 소파 자리에 앉는 그 중년의 남자.
깍 마른 몸에 멀대같이 끼가 크고 조금은 예민해 보이는 곱슬머리의 아저씨, 폭신한 가죽에 등을 기대고, 책을 차곡차곡 쌓아놓을 때면 자기만의 하루를 견디는 방식처럼 왠지 모를 건조함과 외로움이 묻어났다.
가끔 다리를 꼬고 반쯤 운동화를 벗어 덜렁이며 다리를 흔드는 모습은 내 눈을 거슬리게 했다. 그러나
아저씨만의 숨 쉴 구멍처럼 느껴졌고
'읽는 행위' 그 자체로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만 같아
조금 이해해 보려는 마음이 생겼다.
그건 나만의 생각이지만...
희한하게 카페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
시간까지도 어김없이 일치하고 그들만의 세상 안으로 들어온다. 창 가까운 테이블엔 선캡을 쓴 50대 여성이 한결같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시릿한 눈으로 먼산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빠른 속도로 커피를 마시고 운동 후의 땀이 마르기도 전에 일어서곤 한다. 주변 사람들의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의식이라도 한 듯.
그리고 한쪽 구석. 벽을 등지고 앉은 젊은 여성. 조만간 자격증시험이라도 치를 듯이 자주 눈에 띄었지만 책 읽는 모습을 본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녀의 얼음을 씹는 소리는 유일한 존재감처럼 카페 안에 툭, 하고 부딪친다.
그녀는 집중하지 못하고, 가끔 고개를 들어 벽을 응시한다. 그리고 핸드폰을 자주 만지작 거렸다.
나는 그 눈빛을 본다. 어딘가 닿지 못한 생각들이 그 안에 엉켜 있는 것을. 어쩌면 그날 그녀는 '머무는 연습'을 하러 온 건지도 모른다.
움직이지 않는 의자에 앉아, 자신의 마음을 기다리기 위해.
나는 그들 사이에서 잠깐씩이었지만 관찰 일지라도 쓰듯 그들을 훔쳐보는 일은 나에게도 자연스러운 일이 돼버렸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자기 삶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조용히 존재하고 있는데 내 시선에 익숙하게 자리 잡은 사람들 그리고 그걸 눈에 담아냈던 나.
어쩌면 삶은 그렇게 누군가가 있던 자리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그 젊은 여자는 오지 않았고 , 새롭게 눈에 띈 연세 지긋한 여성분이 책 읽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이모님 뻘 돼 보이는 그분의 머릿결에서
희끗한 머리칼은 마치 오래 쓰다 은빛이 감도는
부드러운 실타래 같았다.
그분은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느렸지만,
그 느림 속에는 서두름 없는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한 장 한 장마음속에서 꼭꼭 씹어 삼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분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책 속 문장을 곱씹는 표정,
가끔 페이지 위에 손가락을 멈추는 순간마다
그분의 지난 시간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듯했다.
아마도 그분에게 책 읽는 시간은 세상과의 거리를 부드럽게 두는 방법이자, 자신만의 온기를 지키는 방식일 것이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내 마음의 공허한 자리를 살짝 덮어주는 듯했다.
나는 그분들이 읽고 있는 책 제목이 가끔은 궁금했을 테고 그날의 그날의 장면은 쉽게 사라지고 없겠지만 주말이 다가오면 각자의 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또 한 공간에서 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읽고 있겠구나 싶었다.
한 권의 거대한 책 속에 함께 머무는 듯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