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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l 30. 2015

#1 당신은 홈런 타자입니까

내 삶은 왜 화려하지 않을까, 하는 물음에 대하여 

지인 중에 직장생활을 하다 단박에 대학 교수로 임용된 형이 있다. 


늘 슬리퍼에 츄리닝 반바지로 검도장에 왔다가 "미안, 나는 애기 돌봐야해서"라며 먼저 들어가는 형이다. 어쨌거나 요즘 세상에 직장인이 교수로 전직하기가 좀 어려운 일인가. 게다가 이 형은(형의 설명에 따르면) 스타급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요, 박사 논문이 토르의 망치 뺨치게 묵직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서울 소재 대학에 정규직 교수로 입성하였으니, 그 비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10년 넘게 같은 도장에서 시퍼런 멍을 주고 받아온 사이인 덕에 편의점 포카리스웨트 한 캔으로 성공의 핵심을 전수받았다. 요컨대 이런 이야기다.

 

"우선 제일 중요한 건, 자기가 홈런 타자인지 안타를 치는 타자인지 아는거야. 그런데 나는 홈런 타자는 아무리 봐도 아니더라고. 그래서 부지런히 안타를 때렸지. 그러다 보니 나한테 가능한 기회가 보였어."



홈런형 타자란 단 한 방으로 세상을 들썩일 수 있는 사람이다. 


흐름을 선도하고, 업계가 수군대고, 카메라 셔터를 동시에 터뜨리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다. 그들은 몇 년씩 갈고 닦아 성경책 두께의 논문을 써내거나, 완벽을 기할 때까지 수정하고 수정하면서 대박 베타 서비스를 출시한다.


안타형 타자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 


개개의 성과물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크게 주목하는 일도 없다. 스포츠 신문 1면의 이름 석자 대서 특필은, 아마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게다. 짧은 글을 개미처럼 써내고 작은 사업을 아메바처럼 실시한다. 비록 커다란 소득은 없지만, 적어도 폭삭 망하는 길은 요리조리 피해가며 커리어와 실력을 쌓아간다.

 

물론 매 타석마다 홈런을 치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홈런을 노리기 어려운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자신감 문제다.

 

공을 100m 너머 담장 밖으로 날려보내려면 빅 스윙을 해야 한다. 하지만 스윙과 정확도는 반비례 관계. 잘 맞으면 좋지만, 맞히지 못하면 방망이는 붕붕 돌아가는 선풍기에 다름 아니다. 전형적인 홈런 타자가 삼진 아웃이 많은 이유다. 말이 좋아서 High risk, High return이지 삼진을 먹더라도 계약 연봉이 꼬박꼬박 나오는 스타 선수들과 달리 보통의 생활인들은 몇 번만 폭삭 망하면 재기가 쉽지 않다. 이번 스윙이 홈런으로 이어지리란 확신이 없으면 올인은 힘들다.

 

둘째, 그래서 이어지는 것이 자본의 문제다.

 

빅 스윙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껏 준비해서 휘둘렀는데 제대로 얻어내지 못하면 오랜 준비가 허송세월이 된다. 다음 타석 올 때까지 견디느니 시간이요, 줄어드느니 은행 잔고다. 그렇다고 삼진 두 번에 홈런 한 번 하는 식으로 성공이 순서표를 뽑고 기다릴리도 만무. 온갖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곳이 세상인지라 다음 타석에는 어떤 변수에 휘둘릴지 알 도리가 없다. 자본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이 홈런에 인생을 걸기 힘든 이유다.

 

셋째,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의 성향이 다르다.

 

화끈한 대포 한 방을 좋아하느냐, 확실한 소총 연사를 좋아하느냐도 어쩌면 무의식에서 비롯된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각각의 매력과 장점이 있지만 그래도 어느편이 더 끌리는가 질문을 받는다면 한 가지를 택할 수 밖에 없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서재를 꽉 채울 정도로 많은 책을 써낸 반면,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 한 권을 역사의 서재에 꽂은 이후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았다. 중국 후한 말기의 제후였던 원소는 대규모 병력의 위풍당당한 진군을 좋아했지만,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는 소규모 베테랑 부대의 기동성을 사랑했다. 일본의 지겐류(示現流)는 일합에 적을 베는 큰 칼을 강조하는 반면, 중국 영춘권은 1초에 여덟번 주먹을 뻗는 스피드에 목숨을 걸었다.



나는 어느쪽일까.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는 학교에 들어와도 한글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이 제법 있었다. 날마다 하느니 받아쓰기 시험. 지우개로 지우면 부욱 찢어지는 시험지 뒤에 받아쓰기를 해오는 것이 숙제였다.

 

엄마가 불러주는 단어를 받아쓰기하여 동그라미, 가위표로 채점을 해오면 선생님이 색종이에 작은 도장을 찍어주었다. 요즘 말로 쿠폰인 셈이다. 받아쓰기 숙제는 10개. 10개를 빠짐없이 하면 쿠폰 한 개를 받았다. 그렇게 받은 쿠폰을 몇 십장 모은 학생에게 선생님은 연필이나 노트같은 선물을 주셨다.

 

글쎄.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다. 


내 기억에, 30cm 자로 10개의 칸을 만들다가 실수로 몇 개를 더 만든 날이었을 것이다. 빈 칸을 공백으로 남기기 멋쩍었는지 나는 아예 몇 칸을 더 그려 20개를 채웠다. 즉, 남들보다 숙제를 두 배로 해간 셈이다. 다음날 선생님은 쿠폰 두 개를 내게 주셨다. 나는 운이 좋았다. 더 많이 하면,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선생님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만일 받아쓰기를 20개 해간 날 똑같이 한 개의 쿠폰을 받았거나, '너는 왜 시키지도 않는 일을 하느냐'고 핀잔을 들었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지 못했으리라.

 

40개, 60개, 80개, 나의 받아쓰기는 날마다 불가사리처럼 늘어났다. 단어를 부르고 채점하느라 엄마는 저녁 시간 내내 쉬지 못했다. 더 이상 칸을 그릴 종이가 없었다. 한 장의 시험지에는 최대 200개의 칸을 그릴 수 있었다.

그 때의 성공 경험이 각인된 까닭일까. 나는 늘 양으로 하는 전략이 좋았다. 그래서 한 방에 인생을 역전시키는 거포보다는 거의 실패할 일 없는 똑딱이 타자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유일하게 즐겨보는 스포츠인 프로야구도 마찬가지다. 붙박이 4번 홈런타자 김태균보다 안타든 볼넷이든 나왔다하면 죽지 않고 살아나가는 똑딱이 1번 이용규가 좋다. 예전에 미국 메이저리그를 볼 때도 폭죽같은 홈런을 펑펑 터뜨리는 마크 맥과이어나 새미 소사보다 '10년 연속 200안타' 스즈키 이치로에 관심이 갔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한 번 한 번 살아나가야 하는 보통 사람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서른 해 넘는 시간을 되돌아보건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꿈같은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분명 나는 운이 좋았고, 종종 귀한 인연을 만났으며, 큰 고생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금마차에 저절로 올라타는 식의 '대박'은 정말 그런 일이 세상에 있긴 있느냐고 묻고 싶을 만큼 구경조차 한 일이 없다. 수능 점수도, 작은 사업도, 취업과 집필도. 언제나 최상의 기대치와 최하의 마지노선 사이에서 예측 가능한 모습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이따금 이렇게 다짐한다. 


세상은 손을 뻗는 만큼만 닿을 수 있는 거라고. 뜻밖의 여정이 펼쳐지지 않는다고 답답해서도 안된다고. 한 타석 한 타석 아웃당하지 않고 매번 진루타를 때려내는 것이 내가 살 길이라고. 안타형 타자는 한 방 한 방으로 화려한 것이 아니라, 지나온 길의 누적으로 빛나는 거라고.

 

그러므로 나에게 바라건대, 오직 부지런하기를. 뒤로 자빠지지 않고, 냅다 휘두르지 않고, 공을 끝까지 보면서, 기회와 가능성을 붙잡고 끈질기게 늘어지기를. 보통 사람은 양으로써 질을 빚어내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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