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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Oct 13. 2015

#136 허리를 아야했다

나를 죽이지 않는 모든 것은 나를 강하게 할 뿐이다

허리를 아야 했다.


물론 '아야'라는 말은 다소 불명확하고 퍽 유아스러운 표현이라 시커먼 30대 배 나온 아저씨가 사용하기에는 상당히 부적절하다. 하지만 '다쳤다'고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부상은 못되고, '삐끗했다'고 이야기하기엔 딱 들어맞는 설명이 아닌 까닭에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그저 '아야야' 소리가 나는대로 아야했다고 쓰는 중이다.


사흘 전이었다. 소금자루를 날라서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야 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허리 통증으로 한의원 치료를 오래 받아본 병적이 있는지라 짐을 들고 나르는 일에 무척 조심스럽다. "그 덩치에 그것 밖에 못 드나?" 하는 눈칫밥을 먹어야 할 때도 있지만, 눈치는 잠깐이요 허리는 영구하니, 자존심 따위보다 다치지 않음이 훨씬 우선 순위다.


내가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짐을 드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FM 자세의 유지'요, 둘째는 '차라리 한 번 더'.


먼저, FM자세의 유지. 무거운 짐을 들 때는 하여간 앉아서 들어야 한다. 앉은 자세에서 일단 들고 그 다음에 일어서는 것이다. 올림픽 역도 종목을 생각하면 쉽다. 인상이든 용상이든 우선 바벨을 들어올린 후에 다리를 편다. 최대한 허리에 무리를 주지 않는 방법이다. 쪼그려 앉는 동작이 귀찮다고 허리만 숙이면? 재수가 없는 날은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줍다가도 디스크가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차라리 한 번 더'. 나는 두 개를 한 번에 드느니 한 개를 두 번에 든다. 상자를 들 때도 그렇고, 마트에서 사온 장바구니를 나를 때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한 번 더 오가는 수고로움을 감수할지언정 허리 다칠 수 있는 가능성은 최소화한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할 때 조금 눈치가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남자들은 왜 이렇게 번쩍번쩍 드는 것을 좋아하는지. 간이 메밀만큼 작아 겁이 많은 나는 도저히 그렇게는 안된다. 결국 개미처럼 줄줄이 물건을 나르는데 나만 확연히 효율이 떨어지는 것이 드러나지만, 어쩔 수 없다. 연신 밝은 표정으로 '살살 드시지요. 다치십니다' 하고 립서비스라도 하는 수 밖에.


두 가지 원칙을 요령껏 활용하여 큰 허리부상 없이 군대도 마쳤고, 원룸도 이사했고, 회사도 다니고 있는 나다. 그런데 웬걸. 사흘 전의 소금자루가 내 발목을, 아니 허리를 잡을 줄이야.



마당 한 구석에서 자동차 트렁크까지 20미터 남짓. 그리 긴 거리는 아니었다. 소금 자루 20kg에서 몇 바가지를 덜어냈으니 기껏해야 15kg되었을게다. 아무리 내가 약하다 한듯 그 무게를 들지 못하고 쩔쩔매진 않는다. 


문제는 비였다. 


갑자기 후두둑 무섭게 쏟아진 빗줄기에 복대처럼 내 허리를 감싸던 주의력이 순간 씻겨내려갔다. 오직 빨리 실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게다가 빗줄기에 '소금'자루 아닌가. 평소라면 젖먹이 조카 안듯 엉덩이부터 조심스럽게 품었을 자루를 머리채 낚아채듯 한 손으로 휙 집어 종종걸음으로 이동했다. 트렁크를 열어젖힌 짧은 순간에도 빗줄기는 내 뒤통수를 무섭게 후려쳤다. 재빠르게 자루를 트렁크에 넣고 문을 쾅 닫았는데, 어라, 허리가 이상했다.


휴일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끙끙끙끙 12시간을 좁은 방안에 누워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척추뼈 두어개가 납덩이로 바뀐듯 묵직했다. 계속 아프면 어떻하지. 점점 심해지면 어떻하지. 물건 잘못 들다가 수술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나도 그러면 어떻하지. 그까짓 소금 자루 하나 들다 이리되었나 싶어서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억울하다보니 눈물도 꿀쩍꿀쩍 났다. 소금도 밉고, 허리도 밉고, 밥 되었으니 한 술 뜨라는 부엌의 엄마 목소리도 미웠다.


사흘이 지났다.


침을 맞았고, 찜질을 했고, 허리에는 그저 쉬는 것이 약이려니 여겨, 일이다 생각하고 10시간씩 누워잤다. 그리고 오늘 아침. 다행히도 일어나 보니 차도가 있다. 아직 힘은 없지만, 그래도 납덩이를 절반 넘게 떼어낸 느낌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지. 허리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며칠 지나면 낫긴 낫겠지 싶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이었다.


기분이 좋아지자 문득 재미있는 기억이 났다. 허리를 아야한 날, 방구석에 누워 비몽사몽 헤매면서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더랬다. 


'이것만 나으면 하루도 빠짐없이 코어 근육을 단련할거야.' 


결의인지 기도인지 구분이 안가는 목소리로 베게에 얼굴을 파묻은 12시간 동안 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던 게다. 운동해야지. 운동해야지. 낫기만 하면 코어근을 단련해야지.


나를 죽이지 않는 모든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라고 니체가 그랬던가. 이 허리. 낫기만 나아다오. 다시는 아플 일 없게 식스팩과 코어근으로 칭칭 감아줄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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