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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Mar 04. 2016

#163 언젠가는 닿게 될 80살의 나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일이다

무언가 특별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잘 쓰려고 의도한 글이 실제로 잘 쓴 글로 나오느냐,하면 경험상 별로 그렇지는 않다. 좋은 글이란 일단 많이 쓰는 일이 우선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홈런이나 안타를 날리는 나름의 비율이 있다. 우리는 그 타율을 가르켜서 '실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타율이 형편없는 이가 최대한 많은 안타를 치는 간단한 비결은 최대한 많이 타석에 들어서는 데 있다. 그리고 평범한 우리들이 프로야구 선수보다 유리한 점 하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오더에서 빼버릴 감독이 없다는 점이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해서 좋은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은 잘 알지만, 어쨌거나 나는 200번째 타석을 맞아 가능한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다. 기름을 잘 먹인 배트를 들고, 손에 꼭 맞는 장갑을 끼고, 허리를 끙차끙차 돌리며 준비를 마친 후에 하얀 선이 그려진 네모난 박스 안에 발을 딛는다.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제법 괜찮은 스윙을 하리라 다짐하는 것이다. 그 스윙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일이다."로 시작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준 것 같다."로 끝난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일이다. 


우리 학교는 남녀 공학이었는데 반 구성은 남녀가 따로였다. 그 때는 동아리 활동도 없었기 때문에 말이 남녀 공학이지 3년 내내 여학생에게 말 한 번 섞지 못하고 졸업하는 남자들이 부지기수였다. 물론 어디에나 체육을 잘하거나, 눈에 띄게 잘 생기거나, 선천적으로 연애에 능한 학생들이 있기 마련이어서 극심한 가뭄 중에도 기적처럼 싹을 틔우듯 알아서 살 길을 찾는 친구들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남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난 콩잎처럼 하염없이 말라갔다. 


당시 내가 마음에 담아두던 여학생이 있었다. 얼굴은 알고 이름도 알았지만 일부러 그쪽 반으로 찾아가지 않는 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전혀 없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진학할 고등학교를 정해야할 때가 닥쳤다. 거기는 비평준화 지역이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선택해서 갈 수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인근의 유명 사립고 진학을 희망한 반면 나는 새로 생긴 공립 고등학교에 지원할 예정이었다. 어느날인가 스산한 가을 바람을 타고 그 여학생이 나와는 다른 학교로 가게 될 것이란 소문이 들려왔다.


나는 어떻게든 그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너는 어디로 가니,라고. 그렇지만 복도를 가로질러 그 학생의 반에 들어가 말을 건넨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오다가다 만날 것을 기대하며 복도를 서성거리는 것도 이상했다. 결국 말을 붙일 수 있는 기회는 하교길 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 학교는 아주 시골이어서, 학교 정문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20분 거리였다. 좌우에 비닐하우스가 펼쳐진 시골길을 따라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삼삼오오 하염없이 걷곤했다. 


하교 시간은 비슷하고, 하교 길은 길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건네자면 그럴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길고 긴 학생들의 행렬 어딘가에 그 학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삼삼오오 친구들과 걷고, 그 학생도 매일 삼삼오오 걸어갔다.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뒷모습이 보이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안녕"하고 말을 붙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늘 실패했다. 겁이 났기 때문이다. 나는 선천적으로 연애에 능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선천적으로 낯선 사람에게 말을 잘 던지는 사람도 아니었다. 어느 학교를 가느냐고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도 한 달이 넘도록 차일피일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결국 하루하루, 날짜는 겨울방학을 향해 다가갔다. 중학교 3학년 우리들에게 겨울 방학이란, 작별 인사와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서 삼삼오오 걸어가는 그 학생의 단발머리 뒷모습만 바라 본 채, 역시 인사를 건네지 못한 어느 날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쿠크다스처럼 얄팍한 나의 용기와 겨우 한 줌 남짓 남은 등교일을 원망하며 방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어느 학교를 가느냐고 묻는다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뾰족한 수가 있다 해서 앞으로 뭘 어쩌겠느냐는 소심한 생각들이 내 방 천정을 가득 수놓고 있었다. 역시 안되는 사람은 안되는 거다. 포기한 이에게 핑계거리를 찾는 일은 미지근한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쉬웠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일 내가 저 학생에게 말을 붙인다면 나는 창피를 당할 수도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면, 얼레리꼴레리 놀림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면 내일의 나는 분명 부끄러울 것이고, 졸업하기 전까지 내내 괴로워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80살이 된 후에 지금 이 순간을 돌아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80살이 된 나는 열다섯의 나에게 어떻게 행동하라고 이야기할까.'


바로 그 때였다. 


'80살의 나'를 떠올린 순간 방 전체가 빙빙 도는듯 현기증이 났다. 모든 문제가 명확해지고, 모든 괴로움이 벽지에 있는 손톱만한 무늬보다도 작게 느껴졌다. 80살의 나에게 열 다섯살 나의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80살이 되리라는 점은 분명했다. 


다음 날, 나는 삼삼오오 하염없는 그 하교길에서 그 학생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쫓아가 "안녕"하고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삼삼오오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교통 사고 장면이라도 목격한 듯 흥분했기 때문에, 교통 사고의 당사자인 그 학생은 제대로 인사도 받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그 일은 거기까지였다. 


그것이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중학교 주변의 비닐하우스는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고, 삼삼오오 하염없는 하교길은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은 그 학생도, 그 학생 옆에서 흥분했던 아이들도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열 다섯살 나의 마음을 가득 메웠던 창피와 괴로움과 두려움 역시 딱딱한 화석처럼 흔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열 다섯살의 그 날 저녁. 방바닥을 뒹굴던 나에게 번갯불처럼 파고든 그 생각은 지금도 손가락 끝에 닿은 면도날처럼 선뜻한 느낌을 주곤 한다. 80살의 나. 언젠가는 닿게 될 80살의 나. 


사람들이 내게 종종 스트레스가 적어 보인다고 말한다. 사실 이런저런 갈등이 있더라도 크게 흥분하지 않는 편이다. 괴로운 일과 부딪혔을 때 나름의 방식으로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 찌푸린 주름을 펴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성격이 엄청나게 좋다거나, 배포가 크다거나, 참을성이 탁월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이고 보통의 존재다. 다만 그 때의 그 기억 때문이다. 

80살의 나. 언젠가는 닿게 될 80살의 나. 


지금 나는 이것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정말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순간에 처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절대로 최악의 상황에 놓인 것은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이 순간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언젠가 우리는, 우리가 손에 쥔 모든 것을 다 내놓아서라도 바로 이 순간과 바꾸고 싶은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가 죽음을 눈앞에 두는 날이다. 


우리는 언젠가 80살이 될테고, 또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된다. 삶을 마감할 그 순간의 우리가 돌아본다면,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겪을 그 어떠한 창피함도, 괴로움도, 걱정도, 두려움도 전부 다, 벽지에 있는 손톱만한 무늬보다도 작게 느껴질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무슨 공부를 하고 있으며, 어떤 지위에 있는가와 아무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될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단지, 언젠가 죽게 될 운명인 우리가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하루 하루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20년 전, 나는 결국 그 학생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지 못했고 그 학생은 어디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건대 그 때 그 학생은 아마도 나에게,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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