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어느 작가의 특강 행사에서 스태프로 일을 했다. 한창 인기 있는 유명 작가라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강의가 끝나고 저자 사인회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 작가가 이렇게 요청했다.
'사인은 이번에 새로 나온 신간에만 하겠다.'
그런데 청중 중에 새 책을 구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서울이 아니라 지방이었기 때문에 서점에 책이 충분하지 않았다. 특강 행사장에서 준비한 현장 판매 물량도 한 사람이 두 권, 세 권씩 사는 바람에 턱없이 부족했다 한다. 결국 사람들은 손수건이든 A4 종이든 닿는대로 손에 쥐고 길고 긴 줄의 끄트머리에 늘어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작가는 스태프들에게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이야기했단다. 사인은 이번 신간에만 하겠다.
나는 처음에 '연예인 취급'을 받기 싫어서 그랬던 걸까? 라고 생각했다. '연예인 취급'이 뭐 어때서 그러느냐, 라는 이야기는 논외로 하고, 내가 아는 어느 교수님은 종이나 사진에는 절대로 사인을 하지 않았다. 나는 연예인이 아니라 학자다, 라는 이유였다. 어쨌거나 그 분은 본인의 책을 가져오는 사람들에게 볼펜이 아니라 붓으로 정성껏 글씨를 써주셨다.
하지만 지인의 말을 들으니 이 작가는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던 예전 책 위의 사인 요청도 거절했다. 사인은 이번 신간에만. 스태프들은 항의하는 청중들을 긴 줄 밖으로 내보내느라 고생이었다.
얼마전 <무한도전>에 할리우드 탑 스타 잭 블랙이 출연했다. 장안의 화제였고, 그럴만 했다. 어느 인터넷 신문 기사의 표현대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많은' 특집 프로였다. 무한도전을 챙겨보지 않는 나도 몇몇 주요 장면을 보며 킬킬 거렸다.
그런데 그 특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잭 블랙이 "심쿵해"를 부르는 장면도, 물이 꽉찬 축구공에 헤딩하는 몸 개그도 아니었다.
출연자가 다 같이 흥에 겨워 춤을 춘 장면이 있었다. 잭 블랙은 예능 교과서 답게 제일 앞자리에 나와 과격하게 몸을 흔들었고, 화면에는 '쉴 틈없는 촘촘한 구성' 같은 자막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 때 흥이 돋은 출연진 중 한 명이 갑갑했는지 자켓을 벗어 그 날의 통역을 맡았던 샘 해밀턴에게 건넸다. 뒤켠에 있던 샘은 그 자켓을 받아들고 주문을 기다리는 웨이터처럼 섰다.
거기 유재석이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춤을 추면서 샘에게 다가가더니, 자켓을 받아 밖에다 내놓고 돌아왔다. 슬그머니 말이다. 카메라는 잭 블랙의 춤에 포커스를 맞추었지만, 유재석의 움직임도 여과없이 잡혔다. 순식간의 일이지만, 나는 잭 블랙 특집에서 다른 어떤 화젯거리보다도 그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성공은 중요하다. 돈도 중요하다. 인기를 얻는 것도 중요하다. 그 모든 것에 목을 매는 이유는 성공과 돈과 인기가 우리의 행복을 구성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맞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가장 큰 행복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아닐까. 사람,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바로 그 사람. 옛말에 일기일회(一期一會)라 했다. 한 번의 기약에 한 번의 모임이 있을 뿐이다. 우연이든, 운명이든, 업이든, 하늘의 뜻이든, 바로 이 사람이 내 옆에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자리에 있을 한 번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기약에 따라 딱 한 번 모였다. 다음은, 아마도 없으리라.
한 번 뿐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사람도 한 번 뿐이라는 사실을 순간 순간 자각한다면, 최대한 성공하거나 수익을 극대화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순간 순간 행복할 수 있다. 인간(人間)이란 사람(人) 사이에서(間), 다른 무엇없이도 마음 만으로 행복을 지을 수 있는 힘이 있기에 인간이라 한 것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