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가끔 생각해보면 허무한 느낌이 들어."
"왜 때문에?"
"그냥. 이렇게 공부해서 무엇하나 싶고."
"공부하는게 힘들어서?"
"아니. 그것보다는, 뭐랄까. 이렇게 공부해도 똑같잖아. 졸업장을 따고 취직을 할테고, 다들 말야. 거의 비슷비슷하게 살게 될텐데, 잠도 참고 놀고픈 것도 참고 공부하지만, 그 끝이 다 비슷비슷하단 생각이 들으니 허무한 거 같아."
"끝을 생각하면 말이지?"
"응. 정해져있잖아. 이렇게 공부해서 어떻게 될지. 내 성격에 큰 사업을 벌일 것 같지도 않고, 대단한 일에 뛰어들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 사는 모습과 비슷할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허무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야하나 싶은 생각도 들고."
"... ..."
"내가 이상한가?"
"음. 끝이 있으니까?"
"응. 어떻게 될지 아니까."
그대로 잠시 말이 없었다.
머그잔에서 솟아오르는 김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괘종시계가 울리는 소리가 조심스레 들렸다.
"아니야, 아닌 것 같아. 끝이 정해져 있다고 필.연.적.으로 허무할 필요는 없어.
이렇게 생각해보자. 여기 어떤 아가씨가 고향의 부모님 집에서 같이 살고 있어. 그리고 이 아가씨는 내일 모레 결혼할 예정이지. 결혼을 마치고 나면 남편과 함께 신혼집에 가서 살게 될거야. 그래서 태어나고 자라온 고향집에서 보낼 시간이 내일 하루 밖에 남지 않았어. 이 아가씨는 자기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하루가 허무할까? 다음날이면 어차피 떠날거라서?"
"그렇진 않을 것 같아."
"이번엔 대학생을 생각해보자. 내일 모레 졸업식이 예정되어 있는거야. 그리고 내일이 마지막 수업인거지. 내일 있는 마지막 강의만 끝나면 이제 아마 평생 다시 캠퍼스를 밟을 일도, 수업을 들을 일도 없어. 어쩌면 강의실에 앉아보는 마지막 순간이겠지. 너가 그 학생이라면 어떨 것 같아? 내일 마지막 수업은 가기 싫을까? 어차피 모레면 졸업인데?"
"음. 아니야. 갈거 같아."
"그래. 그거야. 끝이 정해져 있는 것과 허무한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해. 아니 오히려, 끝이 있기 때문에 허무하지 않을 수 있어. 내일 떠나야 하는 아가씨는, 오늘 최대한 고향집을 가슴 속에 담겠지. 이제 졸업할 학생은 마지막 캠퍼스를 최대한 행복하게 간직할거야. 끝이 코앞에 닥쳤다는 사실을 안다면 순간 순간이 너무도 귀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우리가 허무한 느낌에 빠지는 것은 말야, 끝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끝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야. 공부에도 끝이 있고, 일에도 끝이 있고, 만남에도 끝이 있어. 그 끝이 손에 닿을만큼 가까이 와서야 지금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거지. 지금까지 잊고 살아온 그걸 말야.
그리고 있잖아. 사실 우리의 모든 것은 언제 끝이 날지 몰라. 공부도, 일도, 사람도. 감당하기 어려운 큰 일은 언제나 예고없이 찾아오잖아. 예고없이 찾아오기에 큰 일이고. 그런게 팩트지. 그래. 그게 팩트야."
"그래. 그게 팩트. 그래. 그래.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