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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Mar 14. 2016

#165 영어 단어 5분 암기법

어떤 공부법 책에서 영어 단어 암기 비법을 설명해놓은 부분에 눈이 갔다.


한 번에 5분씩만 집중하는데, 5분 동안에 무려 20개의 단어를 외우도록 한다고. 그렇게 전력질주를 반복함으로써 최대한 많은 단어를 외운다. 단어장을 잡아먹을듯 바라보며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가, "땅" 소리가 나면 손에 불이 나도록 암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요컨대 50m 달리기를 여러번 하는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니 나 역시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중학교 때였다. '한 시간에 100개 단어'라는 슬로건을 걸고, 폭식하듯이 단어장을 먹어치운 기억이 난다. 지겨운 단어 암기에 나름 목표와 시간이라는 기준을 넣어 두뇌게임처럼 만든 것이다. '5분 집중'에 비하면 1km 달리기처럼 중장거리 종목이긴 했지만 말이다. 


물론 그런 식의 공부법이 별로 효과가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문장과 문맥 속에서 습득하지 않고, 'apple은 사과' 하는 식으로 억지로 외운 어휘는 휘발유처럼 쉽게 증발해버리기 때문이란다. 맞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일견 가장 빠르게 보이는 길들은 종종 빙빙 돌아가는 길이거나 막다른 곳으로 이어진다.  


내가 5분짜리 단어 암기법에 시선을 멈춘 것은 다른 이유였다. 그것은 어떤 '느낌' 때문이다. 


잃어버린 느낌. 예전에는 알았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어떤 느낌. 한때는 그랬었다. 50m를 전력으로 달린 뒤에, 팽팽하게 긴장한 허벅지를 만지면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감탄이 솟았다. 내가 이렇게 달릴 수도 있구나, 하고 말이다. 그때 나는 헉헉대는 가뿐 호흡 속에서 이렇게 힘줄과 근육으로 이루어진 내가 살아 있음을 알았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바로 그 느낌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릿느릿 걸어 출근하고, 터덜터덜 기어 퇴근하는 밍숭밍숭한 일상 속에서 그런 팽팽한 느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레고리 나지는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에서 영웅의 필멸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필멸성은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자신들이 겪는 시련으로 인해 필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는 결국 영웅의 삶 자체까지 규정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언젠가는 우리도 죽는다는 사실이며, 그 사실은 우리가 인간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래에 있을 죽음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짐승들, 불멸의 존재인 신과 인간이 구별되는 점이다."


영웅이란 불멸의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는 필멸의 인간이기에 영웅으로 화(化)할 자격을 획득한다. 그 자격이란 한계가 있는 삶 속에서, 그 한계를 의식하고, 영웅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다.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한 전쟁터에서, 즉 죽음이라는 인간적 한계가 도처에 널린 상황에서, 영웅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다. 한계가 가까이 있을 때, 인간은 매 순간 살아있음을 느낀다. 5분짜리, 50m짜리 엔드라인일지라도 말이다. 


느릿느릿으로 가득찬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나는 FUN 동영상을 밍숭밍숭 보고 있었다. 그때 내 시선 너머로 구석자리에 앉아 프린트물을 뚫어져라 읽는 학생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흐느적거리는 이어폰을 주워담아 가방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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