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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n 04. 2019

#204 그걸 해내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기획했던 첫번째 책은 조금은 무게감이 있는 프로젝트였다. 텍스트는 800자, 챕터는 365개, 테마는 ‘공부’. 공부하는 사람들이 하루에 하나씩 읽을 수 있는 일년 치 글을 쓰는 것이 목표였다. 기획이 심플했고 비전은 명쾌했으나 남은 문제는 실천이었다. 과연 그것을 다 쓸 수 있겠느냐. 그런 의구심을 품은 채 나는 블로그에 발을 내딛었다. 시작이 반, 제목은 '공부 샐러드’로 달았다. 


처음 내딛는 걸음들은 샐러드처럼 가벼웠다. 하기사 군대에서의 행군도 연병장을 출발할 때는 산책같았으니까. 30개 남짓의 챕터를 썼을 때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책으로 묶자는 제안을 받았고 나는 기쁘게 수락했다. 초고를 완성한 뒤에 미팅을 하기로 했다. 날아갈 것 같았다. 


매일 한두 개의 챕터를 완성했다. 주말이 되면 손가락에 속도를 붙여 네 다섯 개를 내달린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재처럼 새하얗게 불태운 몸을 뉘인 채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졌다. 개개의 챕터는 짧았으므로 하루의 작업량이 많은 것은 아니었고, 문학 작품이 아니었으므로 문장의 비루함에 골치를 썩이지 않아도 좋았다. 열심히 쓰는 동안 걱정은 하나였다. 365개의 이야기가 끝까지 나올 수 있을까. 테마는 ‘긍정’이나 ‘행복’이 아니라 ‘공부’였다. 내가 잘 아는 주제였으나 막상 1년 치를 쓰려고 보니 작고 좁았다. ‘수학 공부’나 ‘직장인 공부’보다 넓다는 사실은 썩 위로가 되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6개월치쯤 썼을 즈음이었다. 내 안에 저장된 공부 이야기를 다 끄집어 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가야할 길이 절반이나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므로 절반을 와도 시작이나 다름없이 앞길이 9만 리. 컵이 반쯤 빈 것이 아니라 반이나 차 있는 거라는 긍정적인 생각은 9만리의 까마득함 앞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Full에서 출발한 아이디어 게이지는 Empty를 향해 떨어져 갔다. 매일 바가지로 바닥을 벅벅 긁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주유등에 불이 켜졌다.  


결국 펜이 멈추었다. 직장을 다니고 있었으니 재충전의 시간 따위를 계획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작업으로부터 도망쳤다. 글을 쓰지 않은 채 하루하루가 갔고, 작업량이 6개월에서 멈춘 채 시간이 흘렀다. 초고를 완성해야 계약을 할 수 있는데 눈 앞이 캄캄했다. 나는 20km지점에서 주저앉아버린 마라토너 같았다. 괜히 1년치 글을 쓰겠다고 출판사에 이야기를 했구나 후회했다. 


결국 한달 정도가 덧없이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탁상 달력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 있었다. 어떻게든 다시 움직여야 했다. 나는 그때 한 가지 결심을 했던 것 같다. 1년 치를 다 못 채워도 하는 수 없다. 책을 못내도 할 수 없다. 그냥 하나씩만 써 나가자. 고개를 들어 9만 리를 보려하지 말고, 그냥 눈 앞의 한 걸음이나 가자.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글이 나오기 시작했다. 구더기가 배를 밀어 앞으로 나가듯이 꾸역꾸역 썼다. ‘바늘로 우물을 파는 기분으로 글을 쓴다’던 오르한 파묵의 심정을 날마다 이해했다.  


마틴 루터 킹은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계단의 처음과 끝을 다 보려고 하지 마라. 그냥 발을 내디뎌라.” 그 말은 정말 옳았다. 한 걸음씩 오르니 어떻게든 원고는 쓰여졌다. 결국 나는 365개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불광역 2층에 있는 빵집에 앉아 계약서를 썼다. 점심 시간이었다. 싸인을 하고 회사 사무실로 다시 들어오는데 몇 조각 먹은 빵으로도 배가 든든했다. 440페이지 짜리 <365 공부 비타민>이다.  


그때 주저앉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365라는 컨셉을 포기하고 적당한 두께의 공부 자극 에세이에서 타협점을 찾았으면 어땠을까. 사실 180개의 챕터만 해도 살을 붙이면 책 한 권은 충분히 만들 수 있는 분량이었다. 그런 책이 나왔을 수도 있고, 그렇게 나온 책이 더 잘 팔렸을 수도 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덕분에 나는 한 가지를 확실하게 얻었다. 일종의 자신감이다. 운동화를 벗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끝까지 갈 수는 있는거구나, 하는 자신감 말이다. 잘하는 것은 차치하고, 박수를 받는 것은 둘째치고, 적어도 일 자체는 Get Thing Done, 해낼 수 있는 힘이 어딘가에는 있었다.  


파인만 알고리즘이라는 것이 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제시한 일반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다. 첫째, 문제를 쓴다. 둘째, 열심히 생각한다. 셋째, 답을 쓴다(1.Write down the problem. 2.Think real hard. 3.Write down the solution.). 그의 말을 빌면 해야 무언가를 해내는 것도 세 가지 알고리즘을 따를 것이다. 첫째, 할 일을 정한다. 둘째, 열심히 한다. 셋째, 그 일을 완성한다.  


간단하다. 하지만 그 간단한 일을 해낸 사람은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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