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지 않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커다란 가로수 잎들이 멈춰 있다. 잎새마다 고여있는 막막함들. 무엇을 써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 느껴지는 막막함이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므로 새하얀 워드프로그램 앞에서 이런 기분에 종종 사로잡히는 것이나, 그 실체는 기획안을 쓰려 열어놓은 직장인의 PPT나 진로를 고민하는 말년 병장의 담배 연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막막함이 크게 두렵진 않다.
이럴 때는 호들갑을 떨지 말고 가만히 엎드린 채 웅크려 있으면 된다. 손에 쥔 펜을 놓지만 않은 채로 말이다. 그러다 보면 다시금 바람이 불기 마련이다. 잎새가 흔들리고 고여있던 무언가가 씻겨 내려간다. 글이 써지기 시작한다. 마치 감기 같은 것이랄까. 일을 하다보면 이유없이 이따금 찾아 오는. 내가 이것을 깨달은 때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연애 편지를 쓰면서다.
우리 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같은 반이었으므로 얼굴을 볼 수 있고 필요하면 말을 건넬 수는 있었으나 요즘처럼 학생들의 연애가 흔하지는 않았다. 수다를 나누는 일도, 함께 다니는 일도 조금은 조심스러웠다. 손을 잡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SNS는커녕 핸드폰조차 없었던 그 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쪽지였다. 수첩을 뜯어 쪽지를 썼고, 그 쪽지를 리본처럼 접어 책상 위에 슬쩍 놓았다. 쪽지를 주고 나면 답이 오기를 인내와 설렘으로 기다렸다. 과제가 많은 날이나 체육 시간이 끼어있는 날에는 답이 돌아오는데 몇 시간이 걸렸다.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은 글 뿐이었다. 그래서 글은 점점 길어졌다. 쪽지가 편지가 되고, 수첩 종이가 노트로 바뀌었다. 가는 글이 길어진 까닭에 오는 글도 길어졌다. 어느 날인가 그 친구가 빌려간 사전을 돌려주었다. 사전 안에 노트 종이가 아닌 편지지가 들어있었다. 나는 그 편지지의 브랜드가 ‘꿈꾸는 자작나무’였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자작나무가 무엇인지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생김새도 모르는 자작나무가 왠지 좋았다. 그래서 나도 문구점에 가서 편지지를 샀다.
정기적으로 쪽지를 쓰는 것은 커피를 내리듯 간단한 일이었으나 정기적으로 편지를 쓰는 것은 메인 요리처럼 쉽지 않았다. 그 정기(定期)가 하루 걸러 하루를 의미한다면 더욱 그랬다. 언젠가부터 물음에 물음이 꼬리를 이어 어느 편지가 문(問)이고 어느 편지가 답(答)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내가 답장을 기다리듯 그 친구 역시 나의 답장을 기다릴 것이므로 나는 펜으로 꾹꾹 눌러가며 그 기다림에 응(應)함을 편지지 위에 수놓았다.
행복함과 수월함은 다르다. 삶이 행복하다는 말은 사는 것이 수월하다는 말과 같지 않다. 편지지를 채우는 일은 행복했지만 그 일이 늘 쉬웠던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수업에 충실한 모범생이었다. 편지지는 쉬는 시간이나 자습 시간을 쪼개어 채웠으므로 쓸 수 있는 여유는 늘 빠듯했다. 암묵적인 마감 시간 안에 글을 마치려면 써내려 갈 글감이 늘 있어야 했는데, 굴러다니는 낙엽만 보아도 웃는다는 학생 시절의 감수성에도 그것은 적지 않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바람이 멈추고, 잎새마다 막막함이 고일 즈음이면 나는 가만히 책상 위에 엎드리곤 했다. 손에 쥔 펜을 놓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쓰고 싶은 말이 떠오를 때까지, 잎새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할 때까지. 그렇게 거의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더듬어보니 벌써 20년 전의 이야기다. 오래 전에 지어진 매듭 위에는 이제 먼지가 두텁다. 그래도 마음을 주었던 기억은 신기하게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나는 언젠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실패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진심을 다해 누군가가 함께했다면 그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흔적을 남긴다. 흉터처럼 생겼을지라도 그것은 상처가 아니라 성장의 흔적이다. 그 흔적을 성장통으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실패란 없다. 모든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나에게 막막함의 가벼움을 가르쳐준 것은 그 시절의 경험이다. 어쩌면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그런 식으로 글을 쓰는 연습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때는 생각조차 못했을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