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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03. 2015

#30  서른다섯에 <데미안>을 읽다

그때 우리는 갈라진 길에서 우리 자신을 택했던 것일까

어제 저녁 지하철은 평소와는 다르게 수수깡 인형처럼 헐거웠다. 


나는 무전기 소리가 찌지직 진동하는 기관실 벽을 등지고 서서 몇 장 남지 않은 <데미안>을 읽고 있었다. 오른 손에 쥔 연필은 구두 뒤축마냥 뭉툭했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음성이  온몸의 피로를 타고 나지막이 덜컹거렸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저만치 앞에, 마치 집이라도 나온 것처럼 커다란 백팩을 멘 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친구의 가방에는 머그컵처럼 눈에 띄는 파란 색 배너가 달려있었다.


"나는 나를 믿는다"


저게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나를  믿는다,라는 말을 백팩에 달고 다니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일부러 드러내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자기 자신을 믿겠다는 다짐의 말이라면 눈에 보이는 위치에 달았어야 좋았을게다.


자기 자신을 믿는 일은 아무런 설명도, 목청 높인 선언도 필요하지 않다. 말없이 그저 진심으로 그렇게 살아가면 될 뿐이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마음 한 구석에서 자라나는 두려움을 직시하며, 자신이 가기로 결단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면 충분하다. 그것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흔히들 자기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 두려움을 느끼지.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거야."



<데미안>을 이제야 읽었다. 청소년기에 읽어야 할 성장 소설의 고전을 성장판이 닫히고도 10년은 지난 다음에야 손에 들었다. 너무 늦게 이 책을 잡은 까닭일까. 나는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이런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데미안>이 어째서 성장 소설이란 말일까. 청소년이 주인공이기 때문일까. 두께가 얄팍한 책이기 때문일까. 이미 대문호의 반열에 올랐던 헤르만 헤세가 치열한 자기 탐색의 결과물로 내놓은 <데미안>이다. 이 책은 정말 청소년 권장 도서라는 명찰을 달고 10대들을 위한 서가 귀퉁이에 잠들어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자아의 성찰, 즉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은 평생 동안 추구해야 할 부단한 과제다. 그것은 대출금을 상환하라는 독촉 문자와 초시계처럼 규칙적인 출퇴근길의 어딘가에서 스스로를 놓쳐버린 어른들에게도 변함없이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사람은 저 바다 속의 새우와 같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영원히 껍질을 벗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서른 중반에 만난 <데미안>이 고마웠고, 이 책에 청소년 권장 도서의 '낙인'이 찍혀 있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우리는 <데미안>을 어른이 된 후에도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갈매기 조나단의 말을 고작 '좋은 대학'과 동일한 의미로 기억하는 것과 똑같은 실수를 범한 채 살아갈지도 모른다.


"난 진정,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 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나는 시를 짓기 위해서나 설교를 하기 위해서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도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는 않았다. 이 모두 부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일 뿐이었다. 각자를 위한 진정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뿐이다."




1. 두 세계


싱클레어가 처음 인식한 이 세상은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두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낱말들이다. 선과 악, 사랑과 추함, 깨끗함과 더러움. 전자는 아버지의 집이었고, 후자는 그 집의 바깥에 위치한 모든 세계였다. 아버지의 집은 누나의 웃음이 있고, 음식의 온기가 있고, 크리스마스에는 파티가 열리는 포근한 곳이지만, 바깥의 모든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냄새도 달랐고, 말투도 달랐고,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경찰과 불량배들이 거리를 돌아다녔고, 주정뱅이들이 아래를 팼고, 저녁이면 젊은 여자들이 공장에서 쏟아져나왔다."


어린 싱클레어는 어둡고 축축한 바깥 세계의 한 가운데에 언제고 도망쳐 올 수 있는 밝고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그 밝은 세상이 세상을 모두 덮을 수 있을 만큼 넓지 않았다는  것뿐.



하지만 그런 싱클레어의 시선은, 아직 세상의 진실에 눈뜨지 않은  어린아이의 유치한 그것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선악이라는 이분법의 칼날로 단순하게 자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분법의 잣대는 쉽다. 고민을 요하지 않는다. 옳은 것이 아니면 그른 것, 내 편이 아니면 네 편이라고 딱지를 붙여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어떤 이론이, 어떤 주장이 명쾌해 보일 때, 그것은 무언가 결여된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스크린 속의 이야기처럼 아귀가 딱 맞는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세상에는 선한 것도 있고, 선하지 않은 것도 있으며, 선함 속에 선하지 않은 것이 있고, 선하지 않음 속에 선한 것이 있어, 선함과 선하지 않음이 두 마리의 뱀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한 혼연과 순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다. 경험이 축적되는 과정을 일러 우리는 성장이라 부른다.


싱클레어에게 닥쳐온 시험이자 위기도 그런 것이었다. 그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를 두려워하면서 언제까지나 밝고 따뜻한 세계에 머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의 마음 안에는 이미 어둠의 세계에 속하는 것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싱클레어는 친구들 앞에서 우쭐대고 싶었고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거짓으로 자신의 영웅담을 지어낸다. 


"물방앗간 옆 과수원의 사과를 한 자루나 훔쳤어. 그것도 흔한 사과가 아니라 골드파르메네 같은 최고급 사과였지." 


일종의 허세다.


허세 섞인 거짓말에 눈빛을 반짝인 친구가 있었다. 어둠의 세계에서 골목대장 노릇을 했던 크로머였다. 대개 그렇다. 양지바른 집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란 사람들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반면, 추위와 허기짐 속에서 길고양이처럼 하루하루 투쟁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기회를 포착하는데 능하다. 불행하게도 싱클레어는 전자였고, 크로머는 후자였다.



'너희 아버지에게 고자질하겠다'는 크로머의 협박에 벌벌 떨며 싱클레어는 어둠의 길로 한 발짝씩 끌려들어간다. 저금통을 몰래 뜯어나오고, 나쁜 무리들과 어울려 다닌다. '왕따'라 불리는 청소년들이 '일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모양새와 똑같다. 심지어 '너네 누나를 소개하여달라'는 강요에 이르자 싱클레어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그렇다고 저항할 수도 없는 모순의 벼랑 끝에 몰려 지극히 괴로워한다. 열 살 남짓  어린아이에게는 분명 가혹한 경험이다.


싱클레어는 거짓말한 것을 후회하며 시름시름 앓는다. 우리는 주인공의 고통을 보며 일견 밝음과 대비되는 어둠의 두려움을 절감한다. 절대로 어둠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 이분법적인 생각은 성장 이전의 사고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이다. 선함이 있기에 악함이 있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 싱클레어의 고민도 마찬가지다. 그가 어둠의 세상에 자꾸만 끌려들어갔던 것도 결국 밝은 세상의 기대치에 한치도 어긋나서는 안된다는 집착 때문이었다. 우쭐대기 위해 '사과를 훔쳤다'고 처음 거짓말을 했을 때, '그것은 나의  거짓말이었다'라고 즉각 잘못을 시인했더라면(자기 내부의 어둠을 인정하면) 끝날 문제였다. 크로머가 '너희 아버지가 알면 어떻게  될까'라고 협박했을 때, 아버지에게 자신이 거짓말을 했노라고 밝히고 꾸중을 감수했더라면 지나갈 문제였다.


완전한 밝음이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완전한 밝음에만 머물고자 하는 집착은 왜곡을 낳는다. 싱클레어는 세상을 '두 세계'로 깨끗이 나누었기에 어둠에 속하지도, 밝음에 기댈 수도 없는 마음의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괜찮다. 


성장에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2. 균열의 조짐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균열이다. 균열은 알의 내부에서 세상의 벽을 향해 질문을 던짐으로써 생긴다.


싱클레어 입장에서 크로머의 강요는 어둠으로 끌려가는 족쇄인 한편, 기존 세계에 대한 의문의 기회이기도 했다. 싱클레어가 크로머의 협박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의 큰 고민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둠에 잠식당한 싱클레어에게 아버지는 고작 '신발이 젖었다'고 꾸중할 뿐이었다. 순간 싱클레어는 아버지에 대한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날카롭게 날이 선 듯한 반항심이었다. 내가 아버지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순간, 젖은 신발만 꾸짖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가 경멸스럽게 느껴졌다. 그것은 추악하고도 적대적인 느낌이었다. 하지만 강하고 깊은 매력이 있었고, 이 느낌은 다른 어떤 생각보다도 더 단단하게 나를 내 비밀과 죄에 결박시켰다.
지금까지의 모든 체험 중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내가 새긴 최초의 칼자국이었고, 내 유년 시절을 이루는 기둥에 가한 최초의 칼질이었다."



균열이 없는 매끈한 벽은 무너지지 않는다. 벽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게 자신의 세상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크로머가 세상을 향한 의문의 기회였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밝은 세계에 생긴 균열이라면, 카인에 대한 데미안의 해석은 어둠의 세계에 생긴 균열이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설득력 있는 설명을 듣고 악인의 전형이라 배워온 카인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기존의 세계관이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동안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어온 선, 악의 구분에 대해 '혹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닐까'라는 비판적 사고를 시작했다는 의미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카인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어. 우리가 배우는 대부분이 분명 완벽한 진실이고 정의인 명제들이지만 이 모두를 선생님들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볼 수도 있는 거야. 다른 관점에서 볼 때 대개 더 나은 가치를 갖게 돼."


한 올의 실이 풀리면 스웨터는 흩어지고, 한 개의 구멍이 뚫리면 댐이 무너진다. 세상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다. 싱클레어의 세계에 균열의 조짐이 보였다. 알에서 깨어나오려는 몸부림이다.



3. 방황 그리고 구원


아버지의 집을 떠나 기숙사, 즉 새로운 세상에 들어섰을 때 싱클레어는 걷잡을 수 없는 방황을 시작한다. 질서와 질서 사이에는 무질서가 있다. 일치일란(一治一亂). 그 방황은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진 후 새로운 질서가 들어서기 전에 겪어야 할 혼돈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기 전에, 남자가 아버지가 되기 전에, 배우는 이가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 전에 겪어야 할 시간이다.


"남들이 보기에 나는 거칠게 타락해 가고 있었다. 최초의 주정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것에 최초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우리 학교에서도 폭주가 성행했고 난동이 속출했는데 나는 그들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얼마 가지 않아 한몫 거드는 구경꾼이나 풋내기가 아니라 우두머리 샛별 같은 존재로 유명해졌으며 거침 없이 술집의 단골이 되었다."


하지만 방황은 과정일 뿐이다.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는 방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집이 싫어, 학교가 싫어, 어른들의 간섭이 싫어, 자신의 현재 모습이 싫어 일순간 방황의 길로 들어서더라도 질서를 찾기 전까지 마음은 공허하다. 방황하는 이들이 순간 내뿜는 공격성은 그런 공허함을 감추기 위한 자기 방어의 몸짓일 뿐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비참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장이니 근사한 녀석이니 비상하고 예리하게 재치가 번득이는 녀석이라고 인정받았지만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는 불안에 가득 찬 영혼이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오전에 주일 예배 복장으로 명랑하고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을 보며 갑자기 눈물을 흘려던 일이 아직도 기억난다."

방황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마음이 떠난 사람을 다그쳐서는 아니 되듯, 가출한 아이를 야단쳐서 돌아오게 만들지 못하듯, 부정적인 영혼은 부정적인 에너지로 회복시킬 수 없다. 구원은 빛에 있다. 우리는 구원의 빛을 우연하게 마주칠 수도 있고, 잘 아는 누군가로부터 받을 수도 있으며, 다양한 모습으로 경험할 수 있지만, 그 빛의 이름은 모두 같다. 


결국, 사랑이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 봄날의 공원에서 내 시선을 끄는 한 소녀를 만났다. 첫눈에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이 짝사랑은 내 생활에 깊이 영향을 미쳤다. 내가 베아트리체와 말을 나눈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시의 나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이제 성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품은 사원의 문지기가 되었다. 나는 그동안 길들여져 있던 악한 생활을 버렸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베아트리체를 만난 이후 싱클레어는 달라진다. 더 이상 질이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일도 없어졌다. 그리고 사랑은 그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기 시작한다. 바로 진정한 자신에 대한 탐구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새로운 길에 발을 내딛었음을 그림을 그리면서 깨닫는다.


"새로운 마음가짐을 표현하고자 했던 이런 모든 연습 중 한 가지가 내게는 특히 중요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 소녀를 그려보고 싶었다.
어느 날 나는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마침내 어떤 얼굴을 완성시켰다. 그 얼굴은 예전에 그렸던 얼굴들보다 더 강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 소녀의 얼굴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은 다른 무엇, 비현실적인 무엇이었으며, 그렇다고 가치가 덜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 얼굴 앞으로 다가갔다. 어쩌면 이토록 늦게야 그를 알아보았던 것인지. 그것은 데미안의 얼굴이었다."


4. 데미안, 내부로 이끄는 힘


싱클레어는 더 이상 아버지의 등 뒤에 숨은 채 어두운 바깥 세상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수업 따위야 '될 대로 되라'고 내팽개친 청년도 아니었다. 그는 이제 깨어난 것이다. 오랜 방황의 끝에서 그가 도달한 곳은 하나의 길, 바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각성된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는 단 한 가지,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부에서 견고해져서 그 길이 어디에 닿아 있건 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더듬어 나가는 일. 그 이외의 다른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데미안>을 읽으며 내내 궁금했던 것은 '왜 이 책의 제목이 '싱클레어'가 아닌 '데미안'이 되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것은 곧 '데미안이란 존재가 싱클레어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이었다.



싱클레어에게 있어 데미안은 그렇게 멀지도, 또는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있었다. 크로머의 괴롭힘을 단숨에 해결해 준 데미안,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라는 답장과 함께 바람처럼 나타난 데미안, 종교와 진리를 논하며 싱클레어 옆자리로 다가온 데미안이지만 싱클레어가 성장하는 내내 그의 곁에 붙어있었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삶이 흔들릴 때마다 데미안을 떠올렸다. 명상을 하는 그의 얼굴을 생각했고, 데미안이 가르쳐준 눈빛의 힘을 곱씹었다. 세상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깨달았고, 우리들 각자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향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싱클레어의 곁에 항상 있었던 것은 아닐지라도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데미안은 자극이자 영감이자 물음이 되어주었다.


그렇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마찬가지로 데미안은 우리들에게, 우리를 스스로의 내부로 이끌어주는 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는지. 


우리는 두려워한다. 우리는 방황한다. 우리는 다투고, 배우고, 고통을 겪으며 꾸역꾸역 성장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쫒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살기 마련이다. 그토록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아주 가끔씩, 내면의 목소리 그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오기도 하는데, 바로 그 마음의 소리를 움켜쥐고 따라갈 힘이 있느냐에 우리가 참된 삶을 살 수 있는 여부가 달려있다.


그 힘이 데미안이다.



5. 운명을 따르는 자


싱클레어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밝음과 어둠이 혼재한, 약하고 두려움 많은, 그러나 분명 사랑과 깨달음으로 나아갈 힘이 있는 존재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났듯, 우리도 생의 군데군데에서 우리의 데미안을 만나왔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갈라진 길에서 우리 자신을 택했던 것일까. 


이 물음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사람은 먼 훗날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터다.


그 선택이 쉽다는 말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아마 단 한 명도 그 길이 쉽지는 않았으리라. <데미안>을 써낸 헤르만 헤세조차 평생토록 치열하게 고뇌하지 않았던가.


"태어나는 일은 언제나 어렵지요. 당신도 알지 않나요.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고 이런 물음을 던져보는 겁니다. 그 길이 그토록 어려웠나? 그저 어렵기만 했던가? 아름답기도 하지 않았나?"


서른 중반에 <데미안>을 읽으며, '하루는 길지만, 일주일은 짧은' 나의 일상을 생각해본다. 고통스럽다는 두려움에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보다 확실한 목적지가 그려지지 않으면 발을 떼지 않은 것은 아닌지. 표정이 없는 거울처럼, 세상이 보이기를 원하는 모습만 비추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퇴근 길, 피로에 젖은 손으로 <데미안>을 덮는 내게 데미안이 말했다.


"그래요. 누구나 자신의 꿈을 찾아야 하지요. 그러면 길이 쉬워진답니다. 싱클레어. 당신은  어린아이예요. 당신의 운명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다인이 충실하기만 하다면, 당신이 꿈꾼 것처럼 언젠가 당신의 운명은 완전히 당신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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