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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03. 2015

#29 하루키가 시시한 에세이를 매일 쓴 까닭

대단한 글을 쓰고 싶다 해서 대단한 글이 써지는 것은 아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지만 구태여 이유를 대자면 아우와 몸살 때문이었다.
지난 며칠간 한 자도 글을 쓰지 않은 이유 말이다. 


연말이야 송년회다, 제야의 종이다, 새해 다짐이다, '젠장 이렇게 또 한 살 먹어버렸어' 등등의 잡다한 일로 해마다 바빴지만 올해는 거기에 '아우'가 추가되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아우의 출국'. 아우는 짧으면 1년짜리 교환학생을 노르웨이로 떠났다. 우리는 박사과정에도 교환학생이 있는 줄 아우를 보며 처음 알았다. 그러니 박사과정의 교환학생은 학부 때의 그것과 달리 어학연수와 여행이 절반쯤 뒤섞인 낭만적인 시간이 아니라, 가족이 먹을 식량감을 구하기 위해 창을 들고 동굴을 나서는 원시인처럼 큰 부담감을 안고 있는 것임은 더욱 알리가 없었다. 


아무튼 그런 아우의 짐을 정신없이 싸고, 비행기에 실어 빠이빠이 보낸 후에, 집으로 돌아와 묵은 빨래니 버려야 할 책이니 깨끗이 대청소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진짜 새해였다. 


출국을 너무 열심히 도운 탓이었나 보다. 지금까지 잔고장 한 번 없던 자동차는 공항을 다녀와 주차장에 부려놓자마자 타이어에 구멍이 났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푸들을 옆구리에 끼고 곯아떨어지셨으며, 나는 거짓말처럼 몸살에 빙의되었다. 몸살, 그리고 배탈이었다. 이마에는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둔 양은 냄비처럼 열이 펄펄 끓고,  온몸은 사지를 따로 떼어 멍석말이라도 하는 듯 쑤셔댔으며, 배탈은 나로 하여금 30분이 멀다 하고 화장실로 달려가게 만들었다. 


그렇게 꼬박 사흘이었다. 한 움큼 되는 약을 먹으며 나는 꼬박 사흘을 내리 잤다.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자는 것이 지겨워 몸을 일으켰다가, 일어나기만 해도 몸이 아파  콜택시를 청하듯 잠을 불렀다. 열이 가라앉고, 배가 고요해지고, 잠에서 깨어 눈을 떠보니 연휴가 지난 월요일 아침이었다. 

지금까지 일천자 가깝게 끄적였지만, 두 글자로 요약하자면 결국 '핑계'다. 


아파서 쓰지 않았건, 쓰기 싫어서 쓰지 않았건, 아팠기에 쓰기 싫었건. 쓰지 않은 모든 날들은 써야 한다는 당위 앞에 핑계일 뿐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으니 역시 녹으로 잔뜩 뒤덮인 자전거 체인처럼 손가락 끝이 뻑뻑하다. 저 앞에 가야 할 곳이 있는데 정작 페달을 밟아도 바퀴가 움직이지 않는다. 썼다가 지우고, 고쳤다가 뒤엎으면서 겨우겨우 한 걸음씩 내딛고 있다. 이전에도 여러 번 해 보았기에 이런 재시동의 몸짓이 영 낯선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약간은 위안이 될 뿐이다. 


초라한 글씨와 광활한 여백을 바라보며 나는 하루키가 썼던 저 많은 에세이들을 생각했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으응?),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뭐라고?) 등등. 물론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나 <승리보다 소중한 것>처럼 일정한 기획이 있는, 상대적으로 제대로 된 책도 제법 있지만 하루키 에세이집의 상당수는 저 당황스러운 감탄사, '응-으응-뭐라고'가 절로 나오는 책들이다. 


읽고 나면 무엇을 읽었는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 '잡담' 같은 글이라는 이야기다. 하루키는 장편소설을 쓰는 사이사이에 저런 에세이를 썼다고 했다. 즉,  <1Q84>나 <상실의 시대> 같은 장편을 하나 탈고하고 다음 장편의 초고에 돌입하기 전, 그 인터미션 같은 시간 동안 주로 잡담 에세이를 집필했다.


이전에 저 잡담 에세이를 읽을 때 '하루키는 왜 이렇게 시시껄렁한 에세이를 많이도 써냈지?'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물론, 하루키의 글이니까 읽는 맛은 분명 있다. 문체 역시 독특하다. 허술해 보이긴 하나 흉내 낸다고 하여 나올 수 있는 글은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분량도 지극히 짧고(A4 한 장이나 될까?), 내용 역시 잡다하다 못해 조잡한(예를 들면, '두부를 맛있게 먹는 법') 저 글들은 하루키에게 일종의  '낭비'처럼 생각되었다. 힘이 담긴 글을 써 내려갈 시간을 잡아먹는 '낭비' 말이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손가락 마디의 녹을 털어가며 억지로 문장을 조립하는 동안, 나는 왜 하루키가 짧고 조잡한(그럼에도 불구하고 맛깔 난) 에세이를 그리 많이도 써냈는지 문득 깨달았다.


'아, 하루키는 장편을 쓰지 않을 때에도 손가락에 녹이 슬지 않도록 매일 움직여주었구나.' 

대단한 곡을 만들겠노라 결심했다 해서 대단한 곡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멋진 춤을 추겠다고 마음 먹었다 해서 멋진 춤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매일 쓰고, 매일 추다 보면 영감과 환경과 분위기가 개기일식처럼 한 줄로 만나는 날, 마치 우연과 같이 멋진 결과물이 나오는  것뿐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재미와 감동이 있는 글을 쓰고 싶지 않은 이가 어디 있으랴. 머릿속으로는 세상을 사로잡을 기막힌 소재 하나 없는 소설가가 어디 있으랴. 


다만 김영하의 적절한 비유처럼 '소설가의 뇌는 손가락 끝'에 있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의지와 담배 연기처럼 희미한 구상 만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번쩍번쩍 광이 날 정도로 기름을 머금고, 생각의 속도보다 훨씬 앞서서 저만치 달려나가는 손가락이다. 적토마처럼 질주하는 손가락의 엉덩이에, 방향은 맞게 가고 있는지 이따금씩 채찍을 툭툭 던지는 것이 글 쓰는 이가 할 일이다. 구상을 지면에 옮기는 것은 그 다음에 허락된 일이다. 


짧은 글일지언정 문자 그대로 쉬지 않고 써냈던 하루키가 새삼 대단하게 보인다. 그의 손가락은 새해에도 얼마나 빠르게 달려나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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