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재우 Aug 04. 2015

#33 머리 파마 처음이세요?

의외로 복잡한 파마의 원리

오늘은 연차 휴가를 썼다. 


알다시피 연차는 노동법(정확히는 근로기준법 제 60조이다)에 명시된 근로자의 법적 권리 중 하나. 나는 대학시절 의외로 노동법을 열심히 들었다. 노동법 1과 2를 수강했고 노동법 연습까지 마쳤으며 졸업 논문 역시 노동법으로 끄적거렸으니  4년짜리 보통의 학부 졸업생 치고는 꽤 많은 시간을 노동법에 투자한 셈이다. 혈기 넘치는 스무 살 때도 화염병 한 번 던진 적 없는 나의 소심한 성향으로 볼 때 조금은 결이 다른 커리큘럼이었긴 하지만, 뭐 인연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다. 예측을 벗어난 곳에 문이 열리고, 기대를 저버린 곳에 길이 펼쳐지는 것이 삶이니 말이다. 


아무튼 그 덕에 '80% 이상 출근한 근로자는 1년에 15일의 유급 휴가'를 쓸 수 있고, '3년이 넘은 근로자는 매 2년마다 유급 휴가 일수가 하루씩 늘어나되 최대 25일을 넘지 않는'다는 노동법의 연차 휴가 조항을 근로자가 되기 전부터 알았다. 먼 훗날 '근로자'가 된다는 생각을 딱히 해본 적이 없음에도 '며칠을 쉴 수 있는지' 꼼꼼히 법 조항을 뜯어보았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일 년에 며칠을 놀 수 있는지 왜 세어보고 싶었을까. 물론 현실은 근로기준법 60조와 조금 다르긴 했다. 법에서 보장된 모든 연차 휴가를 다 찾아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곳이 현실이었고,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이루어진 대한민국이었다. 


대학시절의 나에게 있어서, 근로기준법 60조는 사실 쓰윽 찢어버리더라도 상관없는 얇은 종이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말 월급을 받고 매일 지하철에 시달리는 근로자가 되고 보니 연차 휴가라는 것이 얼마나 보석처럼 소중한 것인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터득했다. 금요일쯤 연차를 쓰기로 계획이 되어 있다면, 마치 소시지 생각만 하는 강아지처럼 일주일 내내 '연차 때 무얼 할까'를 이리저리 꿈꾸면서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이 직장인이다. 


오늘 나는 그런 연차를 썼다는 이야기다. 

어제 밤 늦게까지 맥주를 마셨기 때문도, 부도난 어음처럼 우루루 남아있는 올해의 연차 일수 때문도 아니었다. 물론 솔직히 말하면, 이 두 가지도 연차를 쓴 이유에 손톱만큼은 포함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연차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즉, 나는 연차를 내고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파마였다. 


신림역에 가면 '남성 고객 평일 17시까지 이것저것  할인'이라는 문구가 어지럽게 붙어있는 헤어숍이 있다. 출근하는 아침마다 지나치는 샵이다. '일류' 헤어디자이너가 조니 뎁이 분한 '가위손'처럼 전문가적인 역량을 가지고 남자 머리를 커트해 주는데 고작 5000원 밖에 하지 않는단다. 


물론 평일이고, 오후 5시 이전에 방문한 손님 만이다. 야간 조로 일하는 직장인이나, 출퇴근 시간이 정말로 자유롭다는 모 외국계 회사 직원이 아니고서야 그림의 떡인 가위손이다. 파마와 염색이 치킨 한 마리 값이라 적혀있는 헤어숍 앞을 지나다니며 늘 아쉬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언젠가 연차를 내고 파마를 하리라' 


그것이 오늘이었다.

"파마하고 염색 둘 다 할 거예요"라는 내 말에 계산대에 앉은 주인은 반색을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데다 오전 시간대라 손님도 거의 없었다. 앞머리를 미역줄기처럼 볶아놓은 남자 디자이너가 가방과 외투를 받아 락커에 넣었다. "이쪽에 앉으세용." 디자이너는 혀 끝에도 컬을 먹인 듯 말끝을 매번 꼬아 올렸다. "염색부터 하고용, 컷을 하공, 그리고 나서 파마에 들어가용." 순서가 그렇게 되나 보다. 염색은 태어나서 두 번째, 파마는 첫 번째다. 파마와 염색을 같이 하는 것도 당연히 처음. 


머리카락에 치덕치덕 염색약을 바르는 것으로 일이 시작되었다. 디자이너는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염색약을 엄마가 풀을 쑤듯 이리저리 뒤섞더니 이내 익숙한 손으로 머리에 차근차근 발라나갔다. 주걱인지 솔인지 알 수 없는 도구를 가지고 머리카락 한 줌의 앞 뒤에 문질렀다. 김을 잴 때 참기름을 바르듯 손동작이 정갈했다. 두피는 문어를 한 마리 올려 놓은 듯 무겁고 차가웠다. 


"이쪽으로 모실께용" 약을 다 바르고 나자 열처리의 차례였다. 두 개의 로봇 팔이 남의 집 손주 머리를 건성건성 쓰다듬는 할아버지처럼, 머리 위에서 왔다 갔다 했다. 미지근한 열기가 배어나왔다. 슬쩍 올려다보니 로봇팔 안에 열기를 뿜는 쇠막대기가 들어있었다. 단순한 구조로구만. "열을 쐬어줘야 색깔이 빨리 받아용. 사장님 주스? 아니면 녹차?" 말꼬리 디자이너가 친절하게 설명을 따라주었다. 


어디선가 읽기를 아주 오랜 옛날에도, 그러니까 고대 이집트 같은 곳에서도 머리를 염색했었다, 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럼 그 시절에는 노예가 두 명쯤 등 뒤에 서서 불이 붙은 숯을 들고 좌우로 움직이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날개 달린 천사들은 다들 머리가 노란 색이던데, 머리 위에 떠있는 동그란 고리가 염색용 열처리 기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머리를 굽는 동안 준비해 온 책을 꺼냈다. 미용실에 가면 머리에 무언가를 뒤집어 쓴 아주머니들이 몇 시간 째 잡지를 뒤적거리는 것을 본 덕분이다. 대기번호를 든 채 주인이 읽어주기를 말없이 기다리고 있는 책 무더기 사이에서 선택한 것은 <소설가의 일>. 소설가 김연수의 신작이다. 


"소설가에게 현재란 지금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니까 지금 뭔가를 쓰고 있다면 그는 소설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있으면 '지금 뭔가를 쓰고 있다면 그는  소설가'라는 그 문장의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프루스트 씨는  그때 뭔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가의 일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 일생 앞에서는 다작이라는 말도 무의미하고 수면 용 소설이라는 말도 무의미하다. 그저 어떤 시간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자신이 경험한 시간의 흐름을 소설로 보여줄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그는 소설가가 된다." 


라고, 김연수는 말하고 있었다. '지금 뭔가를 쓰고 있다면'과 '자신이 경험한 시간의 흐름을 소설로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도 프루스트는 아닐지언정, 김연수 비슷한 소설가라도 될 수 있을까. 김연수는 최근에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란 감각적인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그 멋진 제목 뒤에는 사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하던데, <소설가의 일>을 읽으면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죽자사자 무언가를 쓰는 것'이 김연수의 진짜 일임을 누구나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유명 소설가인 김연수는 그렇게 쓰고 또 쓰는데, 나는 귀하디 귀한 연차를 얻어 파마를 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자책감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도리도리. 이번 주말에 있을 강연을 위해서 최소한의 꽃단장은 해야 한다고 스스로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쩌면 김연수도 신문 인터뷰라던가 방송 출연 전에는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대신 미용실 열처리 기구 아래 앉아 녹차를 홀짝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파마도 작가의 일일지니. 


아무튼. 색깔은 잘 나왔다. 비록 애초에 선택한 대로  '황금빛'이라기보다는 '구릿빛'에 가까웠지만 구리 머리가 다행히도 구린 구릿빛은 아니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구리구리. 


염색 다음에는 커트의 차례였다. 커트야 뭐 삼십하고도 몇 년을 더 살면서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학업을 중단하고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군대를 가는 중대사 속에서도 규칙적으로 꼬박꼬박 잘라온 것이니 특별할 것은 없었다, 고 단정 짓는다면 아마 작가란 '일상을 관찰'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김연수가 '쯧쯧쯧, 싹수가 노랗군' 하고 등을 돌리겠지만, 아무리 개미처럼 더듬이를 곤두세워도 그다지 느껴지는 것이 없음을 어쩌랴. 진정 나의 싹수는 두부 만들 때나 쓰는 콩처럼 누런 색인가. 


더듬이를 빠릿빠릿 움직이느라 미간을 찌푸렸는지 디자이너가 "불편하세용" 하고 묻는다. 색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닐까 신경 쓰이나 보다. "색깔 참 잘 받았어용" 하며 연신 칭찬. 나는 "네에 그렇네요" 하면서 활짝 웃었다.

마지막으로 파마의 시간이었다. 여기야 말로 단 한번도 겪어보지 않은 미답의 영역, 미지의 세계였다. 지나치게 컬을 먹이면 뽀글뽀글 아줌마 파마가 되고, 너무 안 먹이면 파마한  것처럼 안 보이니 적절하게 그 중간으로 해드린다는 디자이너의 말에, 근의 공식을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시간의 중학생처럼 일단 고개를 주억거렸다. 


파마는 신기한 일이었다. 약을 바른다. 둥글게 만다. 중화제를 뿌린다. 이 세 가지 공정을 거치고 나니 공사장 각목처럼 뻣뻣한 직모가 트로트 가락마냥 구불구불해졌다. "중화라니 파마 약이 산성인가요?" 하고 물었더니만 디자이너는 "일제로 끊어준 것을 이제로 중화시켜 붙이는  거예용"이라 대답한다. 더 알 수 없다. 일제는 무슨 made in japan이란 이야기인가. 정말 아무것도 이해가지 않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타이어처럼 동그랗게 뜬 채 디자이너를 쳐다봤다. "저도 이론적인 것은 잘 몰라용" 하며 그는 발을 뺐다. 


결국 집에 와서 찾아봤는데, 파마의 원리에 대해 어느 신문기사가 아래와 같이 써 놓았다. 


"머리카락은 많은 단백질의 다발로 이루어져 있다. 단백질 중 주성분은 ‘케라틴’으로 시스틴(cystine)이라는 아미노산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시스틴 분자에서 오른쪽에서 2번째의 큰 원자가 바로 황(S) 원자로 파마의 원리와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시스틴의 화학식은 HS-CH2-CH(NH2)-COOH이다. 각 단백질은 시스틴 사이의 황원자 2개가 결합하는 ‘황-황 다리결합’으로 연결되어 있다. 머리카락이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는 것은 이 다리결합 때문이다.

파마의 기본 원리는 중학교 시절 배우는 산화환원 반응에서 비롯된다. 파마약은 머리카락 섬유에 수소를 붙게 하는 환원제이다. 파마약은 흔히 약한 염기성으로 만든 ‘티오글리콜산’이라는 화합물의 수용액이다. 반면 중화제는 묽은 과산화수소수(H2O2)라는 산화제이다.

환원제인 파마약을 바르면 황-황 다리결합이 끊어지게 된다. 이 상태에서 롯드(머리카락을 감아두는 플라스틱 기구)로 말고 오랫동안 놓아두면 모든 황-황 다리결합이 끊어지고 롯드로 인해 새로운 이웃과 접하게 된다. 여기에 중화제라고 부르는 산화제를 바르면 다시 황-황 다리결합이 만들어진다. 롯드의 모양대로 구부러진 상태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황-황 다리결합은 롯드를 풀어도 그대로 유지되어 웨이브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파마약이 먼저 환원 반응을 일으키고 다시 중화제가 산화반응을 일으킨다고 보면 된다.(경향신문 2004.8.30)"
무슨 이야긴지 잘 모르겠다. 


나도 문과생이라 화학은 공통 과학에서 배운 것이 전부다. 그러므로 저 기사에서 알아듣는 말이라고는 산화, 환원 정도 밖에 없다. 그나마 오래된 유리창을 대고 보는 듯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지만, 여기 저기서 끙끙대며 정보를 긁어 읽은 결과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임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제멋대로 알아들은 파마의 원리다. 


머리카락은 단백질이다. 그 단백질은 '시스틴'이란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녀석들을 편의상 걸그룹 시스타라고 생각하자(시스틴과 시스타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단순한 이유다). 시스타 멤버(황 원자)들은 일렬로 늘어서 서로서로 팔짱을 낀 채 단단한 스크럼을 짜고 있다. 머리카락이 가늘더라도 잘 끊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스크럼 때문. 이것이 평소의 머리다. 


이 스크럼을 풀기 위해 은근슬쩍 시스타 근처에 꽃미남들을 투입시킨다. 이 꽃미남이 파마약(일제. 일제는 '1제'였다. 첫 번째 약이라는 의미인 듯)이고, 주 성분은 수소다. 갑작스레 나타난 꽃미남에 정신이 혼미해진 시스타 멤버는 팔에 힘을 빼는데, 때 맞추어 눈치가 귀신인 꽃미남들이 필이 오는 멤버들에게 각자 손을 내민다. 그 손을 잡느라 시스타 멤버들은 팔짱을 풀면 자연스럽게 스크럼은 해체된다. 같은 모양, 즉 일렬로 늘어서 있던 멤버들의 위치도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멤버들을 끌어다가 여기저기 제멋대로 자리를 바꾸어 준다. 파마할 때 롯드로 머리카락을 돌돌 마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머리카락 모양에 변형이 일어난다. 공사장 각목이 트로트처럼 구부러지는 장면이다. 


멤버들이 적당히 새로운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되면 중화제(2제, 두 번째 약)를 뿌림으로써 꽃미남들을 쫓아낸다. 꽃미남들이 일제히 사라지고 나면, 시스타 멤버들은 지금 새롭게 자리 잡은 그대로, 지금 자신의 옆 사람과 팔짱을 낀다. 다시 강력한 스크럼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처음의 일렬 대형과는 다른 모습이 만들어지고(웨이브), 그 상태가 유지된다(파마). 파마라는 말 자체가 '영구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Permanent에서 나왔다.

한  시간쯤 지나는 사이 내 머리카락 내부에서도 시스타와 꽃미남이 만났다 흩어졌다. 꽃미남들은 갔지만, 시스타는 트롯트처럼 구불거리는 형태로 대형을 바꿨다. 즉, 파마가 완성된 거다. 


태어나서 처음 파마를 한 내 모습을 거울 속에서 보니 낯설기 그지 없어 통성명이라도 해야 할 지경이었다. "컬이 잘 먹었네용" 디자이너는 작품이 마음에 든 듯,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며 연신 고개를 큼지막하게 끄덕였다. 구릿빛 머리카락이 편서풍과 무역풍처럼 좌우로 일관되게 흩날렸다. "앞으로는 린스를 매일 하셔야 되공, 오늘은 에센스를 발라 드릴게용" 파마를 마친 머리카락은 뭉게구름처럼 둥실거렸다. 두피와 머리카락 사이에 어색함을 머금은 빈 공간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정수리에 새가 날아와 집이라도 지은 듯했다.

 

이렇게 하고 밖을 다녀도 되는 걸까. 가운을 벗으며 걱정이 아주 조금 스쳐지났다. 정수리의 새 집이 자꾸 거슬렸다. 지갑을 꺼내고, 회원증을 만들고, 또 오세용 하는 친절한 인사를 뒤로 한 채 샵을 나섰다. 


신발 장수 눈에는 신발만 보인다고, 파마를 하고 신림역에 나서니 고작 몇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도 남자들의 헤어스타일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다. 세상에는 염색한 남자도 많고, 파마한 남자는 더 많으며, 내 염색과 파마에 신경 쓰지 않는 남자들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자 정수리에 있던 새 집이 사라졌다.

 


작가의 이전글 #32 미래 인재의 핵심 <새로운 미래가 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