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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06. 2015

#39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 <상실의 시대>

그리고 그 사랑을 지켜내는 힘에 대하여

#1 노벨문학상은 이번에도 하루키를 빗나가고
"사람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건,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건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 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村上春樹 <상실의 시대> 일본 소설가  

 

사촌 동생의 결혼식으로 경부고속도로를 오르내리는 동안 금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어 있었다. 파트릭 모디아노, 프랑스 소설가.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나는 부끄러움과 암담함을 동시에 느꼈다. 평소 '책을  좋아합니다'라고 버젓이 말하고 다니는 주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 파트릭 모디아노는  누구?"라는 기사를 열심히 뒤져야 하는 자신의 무지함을 또 다시 확인했기 때문이다. 


모디아노는 열다섯 살에 이미 출판사 클럽에서 저명한 작가들과 교류를 시작했고,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상급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한 채 평생 문학에 몸을 던질 것을 결심하였다 한다. 한 사람의 작가가 이런 식으로 쌓아 올린 글의 높이도 가늠하기 어려운데, 그런 인물들이 모래알처럼 가득한 문학의 바다란 도대체 얼마나 광대한 것인지. 


아무튼 이번에도 우리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수상의 영예를 안지 못했다. 몇 년 째 영국 도박사들 사이에서는 5:1쯤 되는 가장 낮은 배당률로 부동의 1순위로 꼽히고 있다던데, 최종 승자는 계속 다른 작가에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계 랭킹 1위인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하루키를 굉장히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꽤나 아쉬움을 느낀다. 


게다가 체계적으로 문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퇴근하여 녹초가 된 몸을 이끈 채 맥주 한 잔에 기대 원고지를 채웠던 하루키 아닌가. 그랬던 그가 '드넓은 문학의 바다'에서 번쩍이는 금메달을 목에 걸기를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생활인이자 직장인으로서의 토닥토닥 동류의식인지도 모른다. 


무명 소설가에 불과했던 하루키를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다름 아닌 <상실의 시대>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고, 그 제목대로 출간된 책도 있지만 어쩐지 <상실의 시대>가 전반적인 분위기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계속 <상실의 시대>라고 부르기로 하자.

#2 애청자가 언급하는 세 가지 이야기

 

하루키가 어떻게 <상실의 시대>를 쓰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짧게 언급할만한 이야기가 있다. 라디오 방송을 들을 때도 단순한 청자(聽者)를 넘어 애청자(愛聽者)가 되면 슬슬 들리는 것 말고도 다른 모습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이 방송이 '어떻게 만들어 지나' 하는 호기심인 것이다. 단어 자체로는 모순이나 다름없는 '보이는 라디오'가 인기를 끄는 이유다. 이를테면 비하인드 스토리랄까. 여기서는 <상실의 시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세 가지만 이야기해 보자. 


첫째, 하루키는 애초에 이렇게 긴 작품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반딧불이>라는 단편작을 바탕으로(단편 중에서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600매 분량의 깔끔한 연애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모든 글은 폴폴폴 뛰어다니는 강아지와 같아 일단 풀어놓기 시작하면 어디로 달려나갈지 장담할 수 없다. 이 책도 '다음 장편을 시작하기 전에 기분전환 정도의 가벼운 기분'으로 쓰기 시작한 원고가 1800매의 묵직한 장편으로 불어난 것이다. 그만큼 하루키가 담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다는 의미일 게다. 


둘째, 하루키는 베스트셀러에 대한 기대를 품고 의도적으로 <상실의 시대>를 썼다. 


권위 있는 문학 잡지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100% 리얼리즘 연애소설'을 써보자고 마음 먹은 채 펜을 들었다고 했다. 빅히트작인 <해변의 카프카>나 <1Q84>도 그렇지만, 하루키의 작품 중 상당수는 초현실적인 색채가 묻어난다. 


그는 말하길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계속 쓴다면 컬트 작가로서 남을 수는 있지만, 작가로서 주류로 진입하고' 싶었기에 리얼리즘 문체의 작품도 쓸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려 했다고. 일단 많은 사람들이 <상실의 시대>를 좋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초현실적인 다른 작품들에게도 관심을 가질 것이라 예상했다는데, <상실의 시대> 이후 하루키의 누적 판매 부수를 보면 그의 의도는 완벽하게 실현된 셈이다. 


셋째, 하루키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약 10년 만에 <상실의 시대>를 써냈다. 


이는 저 유명한 '1만 시간의 법칙'을 떠올리게 한다. 1만 시간의 법칙에 대한 다른 이름이 바로 '10년의 법칙'. 한 분야에서 뚜렷한 전문가로 족적을 남기기 위해 필요한 최소의 시간이 약 10년이라는 뜻이다. 체스, 문학, 예술, 스포츠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심지어 천재 중의 천재 모차르트 조차!)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라는 것이 스톡홀름 대학 앤더스 에릭슨(K. Anders Ericsson) 박사의 주장이다. 


하루키가 작은 재즈바에서 맥주를 팔면서 틈틈이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쓰기 시작한 것이 1978년이고 <상실의 시대>가 출간된 해는 1987년이다. 약 10년의 노력이 무명 작가를 세계적인 소설가로 만들었다고 하면 어느 정도는 비약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10년의 법칙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가 아닐지.

#3 <상실의 시대>의 줄거리 


<상실의 시대>는 연애 소설이다. 큰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기즈키-나오코 커플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다니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뻔한 삼각관계 같은 것은 아니다. 기즈키와 나오코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 온 사이. 무인도의 두 생존자처럼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커플에게 오히려 와타나베는 '세상과 그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 같은 역할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유 없이 기즈키가 자살을 한다. 와타나베는 홀로 남은 나오코를 돌봐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끼는데, 거기에는 사랑이라는 감정도 함께 섞여 있다. 정신적인 충격 등으로 나오코는 외딴 시골에 있는 요양 병원에 입원하고 와타나베는 종종 그곳을 찾아 나오코와 미래를 이야기한다. 


한편 와타나베는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이다. 딱히 친구도 없고, 혼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대학 생활을 무료함을 견디는 훈련 기간'으로 여기기로 일찍이 결심한 그에게 어느 날 미도리라는 여학생이 나타난다. 입원 중인 아버지의 병시중을 들고, 부모님이 남긴 낡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고단한 삶을 살고 있지만 까르르 웃음과 톡톡 튀는 상상력이 그치지 않는 생기발랄한 아가씨다. 와타나베하고는 왠지 말이 잘 통하는 까닭에 좋은 친구로 어울려 다니기 시작하면서 둘은 점점 가까워진다. 


약간의 주변 인물도 등장한다. 와타나베가 기숙사에서 알고 지내는 나가사와 선배가 있다. 집안도 좋고, 외무고시를 가볍게 패스하며, '자신의 능력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야심도 크고, 멋진 여자친구도 있지만, 주말마다 술집을 다니면서 이름도 모르는 여자들을 꼬드겨 밤을 보내는 외로운 사람이다. 


요양 병원에서 나오코와 같은 방을 쓰는 레이코도 있다. 한때는 촉망받는 음대생이었고, 단란한 가정을 꾸린 적도 있지만 심리적인 문제로 세상과 결별한 채 몇 년 째 병원에서 사는 인물. 통기타로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하며 따뜻한 조언으로 와타나베와 나오코를 보듬는다.

#4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의 의미 


물론 <상실의 시대>는 대단히 재미있다. 하루키 스스로도 자신의 글을 가리켜 '페이지 터너(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재미있는 소설)'라고 평했을 정도. 그러나 동시에 단순히 '재미있다'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깊은 의미를 품고 있을 때 우리는 베스트셀러를 넘어 '좋은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를 통해 품고자 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의 의미'다. 


"제가 이 소설에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의 의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건,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건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 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번에 <상실의 시대>를 두 번째 읽었다. 물론 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독수(讀數)다. 하지만 그래도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무언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나이, 주인공 와타나베와 같은 스무 살 무렵에는 보이지 않던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 저기서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십여 년이 지나는 동안, 나도 몇 번쯤 '자아의 무게에 맞서면서 일생(一生) 혹은 일사(一死)를 경험'한 덕분이리라. 


그렇기에 타나베의 발걸음을 마음으로 쫓으며 사람이 사랑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그리고 부디 그곳에서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힌트 같은 것을 가늠해 보고 싶었다.

#5 첫 번째 힌트, 딸기 쇼트 케이크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완벽하게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가령 지금 내가 자기에게 딸기 쇼트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면 말이야, 그러면 자기는 모든 걸 집어치우고 그걸 사러 달려가는 거야. 그리고 헐레벌떡 돌아와서 '자, 미도리, 딸기 쇼트 케이크야' 하고 내밀겠지. 그러면 나는 '흥, 이런 건 이젠 먹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그걸 창문으로 휙 내던지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거란 말이야."
"그런 건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 하고 나는 조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관계가 있어. 자기가 알지 못할 뿐야"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여자에겐 말야, 그런 게 굉장히 소중할 때가 있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지?"
"난 그렇게 해서 받은 것만큼 어김없이 상대방을 사랑할 거야."

나는 비록 영화광도 아니고 문외한도 아닌 평범한 영화 팬일 뿐이지만, 몇 번을 반복하여 본 유일한 영화가 한 편 있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다. 스스로 세 번을 보았고, 영화감상문 과제 작성을 위해 한 번을 더 보았다. 싫증을 잘 내고 하나를 꾸준히 하지 못하는 내 성격에 특기할만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봄날은 간다>의 장면은 단연 유지태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겠지만, 나는 조금 다르다. 두 번, 세 번을 볼수록 유지태가 이영애의 새 차를 부우욱 긁어버리는 장면이 가장 가슴에 닿았다.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지른 일이다.  


사랑은 그런 거다. 지극히 유치하고, 더없이 치졸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의 맨 얼굴이다. 낄낄대고, 재롱을 떨고, 토라지기도 하며, 때로는 질투도 하는 것이 사랑이다. 딸기 쇼트 케이크를 내던지고 싶다는 미도리의 말에 와타나베는 반문한다. "지극히 불합리한 이야기 같은데" 그렇다. 지극히 불합리하고,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살아남고 싶은' 사람들은 우선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사랑이란 마치 산등성이 경계선 위에 걸린 무지개처럼
합리와 이해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합리로 잴 수 없기에, 이해로 가늠할 수 없기에 사랑이 아닐까. 사람이란, 넥타이를 매고 또각 구두를 신은 이면 어딘가에, 영원히 평생토록 아이처럼 칭얼대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는 존재다. 그래서 대나무 숲에 비밀을 털어놓은 당나귀 귀 임금님처럼, 모든 유치함과 치졸함을 드러내 놓고 어리광 부릴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란 게 지극히 하찮은, 혹은 시시한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거기서부터가 아니면 시작되지 않는 거지."

예전에 백년해로 한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묶은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인터뷰이의 질문에 어르신들이 장황하게 대답을 했다. 100세 가까운 분들의 이야기라 알아듣기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인터뷰이는 대화를 정리하며 이런 식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어르신들 말씀은, 50대 50으로 공평하게  주고받는 것이 오랫동안 사랑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는 이야기시지요?" 

그러자  그분들은 좌우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야. 상대방에게 100을 다 주어야지.
그러면 그 상대도 100을 주는 거야. 공평하다는 말은 그런 뜻이라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몇몇 지인들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서로 똑같이 잘해야죠." 하지만 그 말이 내게는 '당신이 주는 만큼 나도 줄 용의가 있다'로 들린다. 책상 한 가운데 금을 그어놓은 채 '나도 넘어가지 않겠지만, 너도 넘어올 수 없어' 라며 책상 한 가운데 금을 그어놓는 초등학생처럼 말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야 각자가 다른 것이겠지만, 동시이행의 항변권으로 무장한 법률대리인 같은 생각으로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과연 그렇게 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서로 똑같이 잘해야죠'와 '100을 주고 100을 받는다'는 분명 결이 다른 이야기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딸기 쇼트 케이크를 사다 달라고 조를 수 있기에 사랑이다.
기껏 사온 케이크를 내던져버릴 수도 있기에 사랑이다.
하지만 받은 만큼 어김없이 돌려주기에 그것을 일러 사랑이라 할 수 있다. 


합리를 뛰어 넘어 주고, 이해를 가로 질러 받는다. 합리와  이해뿐이라면 구태여 깊숙한 사랑의 대나무 숲을 찾아들어갈 이유가 없다.

 

물론 그것만이 사랑의 모든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평생 소꿉놀이하는 여섯 살 꼬마 엄마 아빠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껏해야 사랑의 맨 얼굴이자 제일 첫 번째 얼굴이 아닐지. 어찌되었건 1층을 세운 후에 2층을 올릴 수 있고, 기단을 만든 후에 탑신을 얹을 수 있다. 우선 딸기 쇼트 케이크 같은 사랑을 하고, 그 다음 계단으로 올라서야 한다. 다행히(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매일 밤 케이크를 사러 허둥지둥 뛰어다녀야 하는 것은 아닐게다. 


"난 늘 굶주려 있었어.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사랑을  담뿍받아 보고 싶었어. 이젠 됐어, 배가 터질 것 같아, 잘 먹었어, 그럴 정도로. 한 번이면 되는 거야, 단 한 번이면."

#6 두 번째 힌트, 중요한 것은 대소변을 받아내느냐의 여부 


이 세상이 온통 딸기 쇼트 케이크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주택 대출금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분유값의 가격표 앞에서 주춤거리지 않아도 되고, 구겨진 영수증을 일일이 펴며 가계부에 적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얼마든지 매일 밤 케이크를 사러 웃으며 뛰어나갈 용의가 있다. 받자마자 창문 밖으로 집어 던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이 단단하고 차가운 현실 이듯,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사랑도 현실의 그것일  수밖에 없다. 현실적이라는 말은 제약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의미다. 시간과 자원이 한정된 곳, 그러나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은 무한한 곳. 그렇기에 자연발생적으로 시작한 모든 사랑은 어느 순간에 선택의 문턱에서 시험을 받는다. 


연애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사람과 결혼해도 될 것인가,
혼인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까닭에 지금 사랑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선택의 시험에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은 이들이다. 나는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의 피안에 서서 지금 사랑하고 있는 모두에게 우렁찬 박수를 보내고 싶다. 모든 선택에는 어떤 식으로든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고, 책임이란 그 표면에서 대부분 고통과 이어져 있는 까닭이다. 


"성장의 고통 같은 것을 치러야 할 때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바람에 그 고지서가 이제야 돌아온 거야."
"와타나베도 이젠 어른이니까 자신의 선택에 대해선 확실한 책임감을 가져야 해.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마는 거야."
"그러니 괴롭겠지만 좀 강해져야 해. 좀 더 성장해서 어른이 돼야 하는 거야."

책임을 다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직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가정을 꾸려본 것도 아니며 아이를 길러본 적도 없는 나는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다만 어떤 '의지'나 '각오'와 비슷한 형태의 무언가를 계속 쌓아나가고  있다,라는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그러한 마음가짐이 책임을 달게 받아들일 수 있는 첫 단추라고 생각한다. 베트남 전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8년 간의 수용소 생활을 견디고 생존한 스톡데일 장군(James Stockdale)이 가장 경계한 것도 '막연한 낙관주의'였지 않은가. 


경영학자 짐 콜린스가 '수용소를 견뎌내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은 누구였는가'라고 묻자 스톡데일은 '그들은 대부분  낙관주의자였다'라고 답했다. 막연하게 '이번 부활절이면', '다음 성탄절이면' 하는 식으로 근거 없는 희망을 가졌던 사람들은 결국 쉽게 낙심하고 살아갈 의지를 잃었다. 머리로는 얼마든지 딸기 쇼트 케이크를 꿈꿀 수 있다. 


그러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이어가는 것은, 숱한 시험의 순간에 끈을 붙들게 하는 것은, 쉴 사이 없이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도 현실 위에 단단히 뿌리 내린 두 다리다. 


세상의 차가움을 직시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하려는 각오인 것이다. 


"간호를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다 웃기는 소리지. 나이도 지긋하게 든 사람들이 왜 모두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을까. 입으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 중요한 건 대소변을 받아내느냐의 여부라고."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고 싶은' 사람들은 두 다리의 힘을 길러야 한다. 꼭 돈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아니, 경제적 능력을 넘어 선 훨씬 더 근본적인 힘을 이야기하고 싶다. 게으름을 이기려는,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불안정을 감수하는, 문제와 위기 앞에 위축되지 않는, 그리고 먼저 사람을 생각하는. 바로 그런 힘 말이다. 


"물론 내가 강해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스스로 사기를 북돋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아아, 기즈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너와는 달리 살려고 결심했고, 그것도 내 나름대로 올바르게 살겠다고 마음먹었었어. 하지만 난 그녀를 절대로 버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나는 그녀가 좋고 그녀보다는 내 쪽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해질 거야. 어른이 되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

나는 십대 소년이 아니니까. 난 책임을 느낀다. 난 이미 스무 살이 된 거라고. 그래서 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대가를 치러야만 해."

#7 세 번째 힌트. 자신을 위한 음악 


"난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왔는데, 생각해보니 나 자신을 위해서 피아노를 쳤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서거나, 과목의 지정곡이라서, 아니면 나를 감탄시키기 위해서 등등.

물론 그건 그것대로 중요한 일이긴 해, 한 가지 악기를 마스터하기 위해서는 말야.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음악을 연주해야만 하거든. 음악이란 그런 거야." 


왜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 어째서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하고는 견디지 못하여, 다들 어딘가 있을 누군가를 찾아 상실의 시대를 헤매고 있는 중일까. 


결국, 행복하자고 하는 일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사랑도 아니요, 하지 아니한다고 닦달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요, 진심으로 그리하길 원한다면 훌훌 털고 산 속의 절이나 저 멀리 이국 땅의 어느 시골로 연락을 끊은 채 들어가 버릴 수도 있는 세상이 지금이다. 요컨대, 우리는 사랑을 향해 자발적으로 애를 쓰고 있다는 말이다. 비록 사람마다 최대한으로 견딜 수 있는 피로한계(疲勞限界)는 다르다 하더라도. 그러므로 결국 이 싸움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벌인 싸움인 셈이다.

문제는 우리가 종종 이 사실을 잊는다는데 있다. 다투고, 집착하고, 울고,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동안 모든 것의 출발이자 전제인 '행복'이 사라지곤 한다. 전술에 신경 쓰다가 전략을 놓치는 격이고, 전투에 매몰되어 전쟁에서 지는 셈이다. 모든 음악인들은 언젠가 자신을 위해 음악 하는 법을 배워야 하듯,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 역시 '살아남고 싶은' 사람들이 해내야 할 과제다. 


<상실의 시대>에서 하루키는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한 몇 가지 힌트를 우리에게 준다. 밖에서 부는 바람에,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속도에, 언제 닥칠지 모르는 문제 앞에 쉽게 쓰러지지 않기 위해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아닌가 싶다. 


"제일 중요한 점은 서둘지 않는 거야. 서둘지 말아야 해.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일이  얽히고설켜 있어도, 절망적인 기분에 빠지거나 조바심이 나서 무리하게 잡아당기거나 하면 안돼. 시간을 두고 하나하나 서서히 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부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자기를 마모시키지 말라는 거야. 그런 시기에 부질없이 옆길로 쏠리면 나이 들어서 고생하게 돼. 정말이야, 이건. 그러니까 잘 생각해서 행동해야지. 나오코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자기 자신도 소중하게 여겨야지."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입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지. 인생이란 그런 거야.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와타나베도 그런 인생살이를 슬슬 배워도 좋을 때라고 생각해." 
"잘 될 수도 있고 그다지 잘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나 연애란 원래 그런 거야. 사랑에 빠지면 거기에 자신을 내맡기는 게 자연스럽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것도 하나의 성실한 모습이니까."

'행복'으로 향한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현자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행복론'  한두 권쯤 읽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각자 나름의 방법들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만 나 자신에게 당부하는 심정으로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모쪼록 일부러 힘을 내어 행복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일뿐이야" 하고 나가사와 선배는 간단히 말했다.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 더 주체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걸 말해."
"이를테면 다들 취직이 결정되어 한숨 놓고 있을 때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한다든가 그런 거 말인가요?" 


세계적인 골퍼 박인비 선수가 평범한 골퍼에서 탁월함으로 거듭나게 된 계기는 하나의 '결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바로 '행복한 골퍼가  되자'라는 결심이었다. '행복하자'는 결심이 그녀를 '행복'을 향한 노력으로 이끌었기에, 연습이나 시합이나, 슬럼프나 베스트 컨디션이나 늘 한결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고 했다. 


세상에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행복한 부부, 행복한 연인, 행복한 직장인이 되기를 소망하지 않는 사람은 단연코 없을 것이다.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중요한 점은 정말로 그 결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놓치지 않으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저 '놓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노력이란 그런 의미다. 


"그러니 와타나베도 더욱더 행복해져야 해.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해봐.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행복해지도록 하는 거야."

#8 그런 기회란 인생에서  두세 번 밖에 없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다른 책 어딘가에서 소설이 가진 힘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상실의 시대>를 읽고 독자가 보내온 편지에 실린 이야기다. 


자신을 무척 소심하고 내성적인 여자라고 밝힌 한 독자는, <상실의 시대>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멀리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하는 남자친구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 졌다고 했다. 장거리 연애를 하는 커플이었던가 보다. 그래서 한밤중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친구에게 달려갔다. 기숙사의 문은 이미 잠겨있는 시간, 그녀는 창문을 두드려 남자친구를 깨웠고, 비좁은 창문으로 넘어가 남자친구의 품에 안겨 너무도 행복했다고. 그녀는 편지의 끝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정말로 자신은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어떻게 그런 과감한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굉장한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그 독자의 경험이 바로 '사람이 사랑을 사랑한다는 일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신'은 일상이란 시공간 안에서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스스로의 인식에 의해 제한된 자기의 모습이다. 우리는 자신의 인식대로 우리의 틀을 그리고, 그려진 틀에 맞추어 행동하며, 결과적으로 자신에 대한 인식을 부단히 강화시킨다.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에너지가 바로 사랑이다. 


사랑하면 변한다고들 한다. 예뻐진다고도 하고, 달라 보인다고도 한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용기를 얻고, 쏟아지는 잠을 이겨낼 의지가 생긴다. '이것이 나의 모습'이라는 달팽이집처럼  보잘것없는 틀에서 벗어나, 사랑이라는 에너지에서 무한에 가까운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사랑을 사랑한다는 일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진정한 사랑을 만날 수 있는 기회란 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누구나 살아남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들 대부분은 거의 늘 비슷한, 그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여 나는 <상실의 시대>를 덮으며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가진 100을 내어주고,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을 기르며, 항상 행복하려는 노력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그리하여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어렵고 귀한 그 싸움에서 부디 살아남기를 바란다고. 


지금 만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거든 말이다. 


"내가 경험해 봐서 하는 말이지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세 번밖에 없고,
놓치면 일생을 후회하게 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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