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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07. 2015

#50 이 세상 최고의 냉면

비할 데 없이 진하고, 말할 수 없이 깊은 냉면이 거기 있었다

점심에 메밀국수를 먹으러 갔다. 


쯔유에 찍어먹는 일본식 메밀국수는 아니고, 살얼음 동동 뜬 차가운 물에 김가루와 열무김치가 풍성하게 올라간 우리식 국수다. '봉평 메밀국수'라 하면 불광역 인근에서는 상당한 맛집. 점심시간에는 여지없이 기다려야 하는 곳이다. 직장인부터 등산객, 동네 아주머니들까지 신발을 넣을 신발장이 없다. 


오늘도 우리 일행 앞에 정확히 10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땡땡이 원피스를 입은 아주머니의 파마 머리를 보며 줄을 섰다. 크지 않은 가게에서 대기 인원이 열 명이나 되는데도 그냥 기다리는 것은 그만큼 회전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후룩후룩 들이키면 한 그릇쯤 뚝딱하는데 몇 분 걸리지도 않는다. 확실히 짜장 짬뽕보다 금방 먹을 수 있다. 


일행 중 한 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집만 왜 이렇게 장사가 잘 되지?" 

뜨거운 햇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내가 대답했다. 

"여기 주변에 냉면집이 없어서 그래요."


그렇다. 불광역 주변에는 괜찮은 냉면집이 없다. 물론 '중국냉면  개시'라고 써 붙인 중국집도 있고, 싸구려 냉면을 삶아주는 분식점도 있다. 하지만 '면을 직접 뽑는' 제대로 된 '면옥'은 없다. 냉면 맛집이 없는 동네라니, '불광 먹거리촌'이란 말이 무색하다. 불광역에 유난히도 많은 보신탕 집 중에서 하나쯤은 면옥으로 바뀌어도 되지 않나. "불광 뉴타운을 짓기 전에 냉면 집부터 설립하는 것이 은평구 당국의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닌가" 하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다. 


아, 나는 은평구민이 아니지. 



어쨌거나 나는 진심으로 냉면을 좋아한다. 특히 물냉면이다. 평양냉면이라고도 한다. 평양 사람들은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은 대동강 얼음을 떼어다가 동치미 물에 말아 먹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물냉면을 평양냉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는 스토리는 내가 대충 지어낸 이야기지만, 물냉면을 평양냉면, 비빔냉면을 함흥냉면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이다. 


학창시절에 시간이 넉넉할 때는 서울 시내의 유명한 냉면 집을 찾아 제법 돌아다닌 적도 있다. 여름이면 아예 인터넷에서  40개짜리 냉면 세트를 주문해서 냉동실에 박아 넣고 저녁마다 훌훌 삶아먹곤 했다. 남들은 스무디킹에 팥빙수를 먹느라 여름 살이 찐다면, 나의 살은 전부 다 냉면국수와 열무김치 탓이었다. 물론 냉면을 먹기 전부터 기초 토대가 튼튼한 아랫배였으니 냉면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오죽하면 식사 시간에 일체의 국과 찌개를 멀리하는 '밥 따로 물 따로' 식사법을 처음 접했을 때, '그렇다면 냉면도 못 먹는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부터 들었을까. 



냉면을 어떻게 먹어야 맛있을까. 나에게는 냉면을 즐기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이른바 냉면삼락(冷麵三樂)이다. 


첫째로, 컵에 나오는 뜨거운 물을 훌훌 불어마시는 즐거움이다. 


냉면 하는 집과, 냉면 하는 집의 차이는 뜨거운 육수를 제공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리고 냉면을 하는 집과, 냉면을 제대로 하는 집의 차이는 면수를 제공하느냐에 달려있다. 자고로 냉면으로 기둥을 세우고 간판을 내건 집은 반드시 육수나 면수를 낸다. 육수는 고기 삶은 물에 조미를 해서 짭짤하고, 면수는 메밀을 삶은 물이라 구수하다. 나는 육수나 면수, 둘 중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턱' 하니 생수를 던져놓는 집만 아니면 냉면의 기본은 한다. 차디찬 냉면을 기다리면서 우선 양 손으로 컵을 잡아 뜨끈한 물을 호호 불어 마시는 그 행복이란. 마치 끝내주는 소개팅을 준비하면서 머리를 단장할 때 느끼는 설렘과 같다. 


둘째로, 살얼음 뜬 냉면 육수를 왈칵 들이키는 즐거움이다.


냉면을 받자마자 비녀를 꽂듯이 젓가락을 면에 찌른다. 고명과 면이 육수를 머금도록 두어 번 휘휘 젓는다. 실타래처럼 얽혀있던 사리 뭉치의 구석구석이 살얼음에 닿아 "앗 차가워" 할 즈음 양 손바닥으로 대접을 든다. 그릇째 입을 대고 직접 마셔야 제 맛. 수저는 브로커와 같아 육수 맛의 일부를 수수료처럼 떼 가기 때문이다. 냉면 애호가들은 이르기를 "겨자와 식초 없이 맑은 육수를 즐겨야 먹을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다. 다른 것을 넣지 않고 순수한 냉면 육수를 목구멍 가득 왈칵 들이키면, 엄동설한 함박눈에 파묻혀 뒹구는 느낌이랄까, 그 순간 만큼은 온난화 현상이 없는 또 다른 지구에 나 혼자 살고 있는 것 같다.  


셋째로, 겨자와 식초를 잔뜩 넣고 맛보는 짜릿한 즐거움이다. 


냉면의 절반쯤,  아무것도 넣지 않은 본래의 맛을 겸손하게 음미했다면 이제는 입맛에 맞게 덧칠할 순서다. <강남 스타일> 가사대로 "이때다 싶으면 묶었던 머리를 풀" 시간인 것이다. 식탁 구석에 잠자코 있던 식초와 겨자를 끌어당긴다. 식초는 면에 탄력을 주는 재주가 있다. 면 위에 촥촥 뿌린다. 그 위에 노란 겨자 통의 배를 꾸욱 눌러짜면, 타성에 젖어 미지근하게 흐물거리던 그릇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남은 냉면은 알싸하고 매콤한 맛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혹시 숨어있을지 모르는 겨자 덩어리를 조심하면서, 은퇴 후에 펼쳐지는 화려한 인생의 2막을 기대하듯 다시 젓가락을 든다. 


내가 냉면을 좋아한다니까, "서울에서는 어디가  맛있어요?"라는 질문을 가끔씩 듣는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니다. 이미 서울에는 3대 맛집도 있고, 4대 천왕도 있다. 인터넷에서 조금만 발품을 팔면 냉면 마니아 흉내를 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중에서 주관적인 평가를 곁들인 '나의 냉면 맛집'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충무로에 가면 필동 면옥이 있다. 낡고, 오래되고, 유명한 집이다. 두껍게 썰어낸 돼지 수육을 잘한다. 필동 면옥의 냉면 육수는 아주 옅은 보릿물처럼 맑다. 처음 먹는 사람은 척척 뿌린 고춧가루에 동동 떠다니는 파가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별 맛이 없는데 한 번 먹고 나면 또 가고 싶은 집이다. 


을지로입구역 하나은행 뒷골목에 가면 남포 면옥이 있다. 어복쟁반으로 유명한 집이다. 마치 호리병처럼, 입구는 작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공간이 넓은 가게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동치미 항아리들이 인상적이다. 줄을 지어 빼곡하게 땅에 묻어두었다. 대학교 2학년 첫 방문 때는 별 맛이 없어 먹다가 남겼다. 물론, 나중에 엄청나게 후회했지만. 별 맛이 없는데 또 먹고 싶어 지는 것이 진짜 평양냉면이다. 


남대문시장에 가면 부원 면옥이 있다. 낡고 허름한 건물의 2층이다. 반 백 년 넘게 운영된, 말 그대로 노포(老鋪)다. 시뻘건 제육무침과 돼지기름 냄새가 물씬 풍기는 빈대떡이 정겹다. 제대로 된 냉면을 만드는 집임에도 가격이 싸다는 것이 큰 장점. 


오장동의 흥남집은 원래 함흥냉면 맛집이다. 프랜차이즈를 하자는 제의가 끊이지 않았음에도 주인장이 거절했다 한다. 대신 신림동에도 직영점을 하나 열었다. 함흥냉면은 적당히 맵고, 적당히 달면서, 참기름 맛이 고소한 그 조화가 일품이다. 하지만 나는 흥남집에 가더라도 물냉면을 시킨다. 간장을 탄 듯 진한 색깔의 육수가 제법 괜찮다. 


육쌈냉면은 고기와 냉면을 함께 주는 집으로 크게 성공했다. 웬만한 상권에는 가맹점이 하나씩은 다 들어와 있을 정도로 흔한 가게다. 하지만 나는 육쌈냉면을 즐겨 찾으며 다시 한 번 단순한 진리를 확인했다. 바로 '본점과 가맹점은 절대로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육쌈냉면의 본점은 신림역 순대골목 부근에 있다. 잘 양념된 돼지 등심을 가게 한 귀퉁이에서 쉴 새 없이 구워낸다. 처음 육쌈냉면이 오픈했을 때 맛을 보고, "분명 유명한 집이 될  것이다"라고 확신했었다. 머지않아 늘 손님이 줄을 서는 가게가 되었고, 2층까지 쓰기 시작했다. 비록 지금은 프랜차이즈화가 되었지만, 그래도 본점의 맛은 여전히 최고다. 



그렇다면 그 많은 냉면들 중 최고의 냉면은 어디냐. 

냉면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평생 기억에 남을 '내 인생의 냉면' 같은 것이라도 있느냐. 


그렇다.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냉면이 있다.


주교동에 가면 우래옥(又來屋)이 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라도 제조하는 회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멋없게 생긴 건물이다. '또 오는(又來) 집'이라 해서 우래옥이라 이름 붙였다. 우래옥의 평양냉면이 맛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하지만 학창시절 내내 한 번도 가보지 못했으니, 오로지 가벼운 호주머니 탓이었다. 우래옥 냉면은 비싸기로 유명했다. 냉면 한 그릇에 만 원 지폐 한 장을 제일 먼저 받기 시작한 집이다. 다른 냉면집이 4, 5천 원 할 때다.  


냉면에 대해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냉면을 엄청나게 좋아했다고 한다. 살얼음이 동동 뜬 평양냉면이다. 한 번은 외국에 순방을 가는 중에 문득 냉면이 자시고 싶다 하셨단다. 대통령 전용기 안이었다. 구름 위 몇 만 피트 상공에서 냉면을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할 터. 하지만 요리사는 기지를 발휘했다. 쇠고기를 삶아 국물을 내고, 동치미 물김치를 꺼내 반반씩 섞었다. 간을 맞추어 차갑게 내니 제법 평양냉면 맛이 났다. 


나는 우래옥의 냉면 맛을 상상할 때마다 항상 이 에피소드를 떠올리곤 했다. 사람들이 평하길 우래옥 육수의 맛은 진하기가 비할 데 없고 깊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했다. 비할 데 없이 진하고, 말할 수 없이 깊은 맛은 좋은 고기를 삶은 물과 제대로 담근 동치무 국물을 절반쯤 담아내면 나올 것 같았다. 조미료의 잔 기술을 섞지 않은 최고의 맛. 한 번 찾으면 반드시 또 찾을  수밖에 없다는 우래(又來)의 맛. 냉면을 그토록 좋아했지만 맛볼 수 없었던, 늘 상상만 했던 가게였다.  



군에 입대하기 2주 전부터 나는 약속이 꽤나 많았다. 하루 두 번씩 점심과 저녁을 따로 따로 만나는 날도 계속 있었다.  스물아홉, 워낙 늦게 가는 군대다 보니 힘내라면서 밥을 사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제일 친한 친구 녀석이 내게 물었다. "뭐 먹고 싶냐. 말만 해라."  스물셋인가 넷인가, 일찌감치 사법시험에 붙어 촉망받는 길을 가고 있던 그가 법무관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부탁했다. 


냉면 사주라. 근데 좀 비싸다.


주교동 우래옥에 갔다. 을지로 4가 역에 내려 청계천을 향해 걸었다. 허름한 노포와 복잡한 좁은 도로 사이에 우래옥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냉면 집이다. 이게 늘 먹고 싶었어." 식사 때가 한참 지난 오후였다. 가게 안에는 할아버지들만 두어 테이블 앉아 있었다. 친구는 넓은 2층 자리로 올라가려 했다. 그때 종업원이 뭐라고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2층은 고기 손님을 모시는 곳이고, 냉면 손님 자리는 1층이다.'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친구는 주저하지 않고 2층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기 먹으면 되지.


우리는 노란 불판에 소불고기를 구웠고, 공깃밥을 시켰다. 치지지직 고기 익는 소리가 불판 구석구석에서 타올랐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에 국물이 자작한 불고기를 얹었다. 2층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았던 종업원을 불러 육회도 한 접시 달라했다. 어른 주먹만 한 작은 육회에 계란 노른자와 잘게 썰은 배가 함께 나왔다. 불판에 고기가 사라질  때쯤, 또 1인 분을 추가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물론, 이 모든 음식을 먹기 전에 저 유명한 우래옥 냉면을 한 그릇씩 비웠다. 친구는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이야기하라 했다. "훈련소 들어가면 먹고 싶은 생각 밖에 안 난다더라." 육회고 냉면이고 남겨도 되니 얼마든지 더 시키라고, 친구는 몇 번이고 물었다.  



식사를 마치고, 친구가 얼마를 계산했는지 정확히 모른다. 카운터의 아주머니가 '십 몇 만원'이라고 들릴 듯 말듯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던 것 같다. 뒷주머니에서 귀퉁이가 닳은 갈색 지갑을 꺼내어 계산을 마친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덕분에 잘 먹었다. 이런 유명한 집도 와보고.


그토록 손꼽아 고대했던 우래옥의 냉면 맛이 어땠는지, 나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타기 전에 먹어야 돼." 연신 고기를 구워 내 앞으로 밀어주는 친구의 재촉에 쉬지 않고 밥과 고기와 육회와 냉면을 먹고 마셨기 때문이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말은 맞다. 


세상에 비할 데 없이 진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은 냉면이 거기 있었다. 

다시는 우래(又來)할 수 없는 단 한  번뿐인 냉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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