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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07. 2015

#51 꾸준히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

괴로움은 우리가 노력 중이라는 증거

책상 모서리에 놓여있던 <원태연 알레르기>를 집어 들었다. 


피부 연고도 아니고, 마시는 영양제도 아니다. 시집의 이름이다. 회사에서 한 분이 "어떻게 원태연을 모를 수가 있어요?"하고 핀잔을 주시더니, 집에 있던 책을 손수 들고 와 빌려주셨다. 받아서 책상 위에 둔 지 한 달 정도 지났는데, 그 위에 일거리와 다른 책들이 켜켜이 쌓여 백악기 공룡처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원태연이라는 사람을 처음 들었다. 1990년 즈음에 연애와 청춘을 노래한 달달한 하이틴 시집으로 꽤나 유명했던 사람이라 했다. "어떻게 원태연을 모를 수가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나보다 몇 해쯤 연배가 높은 분들일 것이다. 첫 시집이 50만 부가 팔렸다던가, 그런 이야기도 들었다. 그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그가 썼던 몇몇 문장은 나도 들어본 기억이 있다. 


"넌 가끔 가다 내 생각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해."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그걸 뺀 만큼 너를 사랑해." 


다리를 배배 꼰 핑크빛 낙지가 연상되는 낯 간지러운 구절이다. 한 번 들으면 잊기 어려울 만큼 화끈화끈 부끄럽다. 인상적인 문장임은 분명하다. 실제 써먹으려면 적잖은 용기를 필요로 하겠지만 말이다. 1990년 즈음이면 아직 내가 중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았을 때다. 나는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인터넷 어딘가에서 저 구절을 주워들었다. 10년 이상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시구인 셈이다. 시로써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시인이 거의 없다 해도 틀리지 않은 이 세상에서 50만 부라니 어쨌든 대단한 일이다. 

누렇게 낡은 <원태연 알레르기>의 책장을 여기저기 넘기다가, 요즘 한창 주목받고 있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SNS 시인들이다. 모바일 플랫폼에서 연재를 하다가 책도 내고 방송에 나오기도 했다. 이상하게 생긴 책이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코너에 꽂혀있는 것을 보았는데, 어느새 여기 저기서 그 이야기만 했다. "진짜 웃기다." "이거 본 적 있느냐." 면서 지금 가장 '핫'한 사람이라고 여러 명이 추천을 해 주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찾아보았다. 패러디의 형식으로 씁쓸한 현실을 비틀기도 하고, 한  줄짜리 문장으로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의 감각을 캐치해내기도 했다. 확실히 재미는 있었다. 무엇보다, 짧았다. 시간이 갈수록 호흡이 짧아지는 세대다. 스마트폰에 보이는 한 장의 화면으로 시작하고 끝내야 된다. 말 그대로 '한 문장 긴 여운'이 어울리는 SNS 시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 역시 들었다. 


오래갈까.
내년 이 맘쯤에도 이 사람의 글이 읽힐까.

물론 유명세를 얻는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생계에 대한 걱정을  조금쯤은 덜 수 있고, 따라서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할 시간을 늘릴 수 있다는 말이니까. 사람은 원래 칭찬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봐 주는데 싫어할 사람은 흔치 않다. 


문제는 반짝 유명세를 얻기는 쉬워도 그것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이다. 아니, 정정하자. 반짝 유명세를 얻는 일도 물론 쉽지 않지만, 그것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히 어렵다. 예로부터 창업수성(創業守成)이라 했다. 이루는 것은 쉬울 수 있어도, 지키는 것은 어렵다는 뜻이다. 


낡은 <원태연 알레르기>를 손에 들고, "어떻게 원태연을 모를 수가  있어요?"라는 말을 되새기며, '핫'한 SNS 시인들을 생각했다. 어쩌면 인구에 회자되고, '좋아요'의 힘으로 태풍처럼 SNS를 휩쓸다가, 머지않아 비를 다 뿌리고 나면 깨끗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면 또 다른 '핫'한 누군가가 엄청난 헥토파스칼의 중심기압을 품고 빠른 속도로 북상할 것이다. 매년 여름 그렇듯, 생성과 성장과 소멸을 반복하겠지. 그런 과정을 일러 '대중에 소모된다'고 표현했던 것 같다. 


저주하는 것도, 경고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될 가능성이 보인다는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물론, 짧은 인생에 단 한 번 빛을 발하는 것도  대단한 일인 것은 맞다. 그래도 백색왜성처럼 반짝하고 사그라드는 것을 반기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유명세로 먹고 사는 연예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소원은 '꾸준히 사랑받는' 것이다.

노벨문학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다고 평가되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혜성처럼 등단한 천재 작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무명의 그가 중편 소설 한 편으로 신인상을 수상했을 때, 편집국의 높은 사람은 하루키에게 정말로(그리고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 


자네 작품에는 상당히 문제가 많지만, 아무튼 앞으로 열심히 해봐. 


소설 작법을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고, 문단과는 철저히 거리를 두었던 하루키였지만, 어쨌거나 그는 꾸역꾸역 글을 써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양을 쫓는 모험>처럼 대중의 열광을 기대하기에는 사실상 어려운 작품들이었다. 화려하게 빛나지도, 탁월함을 폭발시키지도 않은 채 꾸준히 제 갈 길을 간지 9년 만에 비로소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를 탄생시켰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4,5년을 주기로 <해변의 카프카>,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처럼 굵직굵직한 장편 소설을 하나씩 내놓았고, 그 사이의 여백을 단편소설집과 에세이, 여행기로 꼬박꼬박 메꿨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다. 하루키의 신작을 기다리는 독자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으며, 갓 구워낸 새 책을 사려는 팬들의 줄은 시간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흔 살의 하루키는 대단했지만, 쉰 살의 하루키는 더 대단해졌고, 지금의 하루키는 언제 노벨문학상을 수상해도 이상하지 않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대작가가 되어버렸다. 


비단 꾸준함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뻗어 올라가는 나무처럼 계속 자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하루키. 우리가 진실로 되기를 원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는지. 순간의 '핫'함이 아니라, 느리더라도 지속적인 '성장'을 꿈꾸어야 할 것 아닌지. 


<원태연 알레르기>를 덮으며 몇 가지를 생각해본다. 어떻게 하면 둘 중에서 후자를 택할 수 있을까. 어떤 방향으로 걸음을 내딛어야 하루키의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을까.

첫째는 실력이다. 땀은 배신하는 법이 없고, 실력은 우연의 파도를 뛰어넘는다. 


하지만 '실력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자못 난감할  수밖에 없다. 하루키는 소설을 배운 적 없이 소설가가 되었으며, 스필버그는 영화를 배우지 않고도 영화를 찍었다. '학교와 학원에서 든든한 기본기를 장착한 이들만 지속적인 성공이 가능하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는 우연히 쓴 첫 작품으로 등단했지만, 끝내 '일본의 문학정신'으로 우뚝 선 반면, 그와 아쿠타가와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던 어느 내공 있는 문학청년은 문학사에서 그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므로 생각한다. 실력이란 통조림처럼 한 번 만들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단련하고 키워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조정래는 <태백산맥>에서 말하기를 '빨치산들이 산을 타는 속도가 빨랐던 것은, 발을 디딜 바위를 보고 뛴 것이 아니라, 뛴 다음에 발을 디딜 바위를 찾았기 때문'이라 했다. 실력도 마찬가지다. 일하면서 배우고, 쓰면서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실력을 갖춰놓고 승부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승부를 벌이면서 실력을 닦아야 한다. 


어느 분야에 인생을 걸 결심이 섰다면,
평생 도제나 훈련병처럼 스스로를 연마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  

둘째는 담미(淡味)다. 담백한 맛은 오래가고 자극적인 맛은 잠깐이다. 


감각기관은 자극에 적응한다. 감각 역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따르는 까닭에 자극에 노출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둔해진다. 외설과 폭력이 처음에는 충격적이더라도 계속 보다 보면 무뎌지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러므로 강한 구호를 이기려면 더 강한 주장을 내세워야 하고, 큰 목소리를 이기려면 더 큰 비명을 질러야 한다. 이전의 감각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이목을 집중시키려면 결국 보다 자극적인 무언가를 제시해야 한다. 계속 강렬한 것만 찾다 보면 끝내 사회적 합의나 도덕을 위협하는 지점에 이른다. 불륜과 탄생의 비밀, 네 겹 사돈이 그런 예다. 맵고 짠 음식은 당장 혀에 즐겁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을 망친다. 우리는 그런 것을 일러 '막장'이라 부른다. 


긴 호흡은 담담하다. 등락과 부침에도 휩쓸리지 않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가야 할 길을 꾸준히 간다. 그것이 지속 가능한 길이다. 진정한 성공은 지속 가능함이 축적된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쾌락주의로 유명한 그리스의 에피쿠로스 학파가 최종적으로 제시한 최상의 행복은 '아타락시아' 즉, 평화롭고 담담한 마음 상태의 유지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노력이다. 노력하는 한 사람은 괴롭기 마련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재능이 지표 가까이 묻혀있는 경우도 있어 조금만 땅을 파도 쉽게 샘솟는 반면, 자신의 재능은 너무도 깊은 곳에 있어 모습을 드러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마다 매번, 무언가가 묻혀있는 저 아래의 어딘가를 향해 땀을 뻘뻘 흘리며 파내려 가야 했다고. 그러나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얻은 것은 일종의 자신감이었다. 아무리 깊은 곳에 묻혀있더라도 파고 또 파면 반드시 닿을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 말이다.


한편 마루야마 겐지는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괴로움에 대해 이런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치 바위산에 터널을 뚫는 것과 같다. 매번 폭약을 심고, "꽝" 하고 발파를 해서 무너뜨린 공간만큼 겨우 터널이 이어진다. 술술 써지는 글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어느 위치에 올랐건, 사람은 노력하는 한 괴로울  수밖에 없다. 


노력이란 '지금보다 나아지기 위한' 행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행동은 언제나 자신의 한계에 대한 투쟁이 된다. 나는 검도를 10년 넘게 했지만, 호구를 처음 썼던 초보자 무렵이나 시합에서 종종 메달도 따는 지금이나 수련 시간은 똑같이 힘들다. 보다 빨리, 보다 정확하게 몸을 던져야 하기에, 늘 가능한 한 열심히 해야 하는 까닭이다. 목표는 항상 비교급인 '보다'를 겨냥한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괴로워하고 있다면,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노력하는 한 성장할 수 있기에 사람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한 가지는 믿는다. 가고 싶은 한 가지 길을 꾸준히 갈 수 있는 정도의 시간적 여유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말이다. 가지 않아서 가지 못하는 것일 뿐, 가려한다면 갈 수는 있다고, 인생이 아무리 야박하더라도 그 정도는 허락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나에게는 있다. 


이런 믿음이 틀림없다고 목에 힘을 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중에서 가지 못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갈 수 없다고 믿는 사람 중에서 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평생 멈춤 없이 스스로를 닦고, 담미를 지키고 조급함을 떨치며, 괴롭지 아니할 수 없는 노력을 경주하려면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래서 언젠가, 저 멀리 어딘가에서 앞선 사람들의 뒤꿈치 어딘가에 나의 발을 디딜 수 있으면 그것으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진실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그런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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