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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07. 2015

#54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최고의 음식

이제는 아무리 해도  그때의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점심에 뷔페를 먹었다. 


업무상 진행하는 외부 행사 덕분에, 일을 마치고 손님들 사이에 끼어 접시를 들 수 있었다. 몇 시간 동안 꽉 끼는 넥타이를 참는 대신에 괜찮은 냠냠이다. 외부행사가 피곤하긴 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이유다. 알록달록한 먹을거리를 요즘 뷔페에서는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큰 접시에 잔뜩 담았다. 나는 연어무침과 초밥 무더기 위로 부지런히 포크를 놀리며 무심결에 이렇게 말했다. 


"여긴 별로 먹을 게 없네요." 


다른 분이 말을 받았다. 


"가격 대비 괜찮은 거지 뭐." 

그동안 살아온 서른 해 남짓을 곰곰이 되짚어 보면, 삶이라는 것이 '속옷까지 완전히 갈아입듯' 싹 바뀌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대학에 들어갔던 10년 전에도, 방과 후에 공놀이나 하기 바빴던 20년 전에도, 뭔가 지금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과 판단을 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때 좋았던 것을 지금도 좋아하고,  그때 싫어했던 것을 지금도 싫어한다. 요컨대 양적으로는 늘어났으되, 질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는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조금씩 그런대로 살림살이가 나아지긴 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경제성장률이나 연봉 인상액 같은 추상적인 수치로는 실감하기 어려운 일이다. 대신에 아주 구체적인 물건이나 사례, 이를테면 짜장면 같은 것을 들어, 2014년과 1990년을 비교해보아야 깨달을 수 있다. 

1990년의 우리 집은 규칙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내가 시험에서 올백을 받으면, 우리 집은 짜장면을  먹는다'였다. 그 시절에는 월례고사라 해서 초등학생에게도 매달 시험이 있었다. 국어, 산수, 사회, 과학, 예체능까지. 대략 대여섯 과목 정도였다. 


무슨 시험이건 간에, 100점은 쉽지 않은 점수다. 하다못해 운전면허 필기시험도 그렇다. 그런데 전 과목을 다 100점을 맞아야 짜장면을 먹을 수 있었으니, 그 얼마나 월계수 이파리로 만든 관처럼 쓰기 어려운 영광인가. 


내 기억에 올백은 대략 일 년에 한 번 정도 있었다. 전화번호부처럼 두꺼운 동아전과를 사다 놓고, '참고로 읽어보세요' 같은 곁다리 깨알 글씨까지 깡그리 외워야 겨우 그  정도였다. '2-0' 같은 문제에 '0'이라고 답을 썼던 나의 덜렁거림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동생의 생일에도,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도, 2년 마다 한번씩 옮겨 다녀야 했던 전셋집 이사 날에도 먹지 못했던 짜장면이었다. 1990년의 우리 집은 그랬다. 

그에 비하면 요즘의 끼니는 루이 16세의 식탁처럼 호화롭다. 조조영화로 '고질라'를 보고 나서 '불맛이 일품'이라 쓰여있던 마카오 짜장면을 먹은 게 지난 주말이다. 조금 전의 뷔페에서는 "에이, 무슨 뷔페가 짜장면을 내놓나" 하고 겨우 한 젓가락만 깨작거렸다. 사무실로 돌아와 내일 있을 점심 약속을 정하며 "짜장면은 빼고요, 요즘 너무 자주 먹었어"라는 쪽지를 보냈다. 2014년, 나의 짜장면이다. 


어디  짜장면뿐이랴. 냉동실을 열면 땡땡 얼은 아이스크림들이 낙석처럼 떨어진다. 먹을 것이 넘치는 탓이다. 베란다에는 참치캔이니 스팸이 두어 개 씩은 있고, 사탕이나 과자 따위의 주전부리는 주방 한 구석에서 늘 잠을 잔다. 맥북 두 대와 노트북 한 대, "그만 좀  부려먹어"라고 툴툴거리는 고물 데스크톱 한 대까지 포함하면 컴퓨터는 가족의 머리 수 대로. 핸드폰 역시 인당 한 대가 넘는다. 쓸 줄만 안다면 하나쯤 푸들에게 주어도 될 정도다. 


푸들, 맞다. 

푸들. 


치석 제거에 좋다는 개껌을 사서 물리고, 천하장사 소시지를 잘게 썰어 푸들용 간식으로 준다. 푸들 전용 샴푸에, 푸들 전용 삑삑이 장난감에, "개 기르는데 뭐하러 돈을 쳐들여!" 하고 야단치는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확실히 격세지감이다. 


모든 것이 풍요로와졌다.

조금씩 조금씩 말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이상하다. 군대에 있을 때는 고작 하루 한 시간의 여가를 빼곡하게 활용해 몸을 만들고 영어 단어를 외우던 사람들이, 전역 후에는 넘고 처지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 '리그 오브 레전드'를 죽치고 있듯, 넉넉해진 모든 것은 소중함이 사라지고 만다. 


돈가스가 흔해지면서 돈가스의 해피함이 온데간데 없어졌고, 김밥이 1500원이 되면서 김밥 특유의 설렘이 자취를 감췄다. 사이다도, 투게더 아이스크림도, 크림빵도. 이제는 그저 시큰둥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나 자신을 깨닫는다. 


나는 굉장히 먹고 싶은 음식이 세 가지 있다. 
이 세 가지 모두, 아마도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음식일 것이다. 

첫째, 도시락의 흰 밥 위에 얹은 계란 프라이. 


내가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간 것은 고등학교 1학년 까지였다. 6교시 수업이 처음 생겼던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대략 6년 동안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갔다. 앞뒤로 책상을 돌려 앉아, 혹은 마음에 맞는 친구끼리 옹기종기 모여 도시락을 먹곤 했다. 소시지 반찬을 잘 싸오는 친구가 인기가 많았던 기억도, 서로 자기 책상에서 먹기 싫어 투정을 부렸던 기억도 난다. 학교 급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매일 있던 일과였다. 


나는 네모진 도시락 위에 납작하게 눌려있던 하얀 계란 프라이가 그렇게나 맛있었다. 기름은 밥알을 노랗게 물 들이고, 계란 프라이가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지고 나면, 잘 끊어지지도 않는 새카맣게 탄 가장자리를 큼지막한 숟가락으로 뚝뚝 퍼서 입에 넣었다. 갓 부쳐낸 따끈따끈한 계란 프라이에는 없는, 한창 자랄 무렵의 허기짐과 교실 급우들의 왁자함이 섞인 고소하고 비릿한 무언가가 거기에는 있었다. 

둘째, 된장찌개 속 꺽둑꺽둑 썰은 호박 


어릴 적에 어머니는 된장찌개를 무던히도 많이 끓였다. "된장이 이게 얼마나  좋은데"라는 말을 어머니는 늘 입에 달고 살았지만, 어쩌면 김치찌개는 '김치가 푹푹 들어가기 때문에' 겨우 된장 두 숟가락이면 한 냄비를 바르르 끓일 수 있는 된장찌개가 만만했을 수도 있다. 아버지가 통풍에 걸리고 나서, '된장이 좋지 않은 병도 있다는 사실'을 겨우 알게 될 때까지 된장찌개는 적어도 이틀에 한 번 꼴로, 식탁 위를 차지하는 단골 메뉴였다. 


그래도 나는 다행이었던 것이, 된장찌개 속에 들어있는 호박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 지면 호박의 씨가 있는 흐물흐물한 부분이 좋았다. 혹여 찌개를 너무 오래 끓여 흐물흐물한 부분이 녹아 사라지기라도 하면, 닭다리가 사라진 통닭처럼 아쉬웠다. 찌개 속의 호박만 젓가락으로 쏙쏙 골라먹곤 했던 나였다.  그때는 호박이 그렇게 달고 맛있었다. 

셋째, 보릿물에 말은 밥 위에 얹어먹는 노란 체다치즈 


치즈가 귀하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치즈는 귀하다. 아직 마트에서 가격표를 보지 않고 척척 카트에 넣을 수 있는 형편은 되지 않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십 수년 전만 해도 치즈는 서울우유에서 나온 정사각형 노란색 체다치즈 밖에 없었다. 구멍이 뻥뻥 뚫린 둥근 치즈는 '톰과 제리' 같은 만화영화에나 있는 존재였다. 


나는 치즈를 아주 많이 좋아했다. 하지만 갖고 싶은 모든 것은 흔하지 아니하고, 인기 있는 모든 사람은 튕기기 마련 이듯, 맛있는 모든 음식은 항상 비쌌다. 그러므로 나는 치즈를 최대한 오래, 맛있게 먹어야 했다. 이를 위해 내가 찾은 방법이 '보릿물에 말은 밥 위에 한 조각씩 얹어 먹기'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밥은 찬밥에, 보릿물은 펄펄 끓어야 베스트다. 반대로 뜨거운 밥에 찬물을 말면, 밥알이 퍼져 별로였다. 미세한 차이지만 분명 그랬다. 


찬밥에 뜨거운 물을 부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곰처럼 밥알이 생생해지면, 물 말은 밥을 한 숟가락 뜨면서 그 위에 치즈를 얹는다. 기껏해야 손톱 크기의 치즈다. 치즈가 뜨거운 밥물에 녹아들 수 있도록 아주 잠깐, 2~3초쯤 기다린다. 그리고 밥과 물과 치즈를 한 번에 입으로 쏘옥. 이렇게 하면 검은 바탕의 노란색  경고글처럼, 보릿물의 구수함을 배경으로 치즈의 향이 최대한 살아났다. 조그만 조각임에도 불구하고 치즈는 잠재력을 발휘해 입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이런 식으로 손바닥만 한 치즈 한 장을 두 끼나 세 끼에 나누어 먹곤 했다. 

차갑게 식은 계란 프라이, 된장찌개 속 호박 덩어리, 손톱만 한 체다 치즈 조각. 


나의 입맛이 변해버렸을까.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혀의 미뢰가 둔해져서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이제는 아무리 해도,  그때의 그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는 그저 '식어빠진 계란 프라이'와 '별 볼일 없는 찌개  건더기'일뿐이다. 예전의 맛을 느껴보려 고향집을 찾은 노인처럼 혀 끝으로 호박과 치즈를 더듬어도 그 시절의 '굉장함'은 깨끗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하여 나는 세 가지를 떠올린다. 


물질적인 넉넉함이 감각의 예민함이 주는 기쁨을 앗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과, 과거에 맛보았던 행복을 이제 다시는 그대로 경험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허전함과,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즐거워하는 모든 것들 역시 언젠가는 
체다치즈처럼 희미한 향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깨달음을 말이다. 


삶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서로 자리를 바꾸듯 본질적으로 바꾸는 일은 극히 드물며, 그나마 우리는 주머니를 채워가는 대신,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며 걷고 있다. 언젠가,  지금 우리를 굉장히 행복하게 만드는 무엇인가에 대해 '별로 먹을 것이  없네요'라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적혀 있던 것은 다윗왕의 반지였던가. 


그러므로 결국, '지금'에 최선을 다해 즐길  수밖에. 부지런히 놀고, 열심히 공부하고, 쓰러지기 직전까지 걷는 거다. 1990년이 한 번 뿐이듯, 2014년도 한  번뿐이다. 아직은 나의 삶을 '가격 대비 괜찮은 것' 쯤으로 만족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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