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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07. 2015

#53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기억에 남는다

뇌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자이가르닉 효과'

무라카미 하루키는 평생 동안 넉 달에 한 권 꼴로 책을 냈다'는 어느 문학평론가의 글을 본 적이 있다. 


번역된 하루키 책은 100권 정도 되려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작품까지 합치면 그 정도 되나 보다. 장, 단편 소설은 물론 여행기, 재즈 에세이니, 논픽션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쏟아내는 하루키다. 더 놀라운 것은, 하루키 스스로 "써놓고도 발표하지 않은 글들이 창고에 박스 채로  쌓여있다"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적인 글이란 진심으로 빙산 꼭대기의 한 조각과 같아, 그 아래 수면에 잠겨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의 양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하루키는 어떻게 그 많은 글을 '계속' 쓸 수 있었을까. 직장인들은 수요일 오후만 되어도 반쯤 먹어치운 파인애플 통조림처럼 영혼의 안쪽으로부터 '깡. 깡. 깡.' 하는 텅 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생산해 낸다는 사실은, 체력의 문제 이전에 의욕의 고갈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작업은 지속적인 성공 그 자체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과연 하루키는 어떻게 계속 글을 써냈을까.   


그 노하우를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밝혔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아마 비슷한 이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술술 글이 써질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흐름을 타기 시작할 때 파도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식기 전에 마셔야 한다. 뜨거운 라면은 불기 전에 먹어치워야 한다. 그런데, 한창 맛이 들려고 할 때, 과감하게 내려놓으라고? 


그런데 헤밍웨이 역시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다. 유명한 문학 잡지 <파리 리뷰 인터뷰>에 실린 대담집에서 헤밍웨이가 밝힌 작업의 노하우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게 될 때 글쓰기를 멈춥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바로 그 부분에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지요. 여전히 쓸 것이 있으며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는 그런 곳에 이를 때까지 글을 쓰다가 멈추고는 다음날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살아 있으려고 애를 씁니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을 때 글쓰기를 멈춘다면 계속 쓸 수 있지요. 글쓰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이 다 잘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 - <파리 리뷰 인터뷰, 작가란 무엇인가> 중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작가, 최근 100년 간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두 명의 대 작가가 공통적으로 언급한 비결이니 우연한 징크스 따위로 치부할 수는 없다. 우리네 상식과 정반대의 일이라 오히려 흘려 듣기 어려운 조언이다. 잘 써질 때 그만 두어야, 더 잘 쓸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답은 심리학에 있었다.


바로,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다. 

1920년 대 중반, 베를린대학 부근의 식당에서 대학 관계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식당은 상당히 붐비는 장소여서 손님도 많고 주문도 복잡했는데, 웨이터는 일체의 메모 없이도 그 많은 주문을 외우고, 요리를 정확히 주문한 사람에게 서빙했다. 사람들은 웨이터의 뛰어난 기억력에 감탄했으며,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떴다. 


그때 일행 중 한 명이 식당에 물건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행은 식당으로 다시 돌아가 기억력이 탁월했던 웨이터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웨이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행을 쳐다볼 뿐이었다. 웨이터는 그들이 어디에 앉았으며, 어떤 음식을 시켰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조금 전의 일을 깡그리 잊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웨이터는 이렇게 답했다. 


"음식이 나와서 서빙을 마칠 때 까지만 기억합니다." 

일행 중 한 명이었던 자이가르닉은 심리학을 전공 중인 대학원생이었다. 그는 웨이터의 행동에 깊은 호기심을 품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실험은 이런 식이었다. 그룹을 둘로 나누어 한 그룹은 과제를 마치도록 했고, 다른 그룹은 마치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다. 그리고 나중에 두 그룹 중 어느 쪽이 수행했던 과제에 대해 더 잘 기억하는 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방해를 받아 과제를 마치지 못한 그룹의 기억력이 더 높았다. 과제를 끝마친 그룹에 비해 무려 1.9배 정도 기억의 양이 많았다고 한다. 비슷한 실험을 거듭했지만 결과는 동일했다. 중단된 과제, 끝마치지 못한 업무, 중간에 방해를 받으며 진행했던 일에 대해 사람은 더 잘 기억했다. 


자이가르닉은 기억력의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사람은 시작한 일을 마무리짓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우리의 마음은 하다가 만 일을 불편하게 여긴다. 따라서 과제를 끝마치지 못한 경우, 뇌에서는 심리적인 긴장이 계속되고, 무의식 중에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뇌피질의 시냅스가 활성화된 상태를 유지한다. 기억력의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중단된 일이 더 잘 기억에 남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연구자의 이름을 따서 '자이가르닉 효과'라는 이름이 붙었다. 완성되지 않은 일일수록 기억에 남고, 갖지 못한 것일수록 기억에 남으며, 이루지 못한 목표는 잊을 수 없는 자이가르닉 현상. 우리 식의 익숙한 표현으로 하면 '미련'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시냅스가 활성화된 상태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기억력의 향상은 힌트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손님이 주문한 메뉴를 실수 없이 잘 서빙할 수 있는 노하우 정도로 자이가르닉을 활용하는데서 그친다면 마치 소 잡는 칼을 고작 마늘 까는 일에 쓰는 격이다. 우리는 그 칼을 관우의 청룡언월도처럼 휘두를 수도 있다. 문제를 해결하고, 반짝이는 기획안을 만들고, 끝내주는 아이템을 발굴하고, '노인과 바다'를 쓸 수 있다. 


하루키와 헤밍웨이는 심리학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경험에 의해서 이러한 사실을 체득하고 있었다. 만일 글이 잘 써지는 부분에 다다랐을 때, "오늘은 이 장면까지 글을 마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면, 그날 하루는 비록 만족스러운 날이 되었을 지언정, 다음날 글을 이어가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뇌는 깔끔하게 완성한 일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시 이야기를 전개할, 마음의 동력이 사라져버린다. 텅 빈 공터에서 기초공사부터 시작하듯, ABC부터 다시 아이디어의 불을 지펴야 한다. 그런 식으로 글을 쓰게 되면 지속적인 작업과는 안녕. 글감과 영감이 떨어져 수시로 슬럼프를 겪게 될 가능성이 크다. 헤밍웨이가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글쓰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이 다 잘되고 있는 것이라고. 


자이가르닉 효과에 대해 우리가 커다란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뇌의 스위치를 계속 on 상태에 두어 그 잠재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 힌트를 알려 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다 나은 아이디어와, 보다 적은 슬럼프와, 보다 괜찮은 기억력과, 보다 높은 생산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탁월성으로 향하는 이정표다. 

내가 활용해보고자 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써서 머리맡에 붙인다. 


심리학자 엘렌 렝거는, 문제를 글로 쓰는 행위 자체만으로 우리 뇌는 상당한 자극을 받는다고 했다. 시냅스의 활성화는 이를테면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하나를 실행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록 '최소화' 단추를 클릭하여 모니터 화면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컴퓨터는 계속 그 작업을 하고 있다. 붙여둔 과제를 보면, 무의식적으로라도 뇌에 지속적인 자극이 주어질 것이고, 지속적인 자극은 훌륭한 아이디어로 가는 문을 열어줄 것이다. 


둘째, 중간에서 시작해 중간에서 하루의 작업을 마친다. 


내가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는 실버스타 스탤론의 '록키 4'였다. 대여섯  살쯤 이었을 것이다. 다 무너져가는 낡은 동네 극장에 도착했을 때, 영화는 이미 상영 중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괘념치 않고 극장에 들어갔고, 우리는 시작한 지 1시간쯤 지난 뒤부터 록키를 보기 시작했다. 록키의 친구가, 적으로 나왔던 돌프 룬드그랜에게 맞아 죽는 장면부터였다. 거기서 시작해 영화는 록키의 경기로 이어졌다. 아마 도입-전개를 지나 절정을 향해 가는 즈음이었을 것이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사람들은 자리를 떴지만, 우리 가족은 계속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음 회차 상영 시작을 기다려 전반의 1시간을 본 후, 상영 중간에 극장을 나왔다. 맞아 죽은 권투 선수가 록키의 아주 오랜 절친이었음은, 록키의 시합이 복수전이었음은  그때 알았다. 


나는 지금까지 수백 편의 영화를 보았지만,  줄거리는커녕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가 대부분이다. 특히 시리즈로 이어지는 그저 그런 영화들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록키 4'의 줄거리는(그리고 심지어 록키 '4'였다는 사실까지!)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지 않은가. 


나는 '록키 4'처럼 작업을 해보려 한다. 하루에 '기승전결'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작업에 이어 '전결'을 하고, 다시 새로운 '기승'을 시작한다. 다음 날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아는 '전결'에서 스타트를 끊는 것이다. 


상상력을 뻗어나가 보면 자이가르닉 효과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무수히 많지 싶다. 매일의 작업에 미련을 남겨, 평생의 일에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 


첫사랑이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을, 공부를 첫사랑 떠올리듯 한다면 얼마나 많은 것을 남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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