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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11. 2015

#64 꾸준히 쓰는 한, 나의 글은 계속 나아질게다

어쩌면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세 가지 글쓰기 요령

대학원생인 아우가 물었다. 
"오늘 학교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았다. 왜 그런지 알아?"

"글쎄. 수시 시즌은 좀 이르고. 경시대회라도 있나?" 


아우는 혀를 끌끌끌 찼다. 시골 경운기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새 늙으셨구먼. 영락없는 아저씨여." 


아우가 말하길 만우절이라 그렇단다. 요즘 대학생들은 만우절에 교복을 입는 퍼포먼스를 하나보다. 학창시절에, 책상을 들고 교실을 바꿔 앉는 장난을 쳤던 기억이 난다. 세월 따라 유행은 바뀌기 마련인데, 만우절 덕에 일 년에 한 번쯤 옛날 교복을 입을 수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이가 들면 교복을 입고 싶어도 차마 못 입는 때가 오기 마련이다. 

아무튼 교복이야기를 하다가 만우절임을 알았다. 4월 1일이다. 


4월 1일이라. 문득 생각해보니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 지 어느덧 일 년이다. 작년 만우절에 #1의 번호를 달고 '즐거운 편지'를 처음 쓰기 시작했다. 365일 동안 #87까지 썼으니 나흘에 한 개 꼴. 문을 열었을 때는 매일 편지 한편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계획'은 '기대'에 못 미치고, '실천'은 '계획'을 못 따라가며, '결과'는 '실천'보다 초라하다. 좀 더 부지런해야 되는데. 


생각해보니 서른 해 넘게 살면서, 목적의식이랄까 외부적인 보상이랄까,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지 않고 자유롭게, 붓 가는 대로 일 년이란 시간을 꾸준히 써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교복을 입고 썼던 그 옛날의 연애편지나, '합격!' 두 글자를 책상 머리에 붙이고 꽉꽉 채웠던 논술 답안지는 목적의식이 뚜렷했던 거니까. 누가 상 준다는 말이 없는데도 꾸역꾸역 키보드를 눌러댔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뿌듯하다. 


셀프로 어깨 토닥토닥. 


4월 1일을 맞이해서, 나름의 글쓰기 편력을 적어볼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높은 조회수를 기록할 만한 '셀러브리티의 여성 편력'도 아니고, 통통 배 나온 '영락없는 아저씨의 글쓰기 편력' 따위, 식어빠진 치킨처럼 재미없을 것 같다. 붓가는 대로 글 쓰는 이여, '셀러브리티의 글쓰기 편력'이나 '영락없는 아저씨의 여성 편력'을 쓸 재주가 없다면 때려 치우자. 

하지만 1년이라는 길이의 시간은 그래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으로 두들겨보니 <1년만 미쳐라>와 <1년만 버텨라>라는 책이 쌍둥이 마냥 얼굴을 내밀고, 일본의 한 소설가는  '스물아홉, 1년 후에 죽기로 결심' 운운한 이야기를 글로 썼으며, 어느 괴짜 뉴요커는 1년 간 성경 말씀 그대로 살기'를  시도했다. 그뿐인가. 공무원 시험, 1년만 하면 합격한다는 책은 수도 없이 많고, 입사 후 1년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책도 있으며, '1년 간 1억 벌기'와 '1년 간 10억 벌기'에 대한 책이 나란히 놓여있다(엥?). 하기야 '1년에 500권 독서'라는 책과 '1년에 1000권 독서'라는 책도 같이 검색되니 할 말은 없다. (이렇게 찾아보니, 붓가는 대로 자유롭게 글이나 끄적거린 나의 1년은 마치 허송 세월 같다.) 


허송 세월이면 어떠랴. 미친 것도, 버틴 것도 아니고, 무슨 시험을 본 적도 없으며,  10억은커녕 1억 도 벌지 못했고, 1000권은 젠장 500권도 읽지 못했지만, 그래도 글을 쓰는 동안 '죽기로 결심'한 적은 없으니, 나름 행복한 시간 아니었나. 기왕 그래도 1년을 꾸역꾸역 써온 것, 그래도 무엇을 느꼈는지 간략하게 적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싶다. 


세 가지만 들어보자

첫째, 글을 쓰면 쓸수록 글 역시 일종의 '물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린트해서 종이를 손에 쥐기 전까지 글은 .hwp나 .txt라는 꼬리표가 붙은 파일일 뿐이다. 그래서 컵이나 연필처럼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라는 느낌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 한 잔의 에스프레소를 내리거나, 한 자루의 감자를 캐는 것은 어떤 '일'을 했다는 확신이 생기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 하루 종일 글을 썼다고 해도, 도대체 무슨 일을 얼마나 한 것인지 일단은 알 수가 없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글쓰기의 '비 물체성'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글쓰기의 비 물체성' 때문에 종종 드는 착각이 하나 있다. 


바로 '마음만 먹으면 후다닥 써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다. 


게다가 사람의 생각이란 얼마나 번개처럼 빨리 움직이는가. 개요를 잡을 때는 '이렇게 해서 요렇게 연결한 뒤에 저렇게 하면 되겠네' 하고 기승전결이 일사천리로 이어진다. 


하지만 막상 머리 속의 아이디어를 글자로 풀어내는 일은 호미로 밭을 가는 것처럼 느리고 힘들기 마련이다. 한 글자, 한 글자가 피할 수 없는 고역이다. 일정한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괜찮은 주제를 잡을 수 없고, 일정한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매끄러운 문장을 쓸 수 없다. 모차르트도 수없이 고쳐 쓴 뒤에 위대한 악보를 완성시킬 수 있었고, 링컨도 게티즈버그 연설의 초안을 잡기 위해 종이로 쓰레기통을 가득 채웠다지 않는가. 


그렇지만 글을 자주 쓰다 보면, '계산'이 선다. '이 주제로는 어느 정도 분량을 채울 수  있겠구나'와 '이 분량이면 시간이 이 정도 걸리겠구나'에 대한 계산이다. 결국 분량과 시간을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투입되는 '시간'과 산출되는 '글'의 연관관계가 선명해지면서 살살 조금씩 글의 '물체성'이 손에 잡히기 시작한다. 한 채의 집을 짓는데 시간이 걸리듯, 한 권의 책을 쓰는데도 꽤나 긴 시간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둘째, 글은 잘 써질 때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일 때도 있다. 


하나의 강이더라도 지형에 따라 그 흐름이 아주 빠른 곳도 있고, 유달리 느린 곳도 있다. 똑같은 게임을 하더라도 적의 공격이 잘 피해지는 날도 있고, 자꾸 두드려 맞는 날도 있다. 매일 하던 공부라도 진도가 팍팍 나가는 시기가 있고, 슬럼프에 허덕이는 시기도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1년 동안 글을 써오며 확연히 깨달은 사실 한 가지는 '안 써지는 글은 안 써진다'는 것이다. 이전에 어디선가  이야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글이 안 써지는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도 주변을 맴도는 초파리처럼 주제 주위를 어설프게 앵앵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린 숫자만큼 백 스페이스를 눌러 댄다. 


하지만 그림자가 있는 곳에 빛도 있는 법. 글이 유달리 안 써지는 경우가 있으면, 반대로 치타가 내리막길을 만난 듯 쉽게 써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과연 내 안의 치타가 언제 내리막 길에 닿느냐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그렇게 터득한 요령을 달달한 곶감 빼먹듯 요긴하게 이용해야 한다. 


관찰 결과 깨달은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 가장 잘 써진다.'


예외가 없다. 기억 속의 어느 장면이든, 실제로 있었던 일들은, 새 치약을 짜듯이 쭉쭉 잘 나온다. 상황만 묘사하면서도 원고지를 새카맣게 채워간다. 글을 쓰는 일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작문 중에 흐름이 막혔다면, 백 스페이스로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다면, 직접 경험한 일을 생각해보자. 괜찮은 기억을 찾아냈다면 아주 좋은 출발점에 선 것이다. 


그리고 시작이 반이란 말은 이 경우에 백 번 옳다. 

셋째, 글을 쓰지 않을 때가 글을 쓸 때 만큼 중요하다. 


개리 프로보스트는 <전략적 글쓰기>에서 '글을 쓰고 있지 않을 때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 언급했다. '이성을 유혹하지 않으면서 유혹하는 법'처럼 요긴한 방법은 아니지만(그런 책이 있다면 분명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리라) 한 번쯤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는 내용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바로 '생각하는 것.' 


우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책을 읽을 수는 있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글을 쓸 수는 없다. 우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공부를 시작할 수는 있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글을 쓸 수는 없다. 우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인터넷을 뒤적일 수는 있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글을 쓸 수는 없다. 


요컨대 글이란, "이제 우리 서로  사랑하자"라고 약속한다 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처럼, "자아 이제 글을  쓰자"라고 결심한다 해서 당장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글은,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무슨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는, 절대로 쓸 수 없다. 아니, 꾸역꾸역 쓴다 해도 초등학생이 실습으로 해 온 바느질처럼 삐뚤빼뚤 엉망인 무언가가 쓰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분명한 메시지가 없으면 글이 이어지기 힘들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야 한다. "자아 , 이제부터 글을  쓰자"는 식의 접근으로는 대책 없이 가출한 아이처럼 낭패를 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요령은 '글을 쓰기 전에 쓸 내용을 생각하는 것'이다. 대략적인 개요와 커다란 흐름은 잡은 뒤에 백지 앞에 앉아야 한다. 출발역과 경유지, 도착역만 클릭하면 최단 거리를 알려주는 지하철 노선도 프로그램처럼, 글의 시작과 방향과 끝만 알고 있어도 우리는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여행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시작과 방향과 끝'을 언제 생각하느냐. 바로 글을 쓰지 않을 때다. 키보드를 두드리기 이전의 모든 시간들이다. 그리고 나의 경험 상, 오히려 이런 생각은 키보드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훨씬 잘 된다. 걸어 다닐 때, 화장실에 갈 때, 프린트 물을 복사할 때, 커피와 프림과 설탕을 1:2:3으로 넣은 다방 커피를 조제할 때. 그 모든 시간이 '생각하기 좋은 때'다. 


화장실에 앉아 두루마리 휴지를 뜯으며, 혹은 커피 알갱이가 잘 녹도록 티스푼을 시계 방향으로 저으며 '무슨 글을 쓸지'를 생각해보자. 개략적인 청사진이 나올 때 까지 글을 시작하지 말고, 써야 할 글을 생각하자. 이 상태에서 무엇이 결정되느냐가 그 글의 질을 결정한다. 포커에서 제일 중요한 선택은 포커 테이블에 앉기 전에  이루어진다. 바로 '어느 테이블에 앉을까' 하는 선택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지 않을 때가 글을 쓸 때 만큼 중요하다. 

이상 1년 동안 글을 써오며 깨달은 사실들을  두서없이 (내가 좋아하는) 세 가지 들어보았다. 써 놓고 보니 '영락없는 아저씨의 글쓰기 편력'에 버금갈 정도로 재미없다. 괜히 5000자나 썼다는 생각도 조금은 든다.  


하지만 계속 글을 쓰다 보면 언젠가 다시 한 번의 만우절이 올 것이다. 그 때도 대학 캠퍼스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출몰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꾸준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한
나의 글은 조금씩 개선될 것이라는 점이다. 


'분명한 사실'이 아니라 '긍정적 기대'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만우절을 맞은 1년 후의 오늘, 바로 이 글을 꺼내 보면서 '1년 사이에 새로 깨달은 세 가지'에 대해 다시 끄적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 싶다. 


그때는 '영락없는 아저씨의 글쓰기 편력' 따위보다는 재미있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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