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재우 Aug 11. 2015

#63 우산을 처음 쓴 사람을 아십니까

덧붙여 까르보나라가 왜 까르보나라인지도...

"까르보나라가 왜 까르보나라인 줄 알아?"

플레인 요플레를 푹푹 떠먹던 아우가 물었다.

하얀 요플레를 보니 문득 생각이 났나 보다. 


"알지.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무얼  이야기하시려고?"

샛노란 호박 고구마를 숟가락으로 자르며 대답했다.

까르보나라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것도 모를까. 


아우는 단추만큼 동그란 눈으로 놀랐다. 
"제길. 언제 그런 건 다 알았대." 


나는 고구마 수저를 입에 밀어 넣었다. 
"그럼 아우는 '우산을 처음 쓴 사람'이 누군지 알아?" 


"우산을 처음 쓴 사람도 있어? 옛날부터 계속 써 온 거 아녀?"

그렇다. 우산이 있는 한, 우산을 처음 쓴 사람도 있으며, 우산을 처음 썼다고 알려진 사람도 있다. 


오늘은 우산 이야기다. 

영국인 조나스 한스웨이 Jonas Hansway. 여행가이자 병원 경영자로서 박애주의를 실현했던 그는 런던에서 최초로 우산을 '들고 다닌' 남자였다. 그 당시 남자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았다. 비를 피하려 우산을 쓰는 것이 '비겁해  보여서'라고. '비겁한' 한스웨이는 우산을 쓰는 내내 "제대로 마차를 타고 다니던가. 아니면 그냥 비를 맞으란 말이야!" 같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런던이 우중충한 날씨와 칙칙한 빗방울로 유명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는 꽤 자주 곤란을 당했을 것이 분명하다. 피하지 않고 내리는 비를 추적추적 맞는 사람들도 이상하고, 내리는 비를 피한다고 비겁하다 욕하는 사람들도 이상하다. '젠틀맨의 정신'이라도 지나치다 보면 확실히 이상 해지는 측면이 있나 보다. 1750년 무렵이다. 


아무튼 한스웨이는 사람들의 경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우산을 들고 다녔다. 그리고 그의 고집이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여지는 데는 무려 30년이 걸렸다. 한 우산 제작자가 쇠로 된 뼈대가 달린,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오늘날과 같은 우산을 만들었는데, 우산을 접어서 끈으로 묶어 놓으니 칼과 비슷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음, 칼처럼 생겼으니 그럭저럭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하나 둘 씩 우산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즉, 유용성이나 합리성 때문에 우산이 보편화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산의 유용함을 반평생 주장한 한스웨이의 입장에서는 '선구자'로 당당히 인정받지도 못하고, 좀 억울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신 역사에 이름을 확실히 남겼으니 어느 정도 보상이 되려나(구글에 Jonas Hansway를 치면 umbrella가 같이 뜬다).

이 우산 이야기에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은 '역시 사람이란 익숙한 것을 받아들이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세상에 새로운 것을 내놓을 때 사람들 사이에 쉽게 스며들려면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을 적절히 어필해야 한다. '유용성'과 '합리성'은 흠잡을 데 없는 무기이긴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뭐랄까. 합리성과 유용성은 번쩍이는 강철처럼 단단하기만 한 느낌이다. 자칫하면 부딪혀 튕겨나갈 지도 모른다. 


중국의 전통 민중 종교는 원래 도교다.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가 중국에 처음 들어갔을 때, 불교의 핵심 사상인 Sunya를 '무無'라고 번역했다. 중국인들에게 빨리 다가가기 위해 도교 용어인 '무'를 빌린 것이다. 훗날 불교의 입지가 탄탄해진 다음에 Sunya는 본래의 의미를 살려 '공空'으로 바뀌었다. 


천주교도 마찬가지다. 마테오 리치 신부는 <천주실의>에서 '천주는  상제다'라고 아예 못을 박았다. 유교 문화권의 '(옥황) 상제'를 들어 '천주교의 천주가 곧 유가에서 그동안 섬겨 온 상제를  말한다'라는 접근은 매우 효과적인 포교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혁신과 도전은 가슴 뛰는 말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변화의 물결과 그 물결을 막고자 안간힘을 썼던 진영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정치, 종교, 사회, 경제, 프레고의 스파게티 소스(http://blog.naver.com/stillalive31/150189376764)에 이르기까지 그 끈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꼭 변화가 옳고, 변화하지 않는 편이 그르다는 말이 아니다. 익숙한 것을 좋아함이 사람의 본성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진정 새로운 것을 소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실 그것이 얼마나 '새롭지 않은 것인지'를 설명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아주 새로운 것이 있다면, 하나도 새롭지 않은 포장지로 잘 감싼 후에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야 되는 것 같다. 우리가 택한 것이 새로운 물건이든, 새로운 생각이든, 새로운 음식이든, 새로운 진로든 간에 말이다. 


앞으로 30년 동안 비난을 받을 생각이 없다면. 

그건 그렇고, '까르보나라'라는 말은 Carbon(석탄)에서 유래되었다. 석탄을 캐는 광부들이 주로 해 먹던 요리라는 설과, 크림 소스 위에 듬뿍 친 후추가 석탄가루와 같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토마토 같은 신선한 야채를 가지고 깊은 광에 들어갈 수 없어서 부득이하게 크림소스에 파스타 면을 쓱쓱 버무릴  수밖에 없었다는 스토리는 군침이 돌 만큼 매력적이긴 하지만, 두 번째 설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광화문 뽀모도르에서 나오는 냉면 대접 만한, 한 그릇 먹으면 위가 두꺼비 배처럼 빵빵해지는 까르보나라가 먹고 싶다. UFO 비행접시에 꽂은 안테나도 아니고, 포크로 두 번 감으면 깨끗이 사라지는 극소량의 까르보나라는 혐오한다. 그건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다. 그렇게 영업하니까 블랙스미스가 망하지. 


역시,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작가의 이전글 #62 하루키도, 파바로티도 그랬을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