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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11. 2015

#62 하루키도, 파바로티도 그랬을게다

안고수비(眼高手卑), 눈은 높으나 손은 비루하다

"성악가들 노래하는 것도 자주 듣나? 파바로티 같은 거?"


나는 알은 체를 했다. 클래식에 관한 한 나는 거의 문외한이다. 내가 성악가 이야기에 뛰어드는 것은 생선이라고는 참치 통조림 밖에 모르는 사람이 노량진 수산시장의 생선 경매에 입찰하는 꼴이다. 기껏해야 들어본 사람이 조수미, 폴 포츠, 도밍고. 


성악을 공부하는 친구가 답했다. 
"많이  들을수록 좋지. 좌우지간 많이 듣고, 좌우지간 많이 보고, 좌우지간 많이 외워야지." 


노래도 똑같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구양수의 말은 노래에도 똑같이 들어맞는다. 


친구는 맥주 잔을 내려 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파바로티는 좀 달라. 노래하는 사람이 가장 따라하고 싶은 동영상도 파바로티지만, 가장 경계해야 할 동영상도 파바로티라고 해." 


파바로티를 경계해야 한다고? 왜? 
친구의 설명은 이랬다. 

일반인들도 파바로티의 동영상을 보면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러니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받는 감명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게다가 알면 보인다고 했다. 음악인들은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어떻게 호흡을 하고, 어떻게 힘을 분산하며, 어떻게 몸을 이완시키는지. 여러 가지를 보고, 보는 것마다 경탄한다. 재미있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하지만 듣는 일과는 달리 연습은 고달픈 과정이다. 직접 소리를 내고, 다듬어 가는 시간은 실제로 돌을 쪼개는 것처럼 노역이다. 그러다 보니 자꾸 연습실보다 이어폰이 끌린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파바로티의 동영상에 취하고만 싶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환희로 가득 찬 감동의 세계에 머무르려고 한다. 그런데 파바로티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정작 연습할 시간은 아주 조금 밖에 남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 조금 남은 시간마저 연습실에 오면 어떻게 되느냐. 이제부터 마주해야 하는 것은 바위에서 대충 막 쪼갠 듯 엉망진창인 자신의 소리다. 파바로티와는 너무도 다르다. 의욕이 떨어진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하나 둘 씩 꿈을 꺾는다. 


이것을 일러 '좌절'이라 부른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하루키는 언젠가 말하길 "뛰어난 단편은 술술 쉽게 읽히고, 다 읽고 난 후에 가슴에 무엇인가를  남긴다"라고 했다. 또 어디선가 말하길 "스파게티를 삶는 동안에도 손에 들고 싶은 소설이 좋은  소설이다"라고도 했다. 스파게티를 삶는데 10분이 걸린다. 그 10분의 시간마저도 읽고 싶은 소설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좋다고 여기는 것을 하고 싶게 마련이다. 아마 '술술 읽히는 스파게티 소설'이 하루키가 쓰고 싶은 소설일 것이다. 그래서 일게다. 하루키 책은 가느다란 잔치국수 가락을 목에 넘기듯 훌훌훌 읽힌다. 


'좌우지간 많이 읽는 것' 역시 글쓰기의 비법인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너무 재미있게 읽혀서 자꾸 '많이 읽기만' 한다는 점이다. 


밤 늦게 집에 들어오면 책상에 앉는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몸이니 새끼 원숭이처럼 말랑말랑하다. 속세에서 혹사당한 대뇌피질도 방전된 배터리처럼  노골노골하다. 어쨌든 이 말랑-노골한 심신을 이끌고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생활인이란 그런 거다. 


그런데 방전된 새끼 원숭이의 손이 하루키와 노트북 중 무엇을 잡는가 하면, 예외 없이 하루키다. 글쓰기는 힘들다. 백지를 채워나가는 것은 끌과 정으로 바위를 쪼개는 노역...이라고 말하면 과장이지만, 그래도 상당히 괴로운 일이다. 매일 밤, 끌과 정 옆에서 하루키의 글은 세이렌의 노래처럼 하늘거리며 나를 유혹한다. 그러면 오디세우스처럼 의자에 몸을 꽁꽁 묶지도 않았던 나는, 바로 책을 손에 들고 이불 위로 '풍덩' 뛰어들어 하루를 마감한다. 


다행히 아직 '좌절'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안고수비(眼高手卑)라는 이야기가 있다. 


눈은 높은데 손은 비루하다. 이상은 높으나 실천은 조악하다는 뜻이다. 대학 시절에 기자 생활을 하던 선배가 광화문에서 참치회 정식을 사주면서 당부했던 말이다. 


"안고수비를 기억해야 된다.
기상이 시퍼런 20대에는 특히 조심해야 해.
눈만 높고 손이 따라가지 못하면 형편없는 사람이 된다." 


철없던 20대를 지나며 뒤돌아보니 나 역시 안고수비를 경계하라던 그 선배의 조언을 제대로 지킨 것 같지 않다. 부끄럽다. 부끄러운 일이다. 어쨌거나 안고수비의 가르침이 세월이 지나도 유효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듯, 사람의 마음이 저절로 '안고眼高'와 '수비手卑'를 향해가는 까닭일 것이다. 저절로 파바로티를 귀에 꽂고, 시키지 않아도 하루키를 손에 드는 것이 사람이다. 연습실의 문을 닫고, 노트북의 전원을 끄는 것이 역시 사람이듯이. 


좌우지간 많이 읽고, 좌우지간 많이 써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읽는 것보다는 더 많이 써야 할 일이다.
비록 나의 손이 바위에서 막 쪼갠 듯 비루할지라도 말이다. 

파바로티도, 하루키도, 분명 그랬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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