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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13. 2015

#73 완벽함은 독(毒)이다

A현이 끊어져도 나머지 세 개의 현으로 연주를 마치는 것이 인생이다.

나는 이따금 제목만 보고 책을 사는 경우가 있다. 


쇼윈도의 마네킹만 보고 옷을 사는 사람도 있고, 가게 간판만 보고 먹으러 들어가는 사람도 있으니 제목만 보고 책을 산다고 해서 특이한 일은 아니다. 대개 책 값은 옷이나 음식보다 싼 편이다. 게다가 영 마음에 안 들면 환불을 하거나 중고서점에 팔아서 실수의 일부는 없었던 일로 되돌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제목만 보고 책을 사더라도 심하게 무모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충동 구매 대상 중에는 삐가번쩍한 명품 백도 있고, 특가 판매하는 최신 스마트 텔레비전도 있고, 정성 어린 손길로 직접 담근 간장게장/ 돌게장 세트도 있는데, 책은 그나마 양호한 편 아닐까. 물론 나중에 내 가계부를 쓰실 분도 이런 생각에 동의해주면 좋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도 충동 구매로 손에 쥔 책이다. 


"ART & FEAR"라는 원제가 마음에 콱 박혔다. 직접 서점에서 본 것도 아니고 웹서핑을 하다 신용카드 일련번호 16자리를 눌렀으니, 끌려도 대단히 끌린 셈이다. 마치 일요일의 명동 길거리 한 복판에서 우연히 스친 아가씨에게 "내 스타일이야!" 해서 무작정 말을 건네고 본 격이랄까. 


책을 받아 놓은 지는 며칠이 되었는데, 어제부터 겨우 첫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손에 쥐면 그날 저녁부터 당장 읽게 될 것만 같던 책들도 막상 수령하고 나면 책상 위에 그저 휙 던지게 된다. 이상하게 그렇다. 


물론 내가 '잡아놓은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식의 나쁜 남자라는 말은 아니다. 

오늘 아침은 월례조회였다. 똑같은 한 달 주기인데 월급날은 더디게 오고 월례조회는 자주 온다. 아인슈타인에게 일반 상대성 이론의 설명으로 '데이트 - 뜨거운 난로' 만큼 괜찮은 예가 아니냐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어쨌거나 월례조회 때문에 새벽 여섯 시 반의 지하철을 탔다. 덜컹덜컹. 텅 빈 지하철이다. 자리도 꽤 많다.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잡아 놓은 물고기를, 아니, 아니지 <예술가여 잡아 놓은 물고기가 두려운가>를, 아니, 자꾸 왜 물고기가 생각나.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를 읽기 시작했다.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이제부터는 진지한 내용이다. 물고기는 그만) 


"훌륭한 작품을 완벽한 작품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예술은 사람이 하는 것이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에도 오점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앤설 애덤스(유명한 사진가)는 장면의 모든 요소들이 완벽해질 때 까지 기다렸다면 아마 한 장의 사진도 찍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완벽은 선의 적이다'라는 격언을 자주 사용했다." 


옳거니. 그렇다. 

우리는 자주 훌륭한 작품을 완벽한 작품과 동일한 것으로 착각한다. 

우리가 예술가가 아닐지라도 그렇다. 


우리는 종종 훌륭한 제안서를 완벽한 제안서와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훌륭한 이벤트를 완벽한 이벤트와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훌륭한 인연을 완벽한 인연과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보내려던 제안서를 서랍에 넣어 버리고, 하려 했던 이벤트를 '에라 모르겠다' 하고 넘겨 버리고, 건넬까 말까 고민했던 연락처를 하품처럼 꿀꺽 삼켜버린다. 

훌륭한 작품은 positive를 향한 길 위를 걸어갈 때 닿을 수 있다. 


'형편없는 작품'은 누구라도 내놓을 수 있다. '형편없는 작품'을 등에 지고 positive를 향해 걸으면 '그저 그런 작품'이 될 수 있다. '그저 그런 작품'을 고치고 다듬으면 '보통의 작품'은 될 수 있고, '보통의 작품'을 매만지고 광을 내면 '제법 괜찮은 작품'으로 변할 수 있다. '제법 괜찮은 작품'을 끌어안고 포기하지 않으면 '훌륭한 작품'이 되기도 한다. 운이 따라 준다면 말이다. 


이 모든 길은 "나는 재능이 없어"와 "때려 쳐라 쓰레기"로 요약되는 비판의 돌팔매질을 굳은 인내로 견딘 자에게만 진입을 허락한다. 


반면에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negative의 도구가 필요하다. 


완벽하려면 흠집과 오점이 없어야 한다. '잘못된 부분'과 '없어도 그만인 부분'과 '다른 것으로 바꾸어야 할 부분'을 보석 세공사가 현미경을 들여다 보듯 찾을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겨울왕국의 얼음성처럼 차가운 끌로 쪼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저 유명한 생떽쥐베리도 말하길 "완벽함이란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상태"라고 했다. 따라서 완벽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실수와 실패라는 오점을 꺼린다는 말과 맥이 닿는다. 그런데 불행히도 실수와 실패는 시도와 도전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그림자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해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더군다나 스타트 라인에 서서 첫 걸음을 떼려는 사람에게,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 내겠다는 결의는 그 용기와 의지는 가상하나 실제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유해하다. negative의 현미경을 들이대는 사람에게는 시도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먼저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이래서 어렵고, 저런 아이디어는 저래서 불가능하다.
요런 식으로 하면 그러한 단점이 도출될 것이다.' 


이런 생각은 결국 두려움으로 기능한다. 그에게는 모든 땅이 크레바스로 보인다. 어디를 딛어도 위험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끝내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다. 그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한 채 제 자리에 선 채 얼어 죽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시도의 불꽃들이, 활활 타오르지 못한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우리의 이름이 적힌 시나리오의 맨 마지막 장을 이런 비극적인 결말로 장식하지 않도록, 우리는 '완벽한 작품'에서 고개를 돌려 '훌륭한 작품'을 바라보아야 한다. 다소 결점이 있는 훌륭한 작품은 누구든 만들 수 있다. 쉴 새 없이 형편없는 작품을 만들고, 끊임없이 형편없는 작품을 다듬으면 된다. 그저 노역마의 땀과 황소의 끈기가 필요할 뿐이다. 


인간은 원래 불완전한 존재라고들 말한다.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것을 만들 수는 없다.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것을 만드는 일, 우리가 할 역할은 거기까지 아닐까. 

결점이 없는 작품은 없다. 


훌륭함으로 무한한 찬사를 받아온 위대한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는 심리 묘사가 약하다. 크툴루 신화를 상상해 낸 러브크래프트는 대화체가 형편없다고 알려져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인물의 행동이 흐릿하고, 난해하다고 평가받는 몇몇 작품은 상당히 지루하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여덟 번이나 고쳐 썼는데, 교정쇄가 나오는 순간에도 작품의 실수를 고치고 있었다. 윌리엄 케네디는 <Legs>를 일곱 번 고쳐 쓴 후에도 만족스럽지 않아 다시 수정에 돌입해야 했다. 


전설적인 많은 작가들은, 역사에 그들의 이름을 남기는 틈틈이 작품 안에 실수와 결점 역시 남겨 놓았다. 본질적으로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걸작(傑作)이나 대작(大作) 보다 습작(習作)에 충실하십시오. 논문을 쓰지 못하는 학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걸작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들은 다른 학자들의 논문들을 시시하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찮게 평가한 논문들과 비슷한 수준의 논문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논문을 쓰는 데 엄청난 압박을 느낍니다. 

걸작에 대한 소망은 학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걸작은 쉽게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걸작을 지향한 논문이라고 해서 걸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논문을 쓸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그 논문들이 쌓여지면서 걸작과 대작이 가능해질 뿐입니다."  

-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 학자들을 위하여" 이화여대 오욱환 교수 


하여 우리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완벽한 것을 꿈꾸는 대신 훌륭한 것을 목표해야 한다. 질이 아니라 양에, 성공이 아니라 성취에 우리가 가진 기쁨의 나침반을 맞추어야 한다. 바이올리니스트 올레 불이 파리에서 연주하던 중에 갑자기 바이올린 줄이 끊어졌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나머지 세 현으로 연주를 마쳤다. 


이에 해리 에머슨 포스딕은 "A현이 끊어져도 나머지 세 개의 현으로 연주를 마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했다.


완전한 게임은 없다. 모든 준비를 완벽히 갖추고 경기장에 들어가는 스포츠 맨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기술만으로 어떻게든 볼만한 경기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스포츠 맨이 할 일이다. 


우리가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스포츠 경기를 응원하는 것은 누가 더 적게 실수했느냐를 보기 위함이 아니다. 멋진 플레이를 펼치는 것, 더 많은 득점을 하는 것, 실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악착같이 달리는 것. 바로 그런 것들이 훌륭한 경기를 만드는 요소이며, 우리는 그것을 보기 위해 스포츠 경기를 찾는다. 


우리가 사는 인생도 마찬가지다. 

https://youtu.be/K9V1VpNxw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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