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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13. 2015

#74 푸들의 앞발과 나의 포트리스 2

습관의 악순환은 내리막길과 같아 저절로 슬슬슬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항상 푸들이 뛰어나온다. 


매일 보는 사람이고, 아침에 헤어진 얼굴인데 뭐가 그리 반가운지 매번 예외 없이 껑충껑충이다. 닭다리 같은 튼튼한 뒷발로 점프해서 내 허리 께를 툭 치고는 거실 끝에서 방 끝까지 온 집안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두다다다 뛰다가 숨이 꼴깍꼴깍 차서 헥헥거려야 전력질주를 멈춘다. 푸들은 많이들 그렇단다. 늙으면 관절염 온다고 해서 "그려 그려 그만 뛰고 쉬어" 하고 한사코 말려도 그치지를 않는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똑같이 껑충껑충에 두다다다인데 슬럼프에 빠진 타이거 우즈처럼 어딘가 자세가 약간 달랐다. 뛰는 리듬이 바뀌었다고 할까. 마디마다 엇박자가 있는 악보 같았다. 


"푸들 왜 그래?" 하고 물어보니 까만 눈 두 개를 구슬처럼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오늘은 양말 안  벗어?'라는 표정이다. 평소 같으면 껑충껑충-두다다다를 마치고 내가 벗는 양말을 문 채 난리를 칠 차례다. 강아지들은 이상하게 꼬랑내를 좋아한다. 

벗은 양말로 낚싯대를 드리우듯 슬슬 유혹하면서 푸들이 다니는 모습을 가만 보노라니, 글쎄 이 녀석이 다리를 절고 있었다. 바퀴살 한 두개가 휜 자전거처럼 걸을  때마다 조금씩 움찔거렸다. "푸들 다리 저는데? 무슨 일  있었어?"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말하길 푸들이 하루 종일 제 앞발만 핥고 있었다 했다. 


오른 발이 부어 있었다. 엄지 발가락 부근이다. 상처가 낫는지, 염증이 생겼는지 좀 불편했나 보다. 제 녀석도 앞발이 이상하니까 종일 날름날름 핥아댄 것이다. 나도 어릴 적에 상처가 나거나 모기한테 물리면 침을 발랐다. 나쁜 균이 있다는 말도 있는데, 아무튼 푸들의 행동을 보니 상처에 침부터 바르는 건 동물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과유불급. 


사람은 곧바로 연고나 옥도정기를 바르지만, 푸들은 말 못하는 짐승이다. '어디 어디 아프다'는 말만 할 수 있어도 얼마나 좋으랴. 컨디션이 이상하니 이불 구석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하루 종일 침만 바른 푸들이다. 리스테린도 한 번 안 하고 사는 혓바닥으로 내내 문댔으니 상처가 아물 리가 없다. 덧났을 것이 뻔했다. 


아프니까 핥고, 핥으니까 더 아프고. 미련하기 짝이 없다. 


나는 벼락처럼 소리를 쳤다. 


"아이고, 이 녀석. 어쩌자고 하루 종일 핥아 댔어. 응?" 

자꾸만 뒤로 빼는 앞발을 악수하듯 꼭 잡고 덧난 곳에 연고를 발랐다. 강아지 연고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사람 상처에 바르는 후시딘이다. 예전에 등 언저리에 염증이 생겼을 때도 후시딘을 발랐더니 금세 나았다. 입술 주변의 상처에 후시딘을 바르다 알게 되었는데, 후시딘은 지독하게 맛이 쓰다. 궁금하면 맛을 보시라. 혀 끝에 살짝 닿아도 '으에엑, 퉤퉤퉤' 하고 뱉기 바쁠 테니. 그래서 후시딘을 바르면 강아지가 다시는 핥지 않는다. 하루만 가만 두어도 염증이 쉬 가라앉았다. 


으이구. 멍청한 녀석. 어쩌자고 염증난 데를 자꾸 핥아대나. 핥아서 붓는 걸 보면 알아서 멈춰야 하는 것 아닌가. 동물은 본능이 살아있어서 제 몸에 나쁜 건 예민하게 피한다던데, 푸들 이 녀석은 매일 사람들과 같은 베개를 베고 살다 보니 그런 능력이 다 사라졌나 보다. 안 좋은 걸 알면 그만둬야지. 악순환되는 것을 뻔히 보면서 가렵다고 핥아 대면 어떻게 하나. 바다에서 표류하는 조난자가 갈증을 참지 못하고 바닷물을 마시고, 바닷물을 마시니 더 갈증이 나서, 또 바닷물을 퍼먹는 격 아닌가. 


제 앞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고  우울해하는 푸들을 보며 나는 신경질을 냈다. 

문득 '포트리스' 생각이 났다. 


내가 대학교 2학년, 기숙사에 살 무렵 '포트리스 2'라는 온라인 게임이 대 유행이었다. 여덟 명까지 동시에 접속해서 4:4로 대포를 쏘던 게임이다. 


'컴퓨터 게임은 순전한 시간 낭비지. 암, 그렇고 말고'


라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던 나는 어느덧 포트리스의 '빨콩전'에 빠져있었다. '해골'로 시작한 등급은 어느새 동별, 은별, 금별, 쌍별로 쑥쑥 자라서 소치의 김연아처럼 금메달을 받았어야 할 은메달이 되었다. 


그 시절의 하루는 이랬다.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 입성. 공부를 시작하고 싶지만 눈 앞에 어른어른 포트리스. '딱 두 판만 하고 도서관 가자'고 위이잉 컴퓨터 로딩. 두 판이 세 판 되고 세 판이 네 판 되는 건 시간 문제. 그러다 보면 드는 생각 '아, 진짜 공부하기 싫다.' 룸메이트가 와서 컴퓨터를 끌 때 까지 두세 시간 씩 포트리스를 하고 있노라면 쥐꼬리만큼 있었던 공부 의지는 깨끗하게 싹싹 사라지고, 뻘겋게 충혈된 눈과 컵라면을 부르는 꼬르륵 소리만 남았다. 


악순환이었다. 


공부가 '쪼오끔' 하기 싫어 게임을 '살짝' 하면, 금세 공부는 '더욱' 하기 싫어진다. 공부가 '더욱' 하기 싫어지면, 게임은 '좀 더' 하고 싶어 지고, 게임을 '좀 더' 하게 되면, 공부는 '아주' 하기 싫어진다. 게임을 할수록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니, '살짝' 시작한 게임을 중간에 멈추는 것은 어불성설, 난공불락이었다. 


나도 그랬다.

참지 못하고 하루 종일 방구석에서 앞발을 핥아 댄 푸들처럼. 

알코올 중독자들도 처음의 시작은 한 잔이라 했다. 


알코올이 요망한 까닭은, 취한 순간 사람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면 날아갈 것 같다. 눈 앞의 어려움 따위 대나무를 자르는 기세로 쪼갤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까짓 것들, 내 맘만 먹으면' 하고 주먹을 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알코올은 제 몫을 가져간다. 격려의 대가로 지불하는 것은 체력과 집중력이다. 술이 깨면 체력과 집중력은 떨어지고, 실제로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존감은 더 낮아지고, 낮아진 자존감을 견디지 못한 채 다시 알코올을 찾는다. 


전형적인 악순환이다. 


습관이란 나선형의 계단과 같다. 컴컴한 아래를 향해 한도 끝도 없이 내려가는 것은 습관의 악순환이요, 빛나는 하늘을 향해 한 발 두 발 올라가는 것은 습관의 선순환이다. 악순환은 내리막길이라 힘을 주지 않아도 슬슬슬 내려가고, 선순환은 오르막길과 같아 신경 쓰지 않으면 금세 멈추어 선다. 

어떻게 하면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를 콱 밟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끙차' 하고 앞바퀴를 들어 방향을 바꿀 수 있을까. 


첫째, 붓다는 가르치길, 깨어서 보라고 했다. 

관(慣)은 관(觀)으로 잡는다. 해가 뜨면 안개가 걷히듯이, 익숙한 것(慣)은 바라보면(觀) 사라진다. 


둘째, 앤서니 라빈스는 잊지 못할 괴상한 행동으로 브레이크 삼으라 했다. 

이를테면, 습관처럼 거대한 케이크를 야식으로 먹는 순간 스스로의 뺨을 '찰싹' 때리며, "이 정신 나간 돼지 새끼야!" 하고 소리치는 식이다. 


셋째, 찰스 두히그는 습관의 연속된 고리를 끊어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오후 세 시의 나른함 > 머리 식힐 겸 잠깐 카페라도 갈까? > 아메리카노 한 잔 > 커피에 크리스피 도넛 > 저녁 식사 시간의 식욕 부진 > 밤 아홉 시의 출출함 > 참지 못하는 야식 : 큼지막한 케이크"의 고리가 반복된다면  그중 한 군데 고리에 다른 것을 넣으면 된다. 


"나른할 땐 맨손체조 10분!" 


고개를 돌려 푸들을 본다. 발  한쪽만 신발을 신고 힘없이 누워있다. 방바닥에 연고를 묻힐까 봐 신겨놓은 강아지 신발이다. 익숙지 않은 신발이 불편한지 표정이 자못 울상이다. 


그래 푸들. 오늘 밤만 참자. 내일이면 괜찮아져요. 

발이 다 나으면 주말에 우리 개천 가자. 


'개천'이란 말에 눈을 '반짝' 뜬다. 겨우내 추워서 개천을 못 나간 푸들이다. 

가서 맘대로 껑충껑충-두다다다도 하고 씨언하게 쉬야도 하자. 

푸들이 고개를 든다. 

두 눈과 동전 같은 코가 갈색 털 사이로 까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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