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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13. 2015

#85 우리가 삶에서 뒤쳐진 이유

우리는 모두 놀라스코다


# 2013년 10월 LA 다저스가 월드시리즈 제패의 꿈을 한 입 가득 베어 문 채,  승승장구하던 감격의 순간에 작성한 글입니다. 이때 류현진은 참 대단했지요. 메이저리그 입성 첫해인 데도요. 


그런 다저스 스타디움을 바로 어제 방문했더랍니다. 커쇼와 류현진은 못 봤지만 잭 그레인키가 던지는 공을 직접 보았습니다. 굉장하더군요. 그레인키는 2015년 8월 현재 사이영상 1순위지요. 푸이그의 홈런과 싹쓸이 3루타도 명장면이었습니다. 


Let's Go Dodgers!




그럼, 글 시작합니다. 




디비전시리즈에서 LA 다저스가 애틀랜타를 누르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 진출했다는 소식이다. 


현존 최고의 투수 커쇼는 124개의 공을 던진 지 불과 나흘 만에 등판했음에도 불구하고 6이닝 무자책 호투로 '에이스란 무엇인가'를 똑똑히 보여주었고, 후안 유리베는 2개의 번트를 연속으로 실패한 후 '에라 모르겠다.'고 배트를 휘둘러 좌측 펜스에 역전 투런 홈런을 꽂아넣음으로써 '드라마는 이렇게 쓰는 거다'를 제대로 가르쳐 주었다. 


커쇼를 4차전에 기습 등판시킨 매팅리 감독에게는 벌써 '희대의 승부사'니 '타짜'니 하는 수식어가 주렁주렁 달리고 있는 중이며, 1루 베이스에서 뒷걸음질 탭 댄스로 '괴물이 아니라 사람 맞음'을 애써 확인시켜 준 우리의 류현진도 가을 야구를 좀 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놀라스코는 한 번도 마운드를 밟지 못했다. 


디비전시리즈를 시작하기 전에 류현진과 놀라스코 중 누가 3 선발을 맡을 것이냐를 두고 많은 말들이 있었다. 물론 1,2 선발 자리는 관우-장비처럼 최강의 원투펀치 커쇼와 그레인키 차지다. 


요지는 이렇다. 


시즌 중에는 1,2,3,4,5 선발이 사이좋게 차례차례 등판한다. 팀 내 최고 에이스가 1 선발이고 실력이 떨어지는 순으로 2~5 선발을 맡는데 1년 시즌이 140경기에 육박하니, 1 선발이나 4,5 선발이 등판 횟수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포스트 시즌은 다르다. 포스트 시즌은 단기간 승부. 매번 전력을 다해야 한다. 여차하면 4 선발이 들어갈 타이밍에 감독은 무리해서라도 다시 1 선발을 세울 수도 있다. 그런 경우 4 선발은 아예 마운드 구경을 못하게 된다. 그런 경우 '누가 3 선발이 되느냐'는 아예 '나올 수 있느냐 없느냐'와 같은 의미가 된다. 


시즌 중에는 류현진이 3 선발, 놀라스코가 4 선발이었다. 엎치락 뒤치락하며 비슷하게 좋은 결과를 보여준 두 사람이다. 하지만 포스트 시즌은  사이좋은 엎치락 뒤치락을 허용할 만한 여유가 없다.   


다행히 매팅리 감독은 우리가 사랑하는 류현진을 3 선발로 낙점했고, 나는 보너스 봉투를 후후 불어 돈을 세보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저스의 포스트 시즌을 맞았다. 그리고 네 번째 경기에 매팅리 감독은 1 선발 커쇼를 다시 투입했다. 


놀라스코는 어땠을까. 물론 팀의 디비전시리즈 승리를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코스 요리 하나를 놓쳐버린 결혼식 하객처럼 허전하지 않았을까. 나는 놀라스코를 보며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축구 선수 김병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2002년의 한일월드컵은 우리 세대에게 거대한 경험이었다. 


'세상을 바꾸자'는 목소리가 넘실거렸던 '68년의 파리'나 일렉기타 소리가 흘러 넘쳤던 '샌프란시스코 우드스탁'처럼, '2002년 여름의 서울'은 별도 포장된 쿠키마냥 앞 뒤의 시간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엄청난 무엇이었다. 


홍명보의 승부차기, 박지성의 결승골, 안정환의 반지와 김남일의 씨발까지.

짜릿한 시간은 역사적인 추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거기에 골키퍼 김병지는 없었다. 

그때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골키퍼는 둘, 꽁지머리 김병지와 거미손 이운재였다. 


밥을 많이 먹고 싶어서 체중 감량의 부담이 적은 골키퍼를 택했다는 이운재는 안정감 있는 선수였고, 알록달록 염색한 꽁지머리의 김병지는 뛰어난 순발력으로 '와, 저런 것도 막나.'싶은 장면을 보여주곤 했다. 


사실, 스타성은 김병지가 더 있지 않았나 싶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다. 우리나라는 인구 수 만큼 축구해설가가 있는 나라라고 하니,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라고 일일이 설득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아무튼 그 둘은 엎치락 뒤치락하며 경쟁을 벌였다고 들었다. 누가 골문을 지켜도 이상하지 않을 엎치락 뒤치락이었다. 

첫 경기. 폴란드 전이었다.


이운재가 골키퍼로 올라왔다. 이운재는 잘 했고, 우리 선수들 모두 잘 했으며, 길거리의 붉은 악마도 잘 했다.

첫 승리. 꿈에 그리던 월드컵 본선 첫 승리였다.


그리고 두 번째 경기 미국 전. 

골키퍼는 역시 이운재였다.


세 번째 경기, 포르투갈 전도 마찬가지로 이운재. 


두 사람을 번갈아 쓸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듯, 감독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땀 흘리며 같이 훈련한 선수들이다. 승리도 같이 뛰어야 더 기쁘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경기는 경기다. 

승리가 우선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한 경기도 놓칠 수 없고, 작은 실수도 허용할 수 없다.


첫 경기 90분의 경험으로 이운재는 한 걸음 앞섰다. 두 번째 경기, 한 경기라도 경험이 있는 이운재를 쓰는 것이 맞다. 90분의 이운재가 그렇게 180분이 되고, 270분이 되었다.


스페인 전 승부차기에서 홍명보가 아톰 머리를 날리는 동안, 우리가 4강 신화를 쓰는 동안, 결국 모든 경기에 이운재가 골문을 지켰고 김병재는 벤치에 있었다. 그것이 베스트였다. 


단지 한 걸음의 차이였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 아는 동생들과 공덕에서 만났다. 공덕의 족발 골목은 '오랜만이다.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수다를 떨기에 잘 어울리는 장소다. 윤기가 주루룩 굴러 떨어지는 진한 갈색의 앞다리 족발에 새우젓을 찍고, 새로 데워온 술국에 무한 리필되는 순대를 담그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한 친구가 화재보험회사에서 일했다. 싹싹하고 붙임성 좋은 녀석이다. 털털한 덩치와는 다르게 일에서는 꼼꼼한 면도 있어 다들 좋아한다. 인턴으로 들어갔는데, 업무를 잘해서  인정받고 살았단다. 몇 달 단기를 예상하고 시작했지만 무려 아홉 달인가 일 년인가를 있었다고 했다. 보험 일이 맞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일이 일이니 만큼 급여도 나쁘지 않았고, 높은 임원과도 어찌어찌 친해져서 추천서도 써줄 수 있다는 말까지 들었단다. 별 생각 없이 지원한 보험회사 인턴인데 의외로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보험회사 일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 친구는 말했다. 밥 먹듯 하는 야근도 싫고, 영업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술 담배도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다만 일을 너무 잘해서, 보험 회사 쪽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한다고 했다. 


잘 할 것 같기는 한데, 일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다. 원하지 않게 받은 인정이 오히려 고민거리가 되었다. 언젠가 안철수가 이야기했듯이 실패만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성공도 발목을 잡는다. 


"보험업으로 가고 싶지 않으면 다음 인턴 쓸 때는 보험 회사 쓰면 안돼." 


나는 그렇게 이야기해주었다. 


뒷걸음질하다 발을 담근 보험 회사에서 인정을 받았으니, 다음 인턴도 보험 회사를 고르기 쉬운데, 그러면 취업할 때도 인턴 경력을 살리는 길을 모색하다가 결국 보험 회사 가는 것 아니냐. 내 주위에도 처음 부서 배치 때 어쩌다 인사팀 떨어져서 계속 인사 일만 하는 사람도 있다. 


의도하지 않은 한 발자국이지만 나중에 큰 차이를 낳을 수 있지 않으냐. 

말콤 그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캐나다 아이스하키 선수들 중에는 1월 출생자가 가장 많다. 

그 다음은 2월 출생자, 그리고 3월 출생자가 차례로 이어진다.


삼신할머니가 1월에는 지팡이 대신 하키채를 잡는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다. 말콤 그래드웰이 밝힌 비밀은 이렇다. 한 학년을 1월 생부터 12월 생으로 묶는 캐나다의 학제가 원인이었다. 


스무 살, 서른 살의 선수들에게 생일은 그다지 큰 변수가 아니지만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초등학생들에게는 다른 문제다. 캐나다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스 하키를 시킨다. 만 7년을 자란 12월 생과 만 7년 하고도 11개월을 자란 1월 생은 발육 정도가 다르다. 11개월 더 자란 학생이 속도나 힘이나 아무래도 더 나을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을 모아 놓고 아이스하키를 시키면 몇 달이라도 '더 자란' 아이들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 아이들은 '소질이 있다'는 오해를 받고, 코치와 부모님의 관심이 집중된다. 그들에게는 경기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더 주어진다. 특별한 훈련을 받고 특별한 경험을 쌓는다. 


그렇게 하여 1,2,3월 생으로 이어지는 '한 겨울에 태어난' 아이들이
삼신할머니의 신탁을 받아 하키 선수로 길러진다.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는 광고 카피가 있다. 작은 차이가 만드는 것이 꼭 명품은 아닐지라도, 어찌되었든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드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온라인 서점의 도서 판매량은 '베스트셀러 20위'와 '21'위가 큰 차이가 난다고 들었다. 한 화면에 떠서 스크롤 내리기 만으로 볼 수 있는 책은 20위 까지다. 21위를 보려면 next 버튼을 눌러야 한다. 19위-20위의 차이는 미미하지만 20위-21위의 간격은 치명적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호프집에 갈 때마다 군대 이야기를 한다. '글씨 잘 쓰는 사람 없나?'하는 질문에 손을 들었다가, 우연히 행정병으로 빠져서 편안히 군 생활했다는 레퍼토리다. 대학교 신입생의 첫 수업 때 우연히 앉은 좌석배치가 베스트 프렌드를 결정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나만 해도 그렇다. 충북 단양에 신입생 환영회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버스 옆 자리에 앉았던 녀석과 15년째 친구를 먹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놀라스코가 아닐까. 

언젠가 딱 한 발 뒤에 선 것 까닭에 우리는 지금 벤치 신세를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살면서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마 당신 대신 3 선발로 낙점된 친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당신이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별 과제에서 역할을 분담하는 중에 발표를 맡았던 친구가 '발표 담당'으로 붙박이 되다가 프레젠테이션 특기로 대기업에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핵심 인재 육성 시스템이 30명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까닭에 입사 성적이 31등인 당신은 탈락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시 합격도 딱 한 발의 문제일 수도 있다. 


예전에 회계원리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이 해준 이야기다.

 

"회계학을 오래 강의해보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CPA가 되느냐 아니냐는 사실 회계원리 수업에서 갈린다. 어느 학교나 회계원리는 경영대 1학년 과목이다. 1학년 때 뭘 알겠나. 장학금이라도 타려고 열심히 하는 친구도 있고, 군대 가기 전까지 실컷 노는 친구도 있다. 


회계원리가 어려운 과목은 아니지만, 대충 리포트 끄적거려서 학점 받을 수 있는 과목은 분명 아니다. 그래서 꼬박꼬박 수업을 들은 사람은 어렵지 않게 A+를 받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C나 D가 된다. C나 D를 받은 친구들은 다시는 회계를 쳐다보지도 않더라. 


반면 A+는 다르다. '내가 회계에 소질이 있나?'하는 착각에 빠지는 거다. 그래서 중급 회계를 듣고, 고급 회계를 듣다가, CPA 시험을 본다. " 

겨우 한 걸음 앞선 사람이 takes all 하고, 나머지는 놀라스코가 된다. 세상의 이치가 완전히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강은 그런게다. 아이러니이자 요지경이다. 


그렇다면 이미 놀라스코가 되어버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낡은 벤치에 앉아 손가락으로 페인트칠이나 벗겨내면서 3 선발을 부러워해야 할까.

우리 부모님은 왜 나를 12월에 낳았는지 원망해야 할까.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하는 자는 어리석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지 않는 자는 게으르다.

그러므로 과거를 바꾸려는 자는 어리석고, 미래를 바꾸지 않는 자는 게으르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부지런히 '한 걸음'을 내밀어야 한다. 


비록 아무리 작은 한 걸음이라도, 그 한 걸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작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유 게시판에라도 글을 쓰고, 대중 강연을 꿈꾸는 동창회 모임에서라도 마이크를 잡고, 셰프를 희망하는 사람은 최저시급을 받더라도 음식점에서 일자리를 얻어야 한다. 자원봉사라도 좋고 재능기부라도 좋다. 


우리가 한 걸음이 뒤쳐져 놀라스코가 되었다면, 지금 한 걸음을 내딛음으로써 나중에 마운드에 설지도 모른다.


우리가 남들보다 뒤쳐진 이유. 

그것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희망이 된다. 


다저스의 챔피언십시리즈 상대가 세인트루이스로 확정되었다.

부디 멋진 경기를 하기를. 

그리고 우리의 놀라스코도 끝내주는 공을 던질 수 있기를.



# 결국 LA 다저스는 세인트루이스에게 1:3으로 패해서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지구 최강의 에이스' 커쇼가 악몽 같은 투구로 무너졌다. 거 참...


류현진 선수가 부디 어깨 수술에서 무사히 재활에 성공하기를 바란다. 내년 시즌에는 끝내주는 류뚱 체인지업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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