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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13. 2015

#84 이렇게라도 사자와 안면을 틀  수밖에

오랫동안 놓았던 펜을 다시 잡는 어려움에 관하여

퓰리처상을 수상한 애니 딜러드는 그녀의 글쓰기 노하우를 풀어낸 에세이
<창조적 글쓰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책을 쓴다기보다 죽어가는 친구를 지키듯이 책을 지켰다. 면회 시간에 나는 만신창이가 된 책의 몰골에 두려움과 동정을 느끼면서 책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책의 손을 잡고 빨리 낫기를 바랐다.

이런 부드러운 관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뀔 수 있다. 찾아가는 것을 한두 번 거르면 진행 중이던 작품이 글 쓰는 이를 공격해 올 수 있다. 진행 중인 작품은 쉽게  흉포해질 수 있다.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야생의 상태로 되돌아 간다. 그것은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어느 날 간신히 고삐는 채웠지만 이제는 붙잡을 수가 없는 야생마와 같다. 

작품이 자람에 따라 통제하기가 더욱 더 어려워진다. 그것은 힘이 점점 더 세지는 사자다. 그것을 매일 찾아가서 글 쓰는 이가 주인임을 재차 확인시켜줘야만 한다. 만약 하루라도 거르면, 당연히 그 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기가 겁난다. "

 


흉폭해지는 것이 어디 진행 중인  작품뿐이랴. 


공부도 그렇고, 조깅도 그렇다. 며칠 답변하지 않은 메일도 마찬가지고, 서류철 깊숙이 박아둔 미제 프로젝트도 똑같다. 날마다 찾아가 머리를 쓰다듬으면, 애완동물처럼 순하게 턱을 바닥에 대고, 목을 긁을 때마다 '갸르릉' 소리를 내는 것들도, 하루를 거르면 친해질 시간이 필요하고, 이틀을 거르면 기억이 희미해지며, 사흘을 거르면 손을 뻗을 때 멈칫거려진다. 그렇게 사흘이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한 달이 되면, 잠겨있던 문을 열기 위해 호위 무사라도 대동해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만다. 


어릴 적 외할머니 댁에 가면 낡은 창고가 있었다. 


녹슨 톱이니, 주둥이가 닳아빠진 낡은 삽이니, 아폴로 11호가 도착하기 전에 늙어 죽었을 옥토끼가 찧던 나무 절구통이 쌓여있는 창고였다. 철사로 대충 비끄러맨 양철문을 '삐그으덕' 열고 들어가면, 문틈으로 새어 든 빛을 따라 흙먼지가 고요하게 날렸다. 외할머니는 이따금 그 창고에 가서 이런 저런 것을 꺼내오라고 시켰다. 찌그러진 종이 박스에 담긴 고구마나 감자 몇 알이기도 했고, 양은 대야에 할머니가 직접 꾸욱 눌러 만든 두부기도 했다. 


나는 창고문을 열 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양철문을 '삐끄으으덕' 하고 열면, 어두운 창고 안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던 뱀이 '쉬익' 하고 나타나, 내 엄지발가락을 '콱' 하고 물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양철문 앞에 서서, 얇은 철판 안쪽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둠의 뱀을 상상하면서 문고리를 잡고 바들거렸다. 문을 열지 못하고 바들거릴수록, 상상 속의 뱀은 숫자가 늘어났다. 몇 분이 지나도 함흥차사, 소식이 없으면 부엌에서 할머니가 "여태 안 가져 오고  뭐해?"라고 역정을 냈다. 그제야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물론, 나는 창고에 살고 있는 뱀에  물리기는커녕, 뱀 그림자도 본 적이 없었다. 


애니 딜러드가 상상한 사자는 창고 속의 뱀 같았을 것이다. 그녀는 집필 중인 원고지를 커다란 사자가 입을 벌린 듯 두려워했다. 밀림은 우거졌고, 다니던 길은 흔적을 잃었다. 작업을 다시 시작하는 일은 이상하게 힘든 일이다. 며칠 쉰 달리기를 다시 시작하기 귀찮고, 며칠 밀린 공부 진도를 다시 따라잡기 괴롭듯 말이다. 모든 일은 그렇다. 


매일 찾아가서 주인임을 확인시켜주지 않은 모든 일은,
날카로운 어금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블로그의 글을 다시 쓰는 것도 그랬다. 


10월 첫째 주 토요일에 무를 뽑는 글을 마지막으로 어느덧 석 달이 훌쩍 지났다. 일부러 글을 멈춘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멈춘 글을 다시 시작하는 데는 일종의 용기가 필요했다. 이상한 일이다. 마치 오랫동안 연락드리지 않은 초등학교 시절 은사님을 찾아가 "선생님 저  기억하시겠어요"라고 인사드리는 격이랄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게시판을 켜고, 키보드를 도닥도닥 거리다 '등록'하지 않고 종료하는 날이면 나는 애니 딜러드를 생각했다. 


어찌되었던 지난 석 달 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오로라를 보기 위해 알래스카로 날아간 친구 녀석이나, 1억 달러의 잭팟을 터뜨린 추신수나, 오래간만에 펑펑 울면서 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던 <변호인>처럼 드라마틱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일들이 내게도 있었다. 


직장인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연말은 the busiest 모드였다. 검도장 대신 회식 자리에 나가면서 체중계의 바늘은 조금 더 우향우를 했다. 오쿠다 히데오가 좋아져서 이라부 의사를 몇 권 읽었고, One Thing에 꽂혀서 읽어보라 호들갑을 떨고 다녔다. 신춘문예에 서너 개의 등기 도장을 찍었고, 최종심에 오른 신문기사를 감격해서 만지작거렸으며, 200페이지 정도 되는 원고를 탈고했다.


그리고 다시 블로그를 보았다. 


무슨 말이든 쓰고 싶은데 밀림 덩굴이 잔뜩 뒤엉켜 발을 내딛을 수가 없었다. 사람의 몸이란 꽤 간사한 물건이다. 성악 전공자가 가요를 부르면 목이 망가진다 하듯, 수영 선수가 헬스로 근육을 부풀리면 물에서 금방 느려지듯, 다른 스타일의 글을 끄적였다고 블로그의 글이 남의 옷처럼 어색하다. 


애니 딜러드도 이런 심정으로 한 발자국씩 내딛었으리라. 어렵다 어렵다 하면서도 쓰는 사람이 있고, 못 쓰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 했던 것은 김연수의 에세이 어딘가다. 정말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형편없는 초고를 쓰는  것뿐이라 말한 것은 손꼽히는 유쾌하고 다정한 글쓰기 선생 앤 라모트다. 


그래서 나도 이렇게 꾸역꾸역 쓴다. 

엉망이라도 좋다. 어쨌든 써서, 등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라도 사자와 안면을 터 놓는 것이다. 


나야 나.
오랜만이라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그때 같이 놀던 나라구. 

# 석 달 간 에세이를 한 편도 쓰지 못했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끄적인 글입니다. 놓았던 펜을 다시 잡는 일은, 늘 어렵지요. 그 석 달 간 저는 첫 책의 초고를 탈고하였습니다(2013.11~20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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