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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13. 2015

#83  서른다섯에 <겨울 왕국>을 보다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Let it go

대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장학금을  하나받고 있었다. IMF 이후의 배고픈(?) 시절이었다. 장학회에서는 공부하는 학생들이 배가 든든해야 한다고 밥을 잘 먹였다. 정기적으로 불러서 소불고기를 사주었는데, 자작한 국물과 소불고기 두어 점을 숟가락으로 떠서 공깃밥에 얹어 쓱쓱 비벼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노란 불고기 판에 국물이 졸아서 치칙치직 흔적만 남기고 타오를 즈음이면, 학생들은 여기저기 벽에 등을 기대고 배를 두드리곤 했다.  


소불고기가 가득한 해피타임을 하기 전에 특강 시간이 있었다. 장학회에서 미래의 동량지재들에게 신경 써서 마련해준 자리다. 고시 출신 고위 공무원도 있었고, 영화 쪽 일을 하는 분도 있었고, 하여간 많은 분들을 뵈었다. 다양한 분야의 인생 선배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도 하고,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실감도 좀 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귀한 경전도 소 귀에는 바람소리다. 놀 것 많고 할 것 많은 스무 살의 피 끓는 대학생에게 "훌륭한 삶을 살 것"을 당부하는 명사의 특강은 "불고기 먹고 나서 삼겹살 좀 더 시켜도 되나" 같은 현실적인 수다보다 뒤로 밀렸다. 우리는 양질의 좋은 강의 잘 듣고, 불고기 집에서 공깃밥 두 그릇을 해치운 후, 광화문에서 신림동 오는 버스 뒷좌석에 늘어져서 "SES보다 핑클이 훨씬 낫지." "아, 미치겠네. 왜 테란만 만나면 발리지?" 따위의 이야기를 나눴다. 



철없던 시절이었다. 


귀한 특강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눈부시게 빛나야 할 20대가 아쉽다는 인사 한 번 없이 무심하게 나를 지나가 버린 것은, 그 시절 좋은 말씀들을 귀담아 듣지 않아서 인지도 모른다. 


기억에 남는 몇 안 되는 특강 중에, 중앙일보 정진홍 논설위원의 시간이 있었다. 정진홍 위원은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와 <완벽충동> 같은 몇 권의 베스트셀러  저자이기도 하다. 소불고기와 핑클과 스타크래프트로 가득 찬 머리를 비집고 흔적을 남긴 강의를 해 주셨으니, 대단한 분이다. 


정진홍 위원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자기 부모를 끊어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부모의 일방적인 영향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 자신으로 독립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부모와 자신이 동등한 인격체로서 마주 설 수 있다고. 그런 연후에, 부모를 '아빠'와 '엄마'가 아니라 역시 상처가 있고 단점이 있는 한 명의 사람으로 볼 수 있을 때, 자신이 진정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고. 그게 주체성이고, 그게 성장이며, 그제야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안에 내재한 본연의 잠재력을 직시하고, 자신만의 걸음을 걸을 수 있다고. 


꿈과 미래와 열정이 있(다고 여겨지)는 파릇파릇한 대학생을 앉혀놓고  그분은 던진 메시지는 '부모를  끊어내라'였다.  


그때 나는 어지간히 어리석었나 보다. 나무 기둥에 그려 놓은 눈금을 보면, 내가 어린 시절 얼마나 작은 아이였는지 깨달을 수 있듯이, 한 때 이해하지 못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었는지 생각한다. 내가 정진홍 위원의 저 말을 기억하는 것은, 저 말이 의미심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저 말의 의미와 심정을 몰랐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 무슨 뜻인가, 분명 저 똑똑하다는 사람이 눈을 번쩍번쩍 빛내면서 우리들에게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는데,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저 사람이 이상한 건가. 내가 멍청한 건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말이 온전히 내 머리 한 구석에 눌어붙었다. 



지난 주말에 <겨울 왕국>을 보았다. 극장 한 구석 D10 자리에 몸을 파묻었다. 영화관에서 처음 보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손꼽힐만큼 잘 만든 대작이라는 말에 기대를 품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올라프는 웃기고, 안나는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정진홍 위원의 저 말을 문득 생각했다. 


<겨울 왕국>은 인간의 완성을 위해 두 단계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첫 단계는 부모의 제약에서 벗어나, 착한 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떨치고, 자신의 두 다리로 서는 단계(let it go). 그럴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세상의 기대에 매몰되지 않고, 어린 시절에 엿보았던 잠재력(do you want built a snow man?)을 발휘하면서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펼치는 단계(some people are worth melting for).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only an act of true love)이다. 


"첫 단계를 성취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될 수 없고,
두 번째 단계를 성취하지 않으면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13,4년 전. 공깃밥에 비빈 소불고기를 생각하며, 세미나실 맨 뒤쪽 책상에 앉아 딴청을 피우던 내가 이해하지 못해 애쓰던 그 이야기였다.


엘사가 let it go를 부르며 절벽을 뛰어넘는 동영상을  다운받았다. 보고 또 본다. 나는 내 두 다리로 섰을까.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the past is in the past), 나는 이제부터 온전히 내 잠재력을 펼치며 살겠노라고(here I stand, and here I stay)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을까.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let it go로 바꾸려다가, '혹시' 하는 마음에 지인들의 프로필 상태를 보니 무려 네 명이 <겨울 왕국>이다. 대세에 편승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지금 내 프로필 상태는 "한정된 목적은 인생을 간결하게 한다." 

내버려 두자. 한정된 목적에 here I stand, here I stay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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