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재우 Aug 15. 2015

#88  서른여섯의 하루키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조금쯤은 솔직하게 우리의 꿈을 이야기해도 될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중에 <에릭 시걸과 러브스토리>라는 짧은 수필이 있다. 


제목까지 포함해서 겨우 두 페이지 짜리 수필 - 게다가 큼지막한 제목 아래에는 진공 포장된 포테토칩처럼 여백도 자리하고 있다.  -이니 대학 리포트 쓰듯 A4 용지에 작성했으면 한 장 될까 하는 분량이다.


수필은 에릭 시걸의 새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에릭 시걸이란 이름은 잘 모르더라도 <러브 스토리>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새하얀 눈 밭에서 사랑에 빠진 연인이 빙빙 뛰어놀다가 뒤로 포옥 넘어지는 그 유명한 장면이 있는 <러브 스토리> 말이다. 하기사, 생각해보니 나도 <러브 스토리>의 제목만 많이 들었을 뿐,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전히 영화 한 편을 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에서 종종 상영하면 고등어 살점 발라먹듯 여기저기 단편적인 기억만  날뿐이다. 


에릭 시걸은 <러브 스토리>로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 전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니, 고작 '대단하다'고 표현하면 시걸이 언짢아할 지도 모른다 - 대중적 베스트셀러가 종종 그렇듯이 평단으로부터는 그다지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다. 시걸은 '낙담한' 표정으로 말하길 '유감이다 I'm  sorry'라고. '세상에 정의가 존재한다면 이 책은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며 비평가들을 향해 상당한 불만을 표시했다. 

하루키는 - 이 수필은 하루키가  서른여섯에 쓴 글이다. 등단은 했지만 그렇다고 베스트셀러 작가까지는 아닌, 이를테면 뒷다리 두개만 튼튼하게 나온 올챙이 정도의 위치라고나 할까. - 이런 에릭 시걸의 태도를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왠지 이번 비판은 100% 진심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하루키의 다른 수필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실명 비판은 우유를 잔뜩 섞은 커피처럼 위트가 가득해서, 장난인지 비판인지 헷갈리는 것들이 대개였다. 아무래도 쿨한 하루키 스타일이니까 정색한 비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번 글은 오히려 신선하다고 할까, 의외의 모습이다. 


"요컨대, 그는 대학 교수로서 받고 있는 경의를 소설가라고 하는 분야에서도 받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돈과 명예와 경의를 동시에 손에 넣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그 가운데에서 두 가지를 손에 넣었다면 그것으로 이미 만만세가 아니냐고 나 같은 사람은 생각하지만, 에릭 시걸은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항상  존경받는 데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는 경의를 표하지 않는 데 대해서 신경질을 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수필에서 정작 재미있는 부분은 마지막에 나왔다. <러브 스토리>가 갓 출간되었을 때 소동이 엄청났던가 보다. 


에릭 시걸은 <투데이 쇼>에 출연했었는데, 진행자 바바라 월터스는 에릭 시걸을 보자마자 흥분해서 "이 젊은이가 굉장한 소설을 썼다. 지금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서 사보라."고 말했단다. 그 날 자정까지 미국 전역에서 <러브 스토리>가 동이 났다.


하루키는 이 소동을 언급하며 이렇게 마무리한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다. "

이거다. 바로 이런 부분이 오래된 글 사이에서 찾아내는 짜릿한 재미다. 다락방 먼지 구덩이에서 우연히 찾아낸 금가락지 같은 부분이다. 하루키가 이번에 발표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출간 즉시 온, 오프라인 모든 서점에서 1위를 찍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는 지금쯤 <색채가 없는...>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것이다.  이번뿐인가. <1Q84>도 <해변의 카프카>도 하루키 신드롬을 일으키며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서른여섯의 하루키는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서른여섯이라면 나보다 고작 몇 살 위.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면 시원한 맥주에 오징어라도 질겅거리며 '형, 글 좋대. 나도 비법 좀 가르쳐주시구려.'라고 했을 법한 나이다. 그런  서른여섯의 하루키가 에릭 시걸을 부러워한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누가 뭐래도 나는 이런 장면이 재미있다. 감동에 가까운, 무언가 목구멍을 왈칵하게 만드는 그런 재미다. 


과거의 하루키와 현재의 하루키, 나는 그 둘을 모두 안다 - 직접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하루키 책을 몇 권이나 사주었으니 그쯤의 표현은 넘어가 주겠지 - 하지만 과거의 하루키는 현재의 하루키를 알 리가 없다. 과거의 하루키는 '앞으로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하고  열다섯 소녀처럼 소망한다. 그런 소망을 품었었는지 조차도 본인은 잊고 있을 나이, 


현재의 하루키는 꿈꾸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다. 


나는 이런 장면을 좋아한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의  어린아이와 화려한 현재의 사진을 함께 눈 앞에 놓아두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에 감격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마치 2013년의 내가 1992년의 서태지의 데뷔 무대를 보는 느낌이고,

태극마크를 처음 달았던 앳된 박지성을 보는 느낌이며,

뚱뚱한 배를 내밀고 "나 완전히 새 됐어"를 외치던 싸이를 보는 느낌이다.


흑백 사진 속의 그들 역시 그저 꿈꾸고 불안해하고 어떻게든 하루하루 노력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지금의 우리들처럼. 

그래서  서른여섯 살 하루키의 작은 소망은 용기를 준다.


조금쯤은 솔직하게,

나도,

꿈을 이야기해도 괜찮은 것 아닌가 하는 그런 용기를 말이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다, 고. 



작가의 이전글 #87 임창용이 가르쳐 준 성공에 닿는 네 가지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