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재우 Aug 15. 2015

#89 에어컨이 고장 났다고 전반전을 버릴 수야

사무실 말고 어디라도 가고 싶다

에어컨이 안된다. 


회사 전체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애꿎은 에어컨만 원망스러운 눈으로 째려본다. 천정에 달린 에어컨은 빨간 불만 깜빡 깜빡. '지금 아프다고 시위하는 거냐.'고 신경질이라도 부리고 싶다. 등에 땀이 찬다. 고기불판처럼 슬슬 달궈지고 있다.   


총무팀의 과장님에게 물어본다. 과장님이 이리저리 바쁜 걸음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이 이미 사태 해결에 분주한가 보다. 재난발생 비상대책본부 직원처럼 굳은 표정이다. 에어컨이 안된다고 회사의 전 부서에서 전화통을 울려댔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누가 뭐래도 월요일 아침 아닌가. 


월요일 아침은 '자아, 이번 한 주도 힘내서 시작할까.'하는 다짐과 '아아, 월요일 아침이라니.'하는 일종의 절규(물론 내색할 수는 없지만)가 쌀뜨물처럼 뒤섞인 시간이다. 에어컨 고장 신고처럼 불만과 당혹으로 뒤덮인 업무와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오후에나 될 것  같아요,라는 과장님의 답변.

 
문득 슬램덩크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윤대협이 서태웅을 보고 그랬다. 


"전반전은 버린 거냐."
"네 놈을 이기기 위해서다."

친구들에게 카톡을 한다. 

회사에 왔더니 에어컨이 안 켜진다고. 오늘 전반전은 버린 건가 등등. 

쌀뜨물 같은 의식을 퍼올려서 앓는 소리를 한다.


우우웅. 우우웅. 


아이폰이 덥다 못해 소름이 돋는지 부르르 몸을 떤다.

답변이 달리는 소리. 


친구 1) 에어컨. 그것은 28도 이상 올라가지 않으면 가동하지 않는 물건
친구 2) 우리 사무실은 실제로 30도 되어도 안 트는 거 같음
친구 3) 젠장 한수원 XXX들
친구 4) 꺄악 (절망)

지난 유월 초였던 것 같다. 


여름이 저만치서 '내가 누군지 똑똑히 보여주마.'하고 다가올 무렵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어찌하다 보니 주제가 에어컨으로 흘러갔다. 올 여름도 대단히 덥겠어. 맞아 맞아. 그렇게 맞장구치던 중이었을 거다. 대기업이나 정부에서는 국가 시책을 따르느라 에어컨을 제대로 켤 수도 없다 했다. 


일정 규모 이상의 큰 건물들은 실내 온도가 제한선(26도인가 28도인가 그럴 텐데) 아래로 내려간 것은 아닌지 감독하러 돌아 다닌다고도 했다. 어느 공사의 낙하산 사장은 '올해 우리는 정부 정책에 적극 동참하여 에어컨을 켜지 않는다.'고 선언했다는 카더라 통신도 들렸다. 


나처럼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흉흉한 이야기다. 그렇게 되면, 월요일 아침 쌀뜨물에 그나마 함유된 약간의 다짐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 뻔하다. 매일 아침을 '꺄악'하는 절규와 함께 시작할 지도.


에어컨을 틀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시원한 2호선 지하철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일하고 싶은 심정이다. 


팀장님 저 기획서 초안 좀 잡아야 하는데 외선순환으로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얼마나 걸리겠나.
시청역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합정 부근에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적어도 '말이야 막걸리야.'하고 단박에 호통을 들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지하철의 출퇴근 시간을 책 읽는 시간으로 활용하는데, 집중력 면에서는 독서실 못지 않다. 덜컹거리는 리듬 때문에 뇌도 '어디 한 번 흔들어볼까?'하는지 아이디어도 제법 잘 떠오르는 편이다.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를 보면 프로그래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나온다. 그들에게 코드를 짜는 작업을 할 때 일하고 싶은 장소가 어디냐고 물었었다. 가장 많은 대답은 이것이었다. 


'내 사무실만 빼고 어디든지' 


이만하면 에어컨 고장 나서 푹푹 찌는 사무실보다 2호선 지하철이 더 괜찮지 않나?

창문을 모조리 열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조금 괜찮아졌다. 다행히 장마 중이다. 장맛비가 그치고 본격적인 삼복 더위였으면 땅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있던 시골집 누렁이처럼 키보드 위로 늘어졌을 것이다. 


싱가포르가 생각난다.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가 말하길 '세계 최고의 발명품은 에어컨'이라고 했단다. 그 습하고 더운 곳에서 옛날에는 무슨 생산성이 있었겠나 싶다. 두어 시간만 일해도 진이 다 빠져버리지 않았을까.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자 녹아버린 초콜릿처럼 늘어지던 사람들도 각이 잡히고 두뇌도 팽팽 가동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 싱가포르가 잘 살게 된 것도 시원한 실내에서 컴퓨터를 두드리는 금융 서비스 때문 아닌가. 


아무튼, 천정에 달린 에어컨이 고쳐지기를 학수 고대한다. 전반전을 버릴 수는 없다.

나는 윤대협을 이기는 서태웅이 아니라

단지 계약서 초안을 검토해야 하는 직장인이다. 

작가의 이전글 #88 서른여섯의 하루키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