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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15. 2015

#92 늦은 밤, 카페에, 앉아있는, 이유에 관하여

그것은 흔적이다. 불을 붙여보려 애쓴 흔적인 것이다. 

왼쪽 이마에 혹처럼 붙어있는 아이폰의 전원 버튼을 눌러본다. 


11시 39분이다. 자정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카페 안의 손님들은 여전히 왁자하다. 아직까지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이나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손님이나 어금지금 비슷하다. 밀물과 썰물이 적당히 반복하여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는 해수면처럼, 카페 안에도 제법 일정한 숫자의 손님이 머물고 있다. 덕분에 총량으로서 고정된 언어가 공간을 채우고 있는  듯하다. 줄어들지도, 그렇다고 늘어나지도 않는 소음의 크기. 


창가에 ‘바아-’처럼 붙박이로 일자로 늘어진 테이블에 나는 앉아있다. ‘BAR’를  ‘바아-’라고 늘여서 말하면 개화기 지식인이 소개해 놓은 외국 문물처럼 생소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재즈 음악, 노곤한 몸이 오늘 하루쯤은 왠지 ‘바아-‘하고 흐트러진 발음을 허락할 것도 같다. 자정이 가까운 카페는 그런 느슨한 공기가 떠돈다.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본다. 통유리로 된 시원한 창이다.  행인들이 오고 가는 모습이 어항을 헤엄치는 물고기의 표정마냥 무심하다. 슬쩍슬쩍 꼬리를 최소한으로 움직여서 느릿느릿 다니는 금붕어처럼, 책가방을 둘러멘 사람들의 얼굴이 피로를 머금고 있다. 전형적인 신림동 수험생의 자정 무렵의 맨 얼굴.


열한 시 무렵에 이 ‘바아-’에 앉아 39분째 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무언가를 쓰려고 앉았는데, 쓰고 싶은 마음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마라톤의 스타트 라인에서 주저앉아버린 러너의 마음 같다고 할까. 고속도로 한 가운데 퍼져버린 채 ‘될 대로 되라지’하는 심정으로 담배를 꼬나 물고 있는 운전사처럼 나는 노트북 앞에 턱을 괴고 있다. 


김연수는 말하길,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다음부터 매일같이 무엇인가를 쓰기는 썼으며,  아무것도 써지지 않아 고민인 날은, 그 고민에 대해 썼다고 했다. 그가 쓴 것들이 내가 지금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두드리고 있는 글자들과 비슷한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잠깐 자위한다. 


유리잔에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다. 빨대를 물고 한 모금 쭈욱 들이킨다. 저 잔은 16온스는 되겠지. 16온스 아메리카노에는 투 샷이 들어간다. 원샷에 포함된 카페인이 대략 150mg. 식약청의 하루 권장량이 400mg. 열한 시부터 빨아 댄 카페인이 하루 권장량의 칠 할은 차지했을 터인데, 왜 머리 속을 뿌옇게 흐리고 있는 안개는 개지 않는 걸까. 형체가 없는 유령과 맞서 싸우는 중세의 기사처럼 머리 속을 둥둥 떠다니는 회색 입자들을 분주하게 제치며 되묻는다.  


나는 왜, 늦은 밤, 카페에, 앉아있는, 것일까.  

1. 늦은 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누군가 물었었다.  스물서너 살의 대학 졸업반 여자였다. ‘좋을 나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음성이었다. 나는 그녀의 나이를 부러워하고, 그녀는 스님의 보리심을 부러워하며 윤회처럼 질문은 이어졌다. 


요컨대, 이런 말이었다. 

‘이제 졸업을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고 싶다.' 


들으며 가만 생각해보니 그런 고민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었다. 은수저 세트를 입에 물고 태어난 아이가 아니고서야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여건이 안돼서 걱정' 아닌 사람이 한둘인가.  


법륜스님은 웃는 얼굴로 쉽게 답했었다. 


‘그림을 그리세요.’  



성인이 되었으니, 자기 삶은 자기가 꾸려나가는 게 맞는 나이가 되었으니, 돈을 벌고, 일을 하고, 그러는 틈틈이 그림을 그려라. 남들 쉴 때 쉬지 않고, 남들 잘 때 자지 않고, 그렇게 틈틈이 그리면 된다. 하고 싶은 일이라 하지 않았나. 그럼 그려라. 그림을 그려서 돈이 되느냐는 두 번째 문제고. 하고 싶은 일이니, 틈나는 대로 해라. 캔버스에 유화에 그런 형식 따지지 말고. 종이 쪼가리건 연습장 구석이건 계속 그려라. 그러다 보면 운이 좋아 그림으로 풀릴 수도 있겠지.  


얼 스탠리 가드너라는 미국의 추리소설 작가가 있다. 그는 원래 변호사였다. 여가시간을 활용해서 12년간 1백여 편의 단편 소설을 싸구려 잡지에 실었다고 알려져있다. 


그의 작업 방식은 그랬다. 변호사 일을 마치고 11시에 집에 돌아오면 집필을 시작했다. 새벽 3시까지 글을 쓰다가 잠들었다. 변호사보다 작가의 길에서 비전을 보았는지, 트레이닝을 하는데 12년이 소요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드너는 후에 변호사 직을 버리고 전업작가로 전향한다. 페리 메이슨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냈고, 37년간 장편 소설 130권을 찍어냈다.  


그림이 좋다는 그 여자분은 얼마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것일까.  11시부터 새벽 3시까지 싸구려 단편 소설과 씨름을 했던 가드너는 얼마나 글쓰기를 좋아했던 것일까. 알 수 없다. 어쩌면 내가 글을 끄적이는 만큼도 아닐 수도 있고, 반대로 ‘고작 그 정도로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려고 했단 말이냐’며 등 뒤에서 코웃음을 칠 지도 모른다.  


다만, 밤 10시 이전에 잠들어 새벽 다섯 시에는 눈을 떴던 하루키의 일상을 구현하기에는 내일 아침에도 2호선에서 시달려야 하는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신분이 발목을 잡는 것이며, 오후 2시면 퇴근해서 글을 썼다는 카프카의 여유를 갖기에는 우리 사회가 아직 복지국가를 향해 갈 길이 까마득히 먼 것이며, 전업 주부일 때 새벽 3시면 눈을 떠서 펜을 잡았다는 신경숙의 자제력을 따라하기에는 내가 너무 잠이 많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어쨌거나 나는, 늦은 밤. 에 카페에 앉아 있는 수밖에 없다.  

2. 카페에,


어느 장소에서 스스로를  트레이닝할 것이냐는 중요한 문제다. 그것은 ‘효율성’과 관계있는 문제이며, ‘전략’의 언저리에서 언급될만한 사항이고, 본질적으로 ‘이 놈의 인생은 항상 무언가 부족한 상태’라는 풋내기 철학도의 한탄과도 잇닿아 있는 무엇이다. 


말하자면, 용한 지관이 한 눈에 잡아내는 명당자리처럼, 저 깊숙한 어딘가에 잠자고 있는 잠재력이 번쩍 두 눈을 뜰 만한 적절한 장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인 것이다.  


어떤 작가들은 섬세한 더듬이를 정교하게 세운 곤충들처럼 자기에게 꼭 맞는 장소를 찾아내곤 한다. 퓰리처상을 탄 애니 딜러드는 집에서 한 시간은 넉넉히 떨어져 있는 외딴 오두막을 언급한 적이 있다. 통나무로 지어진 컴컴한 오두막에는 밖이 내다 보이는 작은 창문이 있고, 글을 쓰는 탁자와 오래된 난로와 작업을 하다 잠시 누워서 휴식을 취할 때 유용한 낡은 침대가 놓여있다. 딜러드는 날마다 그 작은 오두막에 처박혀서 세상에 대해 쓰고 또 썼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집 앞에 적당한 카페가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해리포터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는 말은 과장이라고 할 지라도, 어쩌면 군데군데 엉성한(엄브릿지 교장의 고양이 집착이 생략되었거나 하는), 그래서 덜 사랑스러운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글쓰기 책 어딘가에서는 글쟁이에게 적합한 작업 장소로 카페를 강력하게 추천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이유는 모른다. 완벽하게 조용한 작업실이나 숨 막히는 도서관보다 어느 정도는 시끌시끌한 카페가 낫다. 지은이의 카페 사랑이 어찌나 각별했던지, 편파 판정하려고 작심한 미스코리아 심사위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도러시아 브랜디가 지은 <작가 수업>이거나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어딘가였을 것이다. ‘아 글쎄 그렇다니까요.’ 하고 깔깔대는 동네 아주머니처럼, 단단한 근거는 없지만 믿음이 가는 말이었다.  


하여 나도 따라해 보는 중이다. 과연 웅성대는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가, 블렌더로 얼음을 가는 바리스타의 소음이, 의자를 끌고 책상을 두드리는 손님들의 부산스러움이 손가락에 엑셀레이터를 달아줄 것인가. 그것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3. 앉아있는,
 

졸리다. 졸음이 나를 잡아먹고 있다. 헨리 카빌이 <맨 오브 스틸>에서 철근 구조물을 들듯, 온 힘을 다해 눈꺼풀을 들고 있다. 안개 속을 헤치는 나그네가 등짐으로 진 솜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워진다. 눈과 눈꺼풀 언저리에서 국지전이 그칠 줄을 모르고 있지만, 성동격서. 본질적인 전투는 다른 곳에서 치열하게 공방 중이다. 엉덩이 부근이다.   


앉아 있는 이 엉덩이만 뗀다면, 눈도 눈꺼풀도, 손가락을 비롯한 내 몸의 다른 구석들도 점령군의 깃발 아래서 안식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딱 한 번만 고개를 숙이면 그 뿐이다. 책가방을 챙기고, 빈 컵을 반납하고, 가게문을 열고 나서면 된다. 불과 15분이다. 15분 후면 편안한 이불 위에 몸을 던질 수 있다.  


발끝은 이미 이불의 감촉을 상상한다. 피곤한 전신을 발끝으로 맞이했던 이불은 치명적으로 포근하다. 늪에 빠진 채 허우적거림을 포기하고 최후를 맞이하는 사슴처럼, 가지런히 펴놓은 솜이불은 내  온몸을 유혹한다. 이불이다. 집에 가면 이불이 있다.  


하지만 고지식한 지휘부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엉덩이다. 묵직하게 살찌운 엉덩이는, 저를 살찌게 만든 이유가 비록 자정의 카페에서 인내력을 발휘하라는 의도는 비록 아니었을지라도 너무나 충실하게 제 몫을 해내고 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엉덩이가 전신에 보내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나는 일어날 생각이 없다. 졸음에 굴복할 생각이 없다. 울돌목에서 130척의 적선과 마주 서서 퇴로를 포기한 충무공의 판옥선처럼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해야 할 일에 집중하라.  


하루키는 언젠가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공무원 출신이고 석유회사의 부사장이었다.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자리를 거쳐 51세에 그가 다다른 자리는 엉뚱하게도 한 단어당 1센트씩 원고료를 주던 싸구려 소설. <빅 슬립>이라는 첫 장편으로 주목을 받은 챈들러는 필립 말로라는 탐정을 창조하며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설이 되었다.


파란만장한 인생, 복잡다단한 사건의 소용돌이를 그려낸 챈들러지만 그의 작품 활동은 질풍노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루키는 자신의 작업 모델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전쟁이 터질 때마다 외국으로 뛰쳐나가고 아프리카의 산에 오르거나 카리브 해에서 청새치를 낚고는 그 일화를 소설 소재로 삼는 방식을 나는 기꺼워하지 않는다. 대신 두 시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꼼짝 말고 있어라. 그러다 보면 뭐가 돼도 될 테니까."


소총을 들고 뛰어다니고 청새치를 몸소 낚았던 작가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그리고 책상 앞 붙박이가 바로 레이먼드 챈들러다.  


챈들러가 앉아있었다. 챈들러를 따라하는 하루키가 앉아있었다. 그러니 내가 어쩌겠는가. 아버지를 따라 낚시터에 앉아있는 아들처럼, 나 역시 앉아있을  수밖에.  

새벽 1시 30분이 지나간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가게를 정리하는 시간이다. 통으로 베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에, 나를 위한 명당 자리를 찾아와, 마법이 일어나길 두 시간 동안 기다렸다.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함은 쓰고자 했던 것에 대해 한 줄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뮤즈가 너울너울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무료함을 달래고자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와르르 부서진 500피스 퍼즐처럼 두서없는 글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시속 120km로 대양을 누비던 참치도 그물에 걸리듯, 아니다. 아마 그것보다는 훨씬 자주, 이를테면 류현진이 홈런을 맞는 것처럼,  아무것도 써지지 않는 날도 있는 것이다.  


대신 쓸 수 없는 날에, 쓸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겠다. 쓰레기를 태운 매캐한 연기처럼 탁하지만, 바스러지는 재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것은 흔적이다. 무언가 불을 붙여보려 했다는 흔적인 것이다. 재는 시간이 흐르면 땅 속으로 스며든다. 언젠가 그 위로 자라나게 될 나무의 비료가 될 것이다. 나무는 알지 못하더라도, 인과에는 예외가 없다. 나무는 재를 먹고 자라날 게다.  


늦은 시간. 카페에. 앉아있는 수고로 일천 몇 백 단어의 재를 남긴다. 발을 다친 채 행군하는 패잔병처럼 느린 걸음이다. 그래도 괜찮다. 쓸 수 없는 날에는 쓸 수 없음에 대해 써야 한다고, 나는 그렇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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