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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16. 2015

#93 행복하고 싶다면 더 바빠져 보세요

안철수 의원이 힐링 코스를 청산한 까닭 

안철수 의원이 전에 텔레비전에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엄청나게 힘든 의대 인턴, 레지던트 생활을 하다가 군대에 군의관으로 가니 그야말로 별천지였단다. 스트레스도 없지, 일과도 편안하지, 실적이 필요한 것도 아니지. 밤 10시면 어서 자라고 불도 꺼주지. 하루 쉬고 하루 놀면서 영혼이 충만한 생활이었다. 


왜 아니 그랬겠나. 나도 지인들로부터 들었다. 군의관 또는 보건소 의사로 군복무를 마친 친구가 있는데 하루 수면 시간이 3시간 될까 말까 한 지옥의 인턴 생활에 비하면 군대는 문자 그대로 힐링 코스라고. 물론 군의관이 상대적으로 몸이 편한 보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반년쯤 그렇게 힐링 생활을 즐기며 방전된 심신을 충전하면서 열락을 느끼고 있던 안철수 의원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군대에 오기 전 병원과 랩에 있을 때는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았는데, 내 한 몸 빠져나와 여기 있으니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인다. 그런데 과연 바뀐 것이 있을까. 지금도 밖에서는 시간을 무채 썰듯 쪼개고 밤을 새하얗게 새워가며 머리가 깨져라 연구를 하고 있을 것 아닌가. 다만 나 혼자 할 일 없는 곳에 들어와 '세상이 다 평화롭다' 하고 착각하는 것 아닌가.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든 안철수 의원은 그날부로 힐링 생활을 청산하고 시간을 쪼개 바쁘게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언제 어떤 곳에 있든 랩에 있을 때와 똑같은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살기로 말이다.



미국 출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며칠 뒤면 3주짜리 장기 출장을 간다고 생각하니 손에 잡히는 일이 없었다. "거기 가면 섭씨 43 도래." 하는 전임자의 언질을 듣고 '그저 컨디션이나 챙기는 게  제일이지'라고 생각했다. 밧줄을 탁 하고 놓은 줄다리기 선수처럼 긴장감을 놓았다. 


때마침 몸 상태도 적잖이 다운되어 두 손을 마주치는 듯 글이니, 책이니, 달리기니 하는 것들이 백미러의 풍경처럼 뒤로 밀려났다. 나는 잘 자고, 잘 먹고, 낑낑거리는 푸들이나 원 없이 산책을 시키면서 '컨디션을 조절'했다. 힐링 코스 같았다.


어제 캐리어에 짐을 챙기고 있었다. 코스트코에서 산 27인치 캐리어였다. 살림살이라도 온전히 들어갈만한 캐리어에,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들여놓는다는 느낌으로 짐을 챙겼다. 옷에 신발에 세면 도구에. 챙길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체게바라는 게릴라전의 한가운데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야전 침대에 누워 괴테를 읽고 있는 체게바라.

문득 '책'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출장 기간 동안 개인 시간이 거의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아이들 10명을 인솔하는데다 틈틈이 청소 등 잔무를 도와야 하고 매일 밤 사진 정리에 SNS 업로드까지 해야 하니, 그냥 딱 논산훈련소 조교 일과구나 싶었다. "운동할 시간이 있을까요?" 하는 나의 질문에 전임자 분은 "아침에 출근 전에 일찍 일어나서 마을 달리면  되지."라고 하셨다. 


불행히도 나는 아침  조깅은커녕 아침 식사도 거르는 굼벵이다. 허허.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과가 빡빡하다는 말을 들으니 더 책을 챙기고 싶었다. 짬을 내어 한 줄이라도 읽고, 한 줄이라도 끄적여야 된다는 의무감 도파민이 제로백을 테스트하는 스포츠카처럼 용솟음 쳤다. 비행기에서 읽고, 청소 마치고 읽고, 화장실에 앉아서도 읽고, 잠들기 전에 엎드려서 읽고... 이상한 욕심이었다. 포켓북 사이즈의, 그러나 두께는 베게만 한 책을 세 권이나 챙겼다. 캐리어의 밑바닥에 보물 상자를 감추듯 꽉꽉 끼워 넣었다.


짬을 내어 책을 읽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출장 준비한다'는 핑계로 하루 열 시간씩 늘어지게 잘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책인데, 눈코 뜰 새 없는 미국 출장 중에는 틈을 내어 읽겠다고 하는 나도 참 이상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카네기 행복론>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행복하고 싶으면, 더 바쁘게 지내라고. 
우울감이 든다면, 억지로 더 바쁘게 지내라고.
걱정할 틈도 주지 말고, 그렇게 바쁘게 지내라고.

미국에서 3주 동안 곰브리치와 맥루한, 그리고 소로우를 얼마나 펼칠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군장은 다 챙겼다. 이제 출발. 행군 시작.



# 3주 전에 쓴 글인데, 이제 불과 사흘 뒤면 다시 한국에 있겠네요. 시간은 엄청나게 빨리 갑니다. 들었던 대로 무척이나 일과가 빡빡해서 곰브리치는 1/3쯤, 소로우는 겨우 몇 페이지 뒤적거린 것이 전부입니다. 맥루한은 베개 대용으로 잘 썼습니다. 높이가 적당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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