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퇴근시간은 약 53분정도 된다. 직장인의 평균 출퇴근시간을 생각하면 아주 길지도 아주 짧지도 않은 시간이다. 지하철 -> 버스 환승을하면 5~10분정도 단축되지만, 버스 회차지점에서 타기 때문에 100% 앉아서 올 수 있다는 장점을 취하여 버스만 50분 넘게 타기로 했다. 내려서 3~5분정도 걸으면 집이 나온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정말 지루하지만, 이것 때문에 이사를 하기에는 너무 어리광인듯 하여 참고 다니고 있다.
내가 내리는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는 분식집이 하나 있다. 만두 전문점을 컨셉으로 문 앞에는 커다란 찜통이 있고, 수시로 만두를 찌는 수증기가 나온다. 프랜차이즈나 대형 분식집이 아니고 소박한 개인음식점이기 때문에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투박한 인테리어로 되어 있다. 낡은 TV가 있고, 하얀 바닥과 벽이 있다. 메뉴판은 오랜 세월이 느껴질 만큼 촌스럽지만, 그렇게 낡지는 않았다. 요즘 대부분의 음식점이 그렇듯, 펜으로 최근에 음식값을 올렸다.
청년은 비빔밥밖에 먹을 줄 몰라? 왜 비빔밥 밖에 안시켜먹어? 주인할머니가 내게 뱉은 첫마디다. 맞는 말이다. 나는 보통 집에서 밥을 해먹기에 저녁을 밖에서 해결하는 횟수가 적지만, 밖에서 해결하는 절반은 그 분식집에 가고, 꼭 비빔밥을 시켜먹는다. 비빔밥을 좋아하는 것도 있고, 주인할머니가 비빔밥 인심이 후해서 재료를 넉넉히 넣어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집은 비빔밥에 꼭 열무를 넣어주는데 그 열무 맛이 일품이다.
사실 비빔밥만 시켜먹은 것은 아니다. 처음 이사와서 몇 번 갔을 때는 김밥이나 순두부찌개 같은 것들을 먹었더랬다. 근데 그 집은 비빔밥이 제일 맛있었다. 김밥은 정류장에서 좀 더 떨어진 사거리 김밥천국이 더 맛있었고, 순두부찌개는 그 분식집 옆에 두부 전문점이 훨씬 잘하고 맛있었다. 그래서 다른 메뉴들을 먹을 때는 다른 집을 가고 비빔밥을 먹을 때만 그 집을 가는 것이다.
비빔밥 질리면 다른 거 먹을게요. 그냥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김밥이 별로니, 순두부찌개가 심심하니 하는 말은 굳이 싶어서. 주인할머니는 잠깐 나를 보더니, '공부 잘했지?' 하신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꼭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선택한 거에 대한 이유를 만들고 잘 안바꾸는 것 같다고 하셨다. 자주 오는 서울대 나온 수학과외선생님이 있는데 올 때마다 된장찌개를 시켜먹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서울대 나왔냐고 해서 아니라고 했다.
주인할머니가 나를 비빔밥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루는 이른 야근을 하고 8시 30분쯤 분식집에 들어갔는데, 늦어서 포장만 가능하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다음에 온다고 하고 나와서 사거리 김밥천국을 갔는데, 주인할머니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늦어서 비빔밥이 안되면 김밥이라도 포장해가지 비빔밥이 안된다고 나가는 사람이 어딨냐는 것이다. 김밥 한 줄 버는게 아쉬워서 그러시진 않으셨을 것 같은데, 그저 요상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 이후로 주인할머니와 대화가 텄고, 분식집을 들어가지 않더라도 눈이 마주치면 눈인사는 하는 사이가 되었다. 동네를 오래 살다보면, 그저 혼자 살아가려고 해도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한 번은 초밥집을 갔는데 웨이팅이 길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홀서빙하시는 분이 너무 미안해하셨다. 그냥 내 선택으로 기다린건데 너무 미안해하시더니 그 이후로는 기억해주시고 인사해주신다. 자주가는 코인노래방 주인아주머니는 저번에 CCTV를 고쳐드린 이후로 나만 보면 너무 크게 웃어주신다. 그렇게 동네주민이 되어가는 건가보다.